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8년작으로 이제 24년 묵었습니다. 97분이구요. 스포일러 있습니다. 이 영화 스토리 모르실 분이 어딨겠어요. 설사 몰라도 영화 시작하면 다 예측 가능하니 뭐 부담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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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올려놓고 보니 재개봉 포스터네요.)



 - 그러니까 제가 그 시절에 이 영화를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고. 3년 뒤 '봄날은 간다'를 보고난 뒤엔 그냥 '멜로는 허진호가 짱이야!!'라고 외치고 다녔고 뭐 그랬습니다. 이후로 이 두 영화를 능가할만한 작품은 못 남겼(다고 저는 생각하)지만 그래도 수작에서 평작 이상은 되는 작품 두엇 더 남기고 그러셨죠. 최근작이자 빅히트작인 '덕혜옹주'는 소재도 그렇고 사람들 입소문도 그렇고 절대 제 취향이 아닐 것 같아 안 봤고 앞으로도 영원히 안 보겠습니다만.

 암튼 제가 워낙 멜로를 안 보는 사람이다 보니 사실 지금까지도 제게 한국 멜로 탑은 허진호의 초기작 두 편이었고 그래서 궁금했습니다. 그게 과연 지금 다시 봐도 그렇게 감명 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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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참으로 자연스러운 동네 아저씨로소이다!!! 라는 포스의 한석규 표정.)



 - 일단 아쉬운 소리부터 하자면, 아무래도 처음 봤을 때와는 다르네요. ㅋㅋ 뭐랄까. 여전히 잘 만든 영화라고 생각하지만 이제와서 다시 보니 뭔가 노림수 같은 게 눈에 띕니다. 그 당시엔 그냥 다 일상적이고 자연스럽고 뭐 그런 느낌으로 감동적이었는데. 아마도 그 시절에 나오던 한국산 멜로들의 과장된 드라마틱 무드들 때문에 상대적으로 이 영화의 장점이 확 눈에 띄면서 다른 게 다 묻혀 버렸나... 싶기도 하구요.

 근데 그 '노림수'라는 게 뭐 나쁜 게 아니구요. 그냥 이야기가 좀 지나칠 정도로 깔끔합니다. 그리고 또 은근히 '예쁨'에 대한 강박 같은 게 느껴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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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단 심은하가 나오니 영화가 내내 예쁘긴 합니...)



 - 주인공 '정원' 말이죠. 이 캐릭터가 이 영화 그 자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석규의 연기를 보면 이 양반은 평범한 동네 아저씨(고작 30대 초중반이지만 심은하가 '아저씨'라고 부르니 아저씨인 겁니다!)여야 하거든요. 허허허 하고 실없이 웃는 폼이나, 맘에 드는 여자에게 재밌는 얘기 해준답시고 군대에서 겪은 귀신 얘기나 들려주는 폼이나, 가끔 남자 사람 친구들 만나서 노는 모습을 보면 영락 없는 소시민 아저씨가 맞아요. '화장하니 예쁘네~' 라든가 '진짜 좋아하는 남자 생기면 달라질거다~' 같은 대사들도 딱 분위기가(...)


 근데 그 아저씨가 당시 톱스타 한석규의 형상을 하고서 엄청나게 깔끔을 떠는 겁니다. 네, 이 양반 가만히 보면 정말 깔끔해요. 대충 아무 동네 사진관인 척하는 '초원 사진관'도 가만 보면 엄청 깔끔 단정하죠. 집에서 편지 쓰는 장면에서 나오는 본인의 방도 아주 일상적이고 평범해 보이는 소품들이 되게 깔끔하고 예쁘게 정리되어 있구요. 또 옷도 멋부린 티 안 나는 스타일로 되게 깔끔하게 잘 입습니다. ㅋㅋ (이건 심은하의 '다림'이 직접 대사로 지적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걸 넘어서 가장 중요한 게, 자신의 삶에 대해서 굉장히 완벽주의적 깔끔함을 추구합니다. 이 양반이 차근차근 자기 죽을 준비 하는 걸 보세요. 그리고 그러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비치는 자신의 모습까지 관리하고 지켜내는 걸 보시죠. 절대로 평범한 동네 아저씨가 아닙니다.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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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대로 평범한 동네 아저씨는 아니라는 증거.jpg)



 - 그래서 영화도 그런 느낌입니다.

 작정하고 한국적인 신파를 완벽하게 제거해주마!! 라는 목표로 만들어진 것 같은 작품이고 아주 훌륭하게 성공합니다. 그러면서도 중간중간 관객들을 울컥하게 만들 장면들을 슬쩍슬쩍 타이밍 좋게, 톤 조절 완벽하게 해서 집어 넣어요. 이한위 친구님과 술 먹는 장면, 혼자 이불 뒤집어쓰고 소리 죽여 오열하는 장면, 전설의 그 비디오 작동법 가르치는 장면 같은 것들은 지금 봐도 참 훌륭합니다.


 한석규 심은하 둘 다 이 영화로 극찬을 받았던 기억인데. 지금 와서 보면 그 좋은 연기들도 사실 감독의 기획과 통제의 영향이 아주 컸겠다... 라는 생각이 듭니다. 보면 사소한 장면들에서도 연기에 디테일이 되게 많아요. 그냥 둘이 걷기만 하면 되는 것 같은 장면도 가만히 보면 뭔가 '리얼리티'가 느껴지는 방향으로 사소한 디테일들이 들어가 있고 그렇습니다. 뭐 그 중 일부는 배우 애드립도 있겠지만, 거의 영화 내내 그러는 걸 보면 애초에 세세하게 지시된 연기였던 거겠죠.


 그리고 앞서 말했듯이 영화가 그냥 내내 쭉 예뻐요. 근데 팬시하게 꾸며낸 느낌을 최소화하면서, 마치 일상의 리얼리티라도 담아내는 중이라는 느낌으로 예쁩니다. 특별히 호사스럽게 예쁜 피사체가 나오는 것도 아니고 배경도 걍 일상적인 배경들입니다만. 좀 집요하다 싶은 느낌으로 구도를 잡아내고, 거기에 살짝 색 바랜 듯한 색감의 화면이(근데 이거 넘나 인스타 갬성인 것...) 결합돼서 그냥 쭉 내내 어여쁘십니다. 나중엔 그 집요함 때문에 살짝 갑갑하단 생각도...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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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기자'로서의 심은하 리즈 시절 개막을 알렸던 영화였죠. 지금 봐도 막 되게 잘 하는 연긴 아니지만 충분히 자연스럽고 좋습니다.)



 - 근데 그래서 별로였다는 얘긴 아닙니다. 

 오히려 처음 봤을 때보다 더 감탄하면서 봤어요. 1998년에 한국에서 이런 스타일로 이 정도 완성도의 멜로를 뽑아내다니. 어쨌든 허진호가 능력자였고 또 한국에선 이 장르에서 선구자적 인물이었구나... 라는 생각을 했네요.

 근데 덤으로 생긴 궁금증 하나는 이거였네요. 허진호는 원래 일본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던 걸까, 아님 그냥 어쩌다 일본 영화 쪽 갬성이 충만한 영화 감독이 되었던 걸까. ㅋㅋ 영화의 배경, 캐릭터들, 정서가 다분히 일본 영화스럽더라구요. 찾아보니 일본인들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이 영화가 일본에서 그렇게 인기가 많았고, 그래서 리메이크까지 되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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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할머니 장면도 당시에 많이들 감명 받았던 걸로 기억합니다.)



 - 허진호 영화들이 다 그렇듯 남자 이야기죠. 다림의 캐릭터는 마치 '소나기'의 소녀 마냥 피상적으로, 내면을 알 수 없게 그려집니다. 그냥 정원의 삶에 갑자기 난데 없이 마구 내려친 벼락 같은 축복이랄까요. 그래서 영화를 통틀어서 정원 없이 다림이 뭘 하는 장면은 다 합해야 2~3분 될까 말까 하구요. 그나마 그것도 뭔가 배우에 대한 예의상 넣은 것 같달까. 다 쳐내 버려도 아무 상관이 없는 장면들이라고 느꼈어요.


 그리고 엄밀히 말해서 이건 본격 멜로라기 보단 그저 한 아주 깔끔한(...) 남자가 죽음을 준비하는 이야기에 가깝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과정이 다림의 난입으로 인해 좀 더 로맨틱하고 행복해졌을 뿐. 마지막을 보면 정원이 다림을 보내고 기억하는 방식도 결국엔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는 과정의 일부 정도였던 거죠. 절대로 둘의 사랑이 중심에 있는 이야기는 아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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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제로도 제 주변에선 한석규가 심은하를 몰래 바라보는 장면보다도 요 장면 얘길 훨씬 많이 했었거든요.)



 - 다시 보니 한석규와 심은하의 연기에서 살짝 흠이 느껴지긴 합니다. 심은하는 표정이나 행동 같은 건 다 자연스러운데 가끔 대사가 좀 서툴어요. 그리고 한석규는 서툴다 싶은 부분은 없지만 종종 과장된 느낌이 들구요. 하지만 뭐 꼬치꼬치 따지는 느낌으로 봤을 때 그렇단 얘기고, 그냥 보면 둘 다 좋았습니다. 심은하는 일단 비주얼로 납득을 시키는 가운데(...) 본인 역할에 맡게 발랄하게 에너지 넘치고 예쁜 모습 잘 보여주고요. 한석규도 인상적인 장면을 여러 번 남겼죠. 앞서 말한 비디오 작동법 장면도 그렇고. 또 마지막의 셀프 영정 사진 촬영 장면도 아주 좋았습니다. 그리고 주제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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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이 사진관이라는 공간, 소재도 넘나 이루 말할 수 없이 그냥 딱 맞아 떨어지는 메타포라 굳이 언급을 하기가 싫을 정도... ㅋㅋㅋ)



 - 아... 이게 글을 적다 보니 뭔가 트집 잡기 같은 느낌이 드는데요. ㅋㅋㅋ

 다시 말씀드리지만 아주 잘 만든 영화라고 생각하면서 즐겁게 잘 봤습니다. 그 시절처럼 막 감동 받고 그랬던 건 아니지만 그건 뭐 세월 탓이구요.

 처음부터 끝까지 아주 깔끔하게, 그리고 시대를 앞서간 느낌으로 한국 멜로판에 새로운 스타일을 거의 완성형에 가까운 퀄로 제시한 영화 아니었나 싶었습니다. 감탄하면서 봤구요. 그럼 다음 감상은 또 대략 20년쯤 후에... (쿨럭;)




 + 시작할 때 유영길 촬영감독님 언급하는 자막이 나오죠. 그 분의 유작이었는데. 2022년에 이 영활 보니 명복을 빌 분이 한 분 늘었더라구요. 한석규의 옛사랑 역으로 나온 분이 전미선씨... 다시 한 번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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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8월의 크리스마스'라는 제목과 안 어울리게 8월도 아니고 크리스마스도 지난 1998년 1월에 개봉했었네요. ㅋ 결국 촬영은 1997년에 했을 거고. 그래서 그런지 등장 인물들이 아무도 핸드폰을 안 씁니다. 영화의 클라이막스를 만들어내는 엇갈림은 핸드폰이 있었다면 불가능했겠죠. 역시 첨단 문명은 낭만의 적!! ㅋㅋㅋ



 +++ 근데 가만 생각하면 생각할 수록 과연 우리 정원씨가 그리 좋은 양반이었나... 하는 의심이 듭니다. 옛사랑 전미선과 대화할 때, 자기랑 잘 안 돼고 딴 남자에게 시집가서 애 둘 낳고 두들겨 맞고 살다가 친정으로 도망쳐 온 그 사람이 "왜 결혼 안 했어?"라고 묻는 데다가 "너 기다리느라 안 했지? 허허헝" 이러는 걸 보면 사실 좀 사악한 사람일 것 같기도 하고... 흠. 

 마지막에 심은하를 멀리서 바라만 보다 가는 것도 그렇지 않나요. 그 시절 갬성으론 '곧 죽을 테니까 다림의 행복을 위해!! ㅠㅠ' 이런 식으로 받아들였지만 이제사 생각해보면 결국 그냥 이승과의 깔끔한 작별을 위한 거구나... 라는 쪽으로 생각하게 되더라구요. 제 감성이 늙어서 그런 건가요. ㅋㅋ



 ++++ 문득 깨달은 것. 제가 근래들어 챙겨 본 이 시절 멜로 영화들 있잖습니까. '동감', '시월애', '8월의 크리스마스'. 이 세 편을 통틀어서 주인공들의 키스씬이 나오는 영화가 하나도 없습니다. 포옹 한 번도 안 해요. 아니 뭐 '동감'은 주인공들이 연인 관계가 아니긴 하지만, 각자 연인들하고도 안 했죠. 김하늘이 박용우랑 키스씬이 나오긴 하는데 상상 씬이었구요. 음. 이 시절 한국 사람들에게 '진정한 사랑'과 스킨십은 어떤 관계로 생각되었던 것일까. 라는 생각이 좀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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