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 분들은 거의 다 봤을테니 스포일러 다 내뱉겠습니다


설정은 쎈데 상식적인 사소한 부분들이 허술한 영화를 볼 때 제 태도는 둘로 나뉘는데

하나는 '아니, 이런 기본적인 아귀도 맞추지 못하면서 무슨 스토리를 진행시키겠다는 거야?ㅉㅉㅉ' 이고

다른 하나는 '됐고! 지금 그딴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ㅋㅋㅋㅋㅋㅋ'입니다

딱 잘라 말할 순 없지만 큰 자본이 들어간 블록버스터나 SF 영화들을 볼 때의 태도가 전자이고

소자본의 비급영화나 크리쳐물, 공포영화들이 후자이죠

근데 프로메테우스는 대작인데도 '됐고!ㅋㅋㅋㅋㅋㅋ'하면서 봤어요, 와, 이런 게 팬심인가요

리뷰들이 대부분 실망스럽다거나 미적지근해서

예고편을 보며 한껏 부풀었던 마음이 쭈그러드는 바람에 여태 안 보고 있다가 

스파이더맨 개봉하면 아이맥스 3D에서 아주 밀리겠구나 싶어 부랴부랴 오늘에서야 보고 왔는데

아, 저도 제가 이렇게 좋아할 줄 몰랐는데 이렇게 좋네요!

스포 주의하느라 리뷰를 하나도 안 읽어서 잘은 모르지만 제목만으로 봤을 때 그다지 엄청나게 좋았다는 분은 없었던 것 같아서

뒤늦게 저라도 오버를 좀 해두겠습니다.


일단 지금까지 제가 본 아이맥스 3D 중 시각적으로 최고였습니다

전 사실 3D에 관대해서, 보려던 영화가 3D 포맷으로 나오면 주저없이 선택하거든요

근데 다 합쳐도 프로메테우스가 최고였어요! 진짜 아이맥스 상영 끝물 놓쳤으면 어쩔 뻔 했나 싶을만큼.


뭔가 거대한 의문과 호기심으로 뛰어들었다가

에일리언에게 된통 당하곤 해답 따위는 사치일 뿐, 목숨만 간신히 건져 나오는

에일리언 1편의 형태를 고스란히 되풀이 하는데 아, 왜 이렇게 반갑나요 

인류의 기원이 어쩌고 영생이 어쩌고 창조주가 어쩌고 심오하게 각을 잡다가

꽁지빠지게 달아나기 시작는데 그래, 이게 에일리언이지!하면서 웃기기도 웃기고, 거의 엉덩이가 들썩일 정도로 신이 나서

자기 반복이 나태하다거나 진부하다는 생각이 들 새가 없었어요

물론 이 영화는 정확한 해답을 준비해놓고 시작된 작품이라고 하고 트릴로지가 정말 성사된다면 후속편은 형태가 다르겠지만

에일리언 1편과의 호응을 염두에 둔다면 적어도 프로메테우스 이 한 편의 완결성은 충분하다고 생각했어요

에일리언 1편도 저 생물체가 뭔지, 스페이스 자키의 정체가 뭔지, 웨일랜드의 목적이 뭔지 모호한 것 투성이지만 아무도 그딴 거 신경쓰지 않죠(적어도 등장인물들은 아무도)

그야말로 설정의 구멍에 발이 쑥쑥 빠지면서도 '됐고! 지금 그딴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ㅋㅋㅋㅋㅋㅋ'라는 식이랄까요

큰 클라이막스 지나고 영화가 끝나는 것 같을 때 마지막 에일리언 하나 남겨놓는 공식도 그대로 써먹었죠. 그럴 줄 알았어! 갓챠! 하신 분 또 계신가요?


밀레니엄 헐리웃판을 먼저 보고 스웨덴판을 봐서인지 단지 취향인지

누미 라파스의 리즈벳이 영 별로였거든요, 루니 마라 리즈벳에 좀 심하게 반하기도 했지만.

근데 포스트 리플리, 아니 프로토타입 리플리인가요

엘리자베스 쇼를 연기하는 누미 라파스는 정말 괜찮네요

일단 흑발에 골격이 단단해보이는 외모 자체가 리플리를 계승하기에 부족함이 없고요

자기 애인을 불에 태워 죽인 여자에게 토 한 번 달지 않는 것도 허술하다면 허술하지만 거 괜찮네 싶더라고요, 웃기기도 하고.

더는 못하겠다고 완전히 자포자기 상태로 드러누워있다가

자기 애인 감염시켜 죽인 안드로이드가 살아나갈 방법이 있다고 하니까 뒷얘긴 듣지도 않고 그 길로 벌떡 일어나 동맹 맺고. 아, 이러면 안 되는데 너무 웃겨요. 머,멋있어.


이런 대작을 보고 고작 이런 거나 칭찬하고 있자니 모욕같기도 합니다만

무엇보다 가장 좋았던 건 데이빗의 거의 악의적인 문장 구사였습니다

인조인간은 사람을 해칠 수 없으니까 교묘하게

'해답을 얻기 위해서 어디까지 갈 수 있냐, 무슨 짓까지 할 수 있냐'고 묻고

무슨 짓이든 하겠다는 대답을 얻어내는 장면은 정말 사랑스러우리만치 잔인하지 않았나요

그리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그냥 확인해본 거라는 듯 정갈하게 검지 손가락 끝을 술잔에 살짝 담그는 동작이라던가! 살인 한 번 우아하기도 하지.

찰리(창조주)에게 인간은 나(안드로이드)를 왜 만들었냐고 묻고 '만들 수 있으니까 만들었다'는 대답에 '니 창조주가 너한테 그 따위로 대답하면 참 실망스러울 거야, 그치?'하는 씬에선 거의 애처러웠고... 데이빗이 애처러웠다기보단, 새삼 실망스러울 것도 없다는 데이빗의 태도 앞에 창조주라는 인간이 오히려 애처러웠다고 해야할까요.

그 후 엔지니어의 검은 유기체에 감염되어 찰리가 죽은 뒤 망연자실한 닥터쇼에게 '신에게 버림받은 기분이겠다'며 찰리에게 받은 상처를 되갚아주고, 한 술 더 떠 '니 애비도 그렇게 죽었댔나'하며 한 방 더 먹이는 대목에선 절대 데이빗이 아무것도 모르고 이런 행동을 할 리 없다는 심증까지 들더군요. 진짜 사악하기가 이루 말 할 수가 없어요.

셀프 제왕절개로 에일리언을 꺼낸 후 고통스러워하는 닥터쇼에게 '니 안에 그런게(그런 용기가) 있는 줄은 몰랐다'는 언어유희로 괴물을 잉태한 닥터쇼를 한 번 비웃고 '아이쿠, 말실수였어' 쿨하게 정정하는 데까지 이르면 두 손 두 발 다 들게 되죠.

다른 포인트도 많을텐데 대표적으로 기억나는 게 이거네요. 사실 영화관 번역이 다 포인트를 놓치고 있어서 위의 대사들도 제가 들은 뉘앙스대로 바꿔적은 거라, 제가 알아듣지 못한 농담들이 더 많았을 것 같은 아쉬움은 있습니다.

에일리언2의 비숍처럼 인간의 말을 다 따르면서도 그 태도는 결코 비굴하지 않아 오히려 뭔가 의뭉스러워보이고, 에일리언1의 애쉬처럼 웨일랜드사의 사악한 목적에 헌신하고 있는 것 같아 한없이 위험해보이고. 애쉬와 비숍 둘 다 어디 내놔도 손색이 없는 매력적인 안드로이드였는데 그들의 장점(이라고 할 수 있다면)을 한데 모아놓다니요. 아아... 데이빗.


프로메테우스의 '불'은 생명력의 원천인 듯 보이는 그 검은 유기체 (검은 기름이라고 쓰고 싶은 걸 참았습니다. 오랫만에 닉네임 드립이에요)일까요. 지렁이가 검은 유기체의 축성을 받고 에일리언 뱀으로 레벨업하는 거 근사했어요. 그리스 신화로 치면 불이지만, 성서로 치면 선악과의 비유같기도 하죠? 검은 유기체를 둘러싼 이미지들이 말이죠. 뱀, 검은 유기체를 삼킨 사내, 성적인 대상이 되어 생명을 잉태하는 여인...


뱀 모양이다가, 불가사리 모양이다가, 에일리언 프리퀄 아닌 척 참 열심이었어요. 맨 마지막에 가서야 순수한 검은 유기체를 인간이 배양하고 신이 낳아 마침내 우리가 잘 아는 에일리언의 형상으로 짠 나타나는데 이 영화 평이 왜 그렇게 안 좋았나 알 것 같기도 했어요. 확실히 팬보이를 위한 영화구나 했달까. 인류의 기원 얘기하는 척 하면서 에일리언의 기원만 보여주고 있어! 아무도 안 궁금할텐데!




+ 사실 에일리언1편에서 슬쩍 던진 언급이 전 굉장히 좋았거든요. 에일리언은 생존에 최적화되어 진화한 생명체라고. 엄청난 공격력, 염산에도 녹지않는 피부, 상처가 나면 염산 피가 나와서 오히려 공격이 되는. 하드웨어적으로 진화의 끝까지 간 생명체와 소프트웨어적으로 진화의 끝까지 간 인간의 대결. 그래서 이 설정에 따로 설명이 필요하나 싶기도 하고, 프리퀄을 별로 안 좋아할 준비가 돼 있었는데.

+ 안전 수칙 얘긴 많이 나왔겠지요? 아오, 쫌!!! 됐고. 그래도 이 말은 해야겠어요. 엔지니어가 인류의 기원이라고 합시다, 그렇다고 그들이 창조주라 믿는 건 대체 뭔가요! 우리가 운석에 묻은 바이러스에서 기원했으면 운석이 우리의 창조주인가요! 종교적 이유 말고, 다른 설명이 영화에 나왔는데 제가 놓친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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