MZ 세대의 예능을 보며

2022.08.27 13:37

Sonny 조회 수:478


저는 그렇게 예능을 좋아하지 않고 티비의 모든 프로그램에 좀 거리감을 느끼는 편입니다. 정해진 목적을 위해서 모든 반응도 자막으로 강제하는 듯한 느낌이 좀 부담스럽다고 할까요. 유일하게 챙겨보는 예능은 런닝맨인데, 런닝맨은 출연자들간의 오래된 케미가 자연스러운 느낌이 있어서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주변사람 때문에 예능을 볼 때도 있습니다. 예능을 보면서도 저게 뭐가 재미있지 이런 느낌으로 투덜대기도 하고 관찰도 하는데요. 취향차이라기보다는 세대차이에 더 가까운 느낌을 받았습니다. 어떤 예능에서는 출연자들이 나서서 끼와 흥을 폭발시키고 "춤을 추는" 순서가 아예 프로그램 안에 구성이 되어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지구오락실이나 놀라운 토요일이 그런 구성입니다. 출연자가 다른 사람들 앞에서 무조건 춤을 춥니다. 누가 됐든 춤을 춰야됩니다. 그리고 그걸 모든 사람이 즐깁니다. 저는 이런 구성이 좀 이상하다고 느끼면서도, 틱톡 세대의 자기과시와 일맥상통하는 결이 있다고 느낍니다. 





과거에는 춤을 춘다는 행위가 보다 더 특별한 행위였습니다. 춤에 대한 재능이나 훈련이 된 사람들이 다수의 춤알못 관객들에게 선보이는 장기자랑의 느낌이 있었죠. 과거의 예능에도 춤을 추는 구성이 있었지만 지금과는 다른 느낌입니다. 왜냐하면 이 때 예능에서의 댄스타임은 나이트클럽의 무대를 옮겨놓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과거의 예능에서 춤을 추는 것은 이성에게 어필을 하는 수단입니다. 가장 대표적으로는 강호동이 전두지휘했던 천생연분이나 엑스맨이 있을 것입니다. 왜 예능에서 춤을 추느냐? 그건 아마 일상 속에서 놀이의 문화가 지금보다는 천편일률적이었던 사회적 배경에서 나이트클럽이 (방송에 참여하는) 성인들의 거의 유일한 유희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춤을 좋아해서 방송에 끼워넣은 게 아닙니다. 잘 노는 어른들은 나이트클럽에서 이렇게 하고 노니까, 그걸 그대로 옮겨놓은 거죠. 춤이 목적이 아니라 춤추는 거 빼고는 어른들이 (멋지게) 노는 걸 표현할 방식이 달리 없었던 고육지책이라고 할까요.


그러니까 개그맨들이 과하게 춤을 추는 것이 일종의 역발상으로 소비되기도 했습니다. 춤은 일단 잘추는 사람이 멋있게 춰야한다는 전제가 있기 때문에 그 틀을 부수고 자기가 마음대로 춤을 추거나 춤을 못추는 것이 하나의 컨셉이 되기도 했죠. 춤을 좋아하는 유재석도 춤에 대한 재능이 춤에 대한 애정을 따라가지 못해서 '슬프고 웃긴' 케이스입니다. 춤을 잘 추는 사람이 잘 춰서 뜨는 경우라면 천생연분에서 비가 가슴팍팍 댄스를 췄던 경우가 있겠네요.




현재 예능에서 춤을 춘다는 건 전혀 다른 느낌입니다. 제가 이걸 틱톡 문화라고 하는 것은, 춤을 추는 것이 자유롭게 춤을 추는 게 아니라 어떤 아이돌 그룹의 안무를 얼마나 정확하게 알고 재현하는지에 초점이 더 맞춰져있기 때문입니다. 특히나 놀라운 토요일에서의 댄스타임은 틱톡에서 유행하는 '안무챌린지'와 대단히 흡사합니다. 이제 아이돌들이 다른 아이돌의 안무를 커버하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며 팬미팅에서도 종종 보이는 광경입니다. 그래서 과거의 예능에서 요구하는 춤과는 완전히 다른 감성을 갖고 있습니다. 옛날 예능에서는 춤을 잘춘다는 사람이 종종 "춤을 준비해서" 그걸 가지고 나오는 일들이 많았죠.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아이돌의 춤을 알고 흉내낼 수 있으면 됩니다. 


이것을 사회적인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춤이라는 것이 특정 세대의 전유물이 된 것 같다는 인상을 줍니다. 춤이 더 이상 원론적인 의미로서 자기가 음악에 맞춰서 자신의 몸으로 감각을 표현해내는 게 아니라, '너 이거 알어?'에 대한 대답입니다. 이 때 '너 이거 알어?'라는 질문은 '우리들은 다 알고 있는 것'의 전제를 깔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은 힙스터가 됐든 인싸가 됐든 여러 단어로 표현할 수 있겠지만 한 세대 안에서의 문화적 리더그룹으로 칭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현재 아이돌 문화를 기반으로 한 춤을 얼마나 많이 알고 그것을 정확하게 표현해낼 수 있는가. 그래서 춤을 잘 춘다는 것의 개념도 더 확장될 수 있습니다. 리듬에 맞춰 정확하면서도 신선한 표현을 해내는 게 아니라, 어떤 노래에 어떤 춤이 나왔는지 지식백과처럼 그걸 알고 맞출 수 있어야 하는 "아이돌 오타쿠"의 개념이 포함될 수 있겠죠.


그래서 현 세대의 춤을 예능에서 소비하는 방식은 줄임말 퀴즈를 하는 것과 유사합니다. 알잘딱깔센이 뭔지, 좋댓구알이 뭔지, 특정 세대의 표현에 익숙해지지 않으면 전혀 알 수 없는 줄임말들을 놓고 희롱(?)하는 것처럼 춤 또한 특정 안무를 재현해낼 수 있는지에 초점을 맞추는 거죠. 이것의 본질은 순수한 퀴즈라기보다는 특정 세대와 특정 향유층에 포함되어있는지를 확인하며 배제의 권력을 누리는 과정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겁니다. 아이 그걸 몰라? 아유 늙은이네 늙은이~ 하며 더이상 젊지 못한, 혹은 알아야 될 걸 몰라서 유행에 뒤쳐진 사람으로 포지셔닝하고 놀리는 그런 과정이죠. 


그렇게 본다면 현 세대의 춤이라는 건 알아야 하고 재현할 수 있다는 점에서 보다 상류계층의 전유물에 대한 탐욕처럼도 보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춤을 잘 춘다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선망하는 누군가의 무엇을 모방하면서 잠깐이라도 그의 위치를 점하는 계급적 욕망이기도 하죠. 그 모방의 대상은 당연히 노래 잘하고, 춤 잘 추고, 잘생기고 이쁘고, 날씬한 아이돌에 대한 선망입니다. 그런 점에서 아이돌의 사회적 위치는 현 10대 20대들이 가장 선망하면서도 가까이 하고 싶은 그런 상징적 위치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지만 일단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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