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저녁 제가 실제로 경험한 일입니다.
오늘 아직 겨우 수요일이지만 이번 주 동안 지독한 컨디션 난조로 저녁 8시가 다 되어 퇴근하던 중입니다만,


어제 몸과 정신이 흡사 싸구려 구두의 밑창과 본체처럼 분리된 채, 제가 사는 건물의 로비에서 엘리베이터를 향해 겨우 반 기계적으로 걸아가는데, 제 앞에 알프스의 소녀 하이디 같은 차림의 누군가가 비실비실, 실체가 아닌 실루엣의  느낌으로 흐느적거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니보다 그나마 동세가 빠른 저는 당연히 앞질렀고 눈으로 그 실체를 보게 되었어요.

 

아직 멀쩡히 현존하고 있는 사람에게 지극히 결례라는 것을 알지만, 그럼에도 제가 가족들 중 누군가의 부음을 받고 이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한 바 있는 주검의 낯빛과 형태를 그대로 한 노파가, 겨우 붙어있는 목숨을 마지막 확인이라도  하겠다는 마지막 외출이 아닐까 싶을 만큼, 피로와 신경증으로 찌든 저의 눈에는 불경스럽게도 시체의 외양을 하고 저와 같은 엘리베이터를 탔던 것입니다.

 

핏발이 선 눈에 청색증 직전의 파리한 얼굴을 하고 제가 누른 버튼을 보고도 몇 층 사느냐 떠듬거리며 굳이 묻기에 이미 그땐 너무 얼어버려서 웅얼거리는 제게, 별안간 쓱 손을 내미는데 저는 그만 주저앉을 뻔 했습니다. 저는 사람의 몸이 죽으면 식어가며 나무토막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익히 담담히 경험했음에도, 제가 무상하게 베푼 사소한 친절에 예상치 않게 적극 반응하는 상대의 몸짓이 몹시 참기 힘들 만큼 무서웠습니다. 저보다 한 층 아래 사는 듯한 그 분이 하이디의 잠옷 같은 여름옷자락을 스르륵 남기며 고맙다고 인사하고 엘리베이터 밖으로 나갈 때까지 저는 무섬증과 죄책감으로 나른한 피로가 일시에 걷히는 갑작스런 경각으로 온몸에 식은땀이 났어요. 그분이 제게 뭘 잘못한 것도 아니고 저 정도의 상태에서 그나마 예의를 갖추는 걸 보면 상당히 양호한 것이었을지 몰라도, 저는 찰나적으로 지극히 제 늙은 모습을 서둘러 상상해 버렸고 갑자기 너무 자신이 없는 거에요.

 

얼마 전에 게시판에서 본 글 중, 배우 윤여정씨가 자꾸 자신의 늙음을 주위에 환기시킨다는 글이 있었는데, 개인적으로 윤여정씨 팬이기도 하지만,  전 그 심정 아주 조금 알 것 같고, 다른 것 다 떠나 자신의 노화를 스스로  인식하고 경계하며 동시에 주변에 끼치는 민폐를 고려하여 바짝 날을 세우는 게 당연히 좋다고 생각했어요. 물론 혹자들에겐 자신이 아닌 타인의 나이먹음을 주지해야 하는 게 한 편의 피로 또는 그에 맞는 예우를 해달라는 싸인으로 읽힐 수도 있겠지만요, 늙으면 그저 죽어야 할 건 아니지만 혼잣설움이라는 걸 이미 간파한 지 오래 되어서요.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따위는 광고카피 또는 이제 진짜 자신이 중장년 이후로 넘어가는 노년의 초반들이나 극구 항변하고 싶은 내용이라는 것을 저는 알겠어요. 진짜 어리고 젊은 것들이 저런 말 하는 거 저는 주변에서 여태 못봤거든요. 안티에이징이라는 느끼한 단어로 대변되는 외적이고 미모적인 젊음을 재생하고 싶지는 않지만(그런 거 애초에 없었거니와 영화 'Priceless' 에 나오던 에르메스 마니아의 우아한 초노년 할머니를 바라는 것도 아니지만)

 

저는 잘 늙고 싶어요, 지나치게 건강해서 그것을 자신하고 과시하느라 젊은 사람들 눈쌀 찌푸리지도 않게, 자꾸 골골대지만 쉽게 죽지도 않으면서 자꾸 관심을 끌고 싶은 노년으로 보이고 싶지도 않을 만큼, 적당히 독립적이고 자존심 있는.  그러기 위해서는 더 엄격히 단속하고 절제해야 할 것들 투성이지만, 종국엔 타인이 아닌 스스로를 위해서니까 바짝 더 긴장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2. 그래서 든 생각인데, 술부터 먼저 줄이거나 끊어야 할까요? 술과 담배, 둘 중의 하나라면 좀 더 어려운 게 전자라 생각했고 술을 마시고 문제가 생기거나 사건사고를 당한 적 없어서 나름 자신하고 방심했던 부분에 빨간등이 켜진다는 걸 최근에 연속으로 깨닫고 있어요. 부끄러운 일례로 지난 주에 회사 위크샵을 가서 늦은 점심부터 시작된 술자리에 근 3병에 달하는 소주를 마시고 이후 저녁까지 이어진 뒷풀이에 막걸리 맥주까지 양껏 마시고 멀쩡히 동네에 와서 혼자 병맥주에 진토닉 두 잔 마시다가 문득 눈을 떠보니 새벽 두 시. 테이블에서 엎어져 그대로 잠든 겁니다. 저는 분명 회사 근처에서 밤 11시가 채 안되어  해산하고 사는 동네에 도착해서 2% 아쉬운 마음에 한잔만 더 해야지 해서 실컷 잘 마셔놓곤 눈 떠보니 그런 거지요. 너무  화들짝 놀라 카운터에 계산하며 민망하게 물었더니 몇 번 깨웠는데 미동도 하지 않았다고;; 액티비티가 강한 워크샵에다 전작이 과했고 다행히 동네의  집 근처 술집이라 다행이었다고 애써 자위 하는데도 얼마나 아찔하던지...

 

더욱이 얼마 전에 처음으로 갈아탄 스마트폰의 배터리와 뒷면의 커버가 분리된 채로 분실되었다는 걸 다음 날 눈 떠서야 알아챘을 때의 당혹스러움이란... 결국 술집에서 고이 보관하고 있던 것을 확인하고(그런데 그게 왜 분리된 채로 바닥에 떨어져 있었단 말인지?) 다음날 퇴근길에 더킹도너츠 사들고 가 머리 조아리며 쪽팔리게 찾아오긴 해서 그래도 다행인데, 근래 들어 불과 1,2년만 해도 도무지 상상도 할 수 없는 잔실수를 술 마시고 저지르는 걸 보면 이 짓도 이제 못할 짓인가 싶어요. 그렇지만 오늘도 집근처에서 가볍게 한 잔하고 이제 완전 안전빵인 집에서 마시며 반성해요.

 

3. 다시, 나를 괴롭히지 않고 타인들에게 짐스럽지 않기 위해 얼마나 부단히 노력하며 미리 훈련하며 늙어야 하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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