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 히치콕과 [헤어질 결심]

2022.07.22 22:42

Sonny 조회 수:1319

히치콕의 영화들 중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 [싸이코], [이창], [현기증], [새]와 박찬욱의 [헤어질 결심]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헤어질 결심]을 보면서 정말 기겁했습니다. 작품 내내 히치콕의 영화들을 대놓고 레퍼런스로 쓰고 있더군요. 아마 히치콕의 다른 작품들도 보신 분들이라면 더 알아차리시지 않았을까 합니다. 저는 대표작 몇개밖에는 보지 못했는데 그 대표작들에서 정말 많은 이미지들과 테마를 따왔더군요. 물론 이것이 어떤 장면의 패러디라면 그냥 귀엽다고 웃고 넘어갈 일이지만 저는 이게 박찬욱이 히치콕의 작품들을 여성주의적으로 조금 비틀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히치콕의 작품들이 [헤어질 결심]에서 어떻게 변주되었는지는 좀 곱씹어볼 만한 것 같습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히치콕의 영화에서 여성은 늘 당하는 입장이고 남성이 그 여성을 구해주거나 보호해주는 입장이었다면, 박찬욱은 그걸 뒤집어서 이야기하고 싶어합니다.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는 작품 자체를 막 따온 것 같진 않습니다. 일단 히치콕의 이 영화는 007을 떠올리게 만드는 스파이 활극이니까요. 다만 박찬욱의 이번 영화에서 서래와 해준이 각각 산을 타는 장면은 [북북서로...] 에서 두 주인공이 러시모어산에 매달리는 장면을 상기시킵니다. 

 



[새]에서 까마귀들은 위험한 맹수 무리로 표현됩니다. 이 영화에서의 새들은 이해불가의 존재이며 인간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공격만 당할 뿐 그 어떤 소통도 해내지 못합니다. 반면 [헤어질 결심]에서 까마귀는 보은의 상징이자 두 사람의 애정을 나눠갖는 다정한 사물입니다. 두 사람은 각각 까마귀의 시체에서 깃털을 나눠 간직합니다. 아마 까마귀가 그냥 나왔다면 그러려니 했겠지만 이 영화가 이미 설정해놓은 [현기증]의 세팅 때문에 까마귀를 보면서 [새]를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위의 두 영화들이 특정 장면을 떠올리게 만든다면, 히치콕의 [싸이코]는 박찬욱이 어떻게 영화 속 남성과 여성의 입장을 전복시켰는지를 전체적으로 곱씹게 합니다. [헤어질 결심]에서는 집요할 정도로 죽은 사람의 눈을 클로즈업해대는데 이건 누가 뭐래도 [싸이코]를 레퍼런스로 삼은 연출입니다. 이 때 박찬욱이 바꿔놓은 것은 단순히 피해자의 성별은 아닙니다. [싸이코]에서 첫번째 희생자로 등장하는 마리온의 눈을 클로즈업하는 해당 연출은 이 사건이 얼마나 알 수 없는 미스테리이며 깊고 어두운 것인지를 암시합니다. 마리온의 눈에서 이 영화 전체를 바라본다면 왜 노먼 베이츠가 자신을 죽이는지 알 수 없는 광경입니다. 즉, 피해자의 억울함과 경악이 담겨있는 눈동자이며 이것은 왜 무고하고 무관한 이 여자를 노먼 베이츠가 죽였는지 살인범의 독자적인 내면 세계로 향하는 입구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박찬욱은 피해자의 눈동자를 주시하면서 반대로 이 사람은 왜 누군가에게 죽어야했는지, 죽어 마땅한 이유를 찾습니다. [싸이코]처럼 초월적인 악을 들여다보는 입구가 아니라 지극히 이기적이고 속되기 짝이 없는 가해자들의 진실을 알기 위한 입구로서 박찬욱은 죽은 자의 눈동자를 들여다봅니다. 그래서 [싸이코]에서의 눈동자가 가해자의 이해불가한 내면을 비추는 일종의 가림막이라면, [헤어질 결심]에서의 눈동자는 이해할 수 밖에 없는 가해자(피해자)의 처연한 드라마를 담고 있는 벽지 같은 거라고도 볼 수 있겠죠.


이 눈동자 씬에서 주목할 것은 또 있습니다. 모든 것이 빨려들어가버리는 수챗구멍이 마리온의 눈동자와 겹쳐지며 이 사건은 아무 의미없이, 그저 하수구안으로 흘러가 버려져버리는 인상을 줍니다. [헤어질 결심]에서 물은 반대로 운동합니다. 서래가 구덩이를 파느라 쌓아놓은 모래"산"을 무너트리며, 이 모든 사건을 감춰주고 덮어주는 그런 역할을 합니다. 한 여성의 생명이 무의미하게 희생되어 흘려버려지는 것과 반대로 [헤어질 결심]에서의 물은 여자 자신이 원하는 대로 구덩이를 채워주고 그 안에 고여있으면서 결정적인 의미를 만들어냅니다. 




히치콕의 [현기증]은 형사가 남의 아내와 사랑에 빠진다는 점에서 [헤어질 결심]의 가장 큰 뼈대를 이루고 있는 작품입니다. 송서래의 녹색 옷이나 녹색 조명 같은 미쟝센도 이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겠지요. [현기증]이 타인의 진짜 정체성은 상관없이, 자신이 현혹된 이미지를 타인에게 뒤집어 씌우는 폭력적 이야기입니다. [헤어질 결심]은 그 반대로 그 사람이 겉으로 비추고 있는 이미지를 벗겨내고 진짜 정체성을 꿰뚫어보는 이야기입니다. 스코티가 쥬디에게 했던 폭력을, 박찬욱은 뒤집어서 해준이 서래에게 정확한 이해를 하게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현기증]이 '쥬디'라는 자신의 진짜 정체성을 여성이 계속 잃어버리고 뭉개져가는 이야기라면 (첫번째는 배우에게 의뢰한 남편, 두번째는 이걸 조사하는 형사 스코티) [헤어질 결심]은 해준이 가정폭력피해자이자 외로운 인간으로서의 서래의 정체성을 발견하고 이해해간다는 이야기일 것입니다.


그리고 박찬욱은 이걸 한번 더 뒤집습니다. 해준이 서래를 이해하는 이야기에서, 서래가 해준을 이해하는 이야기로요. 그리고 해준의 진실을 덮어주기 위해 서래가 환상으로 사라져줍니다. 남자를 속이고 자신의 이득을 취하기 위해 여성을 조종한 히치콕의 이야기는, 온 세상을 속이고 남자를 지키기 위해 자신이 직접 환상을 만들어내는 여성의 이야기로 변형했습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어쩌면 [헤어질 결심]이 가장 크게 빌려온 작품이 히치콕의 [이창]입니다. 해준이 서래의 방안을 훔쳐보는 장면은 [이창]의 테마를 가져왔습니다. [이창]에서 제프리는 다리가 부러져서 할 일이 없으니 끊임없이 이웃집을 염탐합니다. 이 때 영화는 관음하는 자의 절대에 가까운 권력과 그의 관음에 철저히 피체험자로 놓이는 관계를 그리죠. 후에 가면 이 관음의 행위에 대한 도덕적 징벌을 받으며 경고를 날립니다. 관음하는 자는 역으로 언제든지 관음되는 대상이 될 수 있다고요. 이 영화에서 관음이란 행위는 일방적인 폭력입니다. 


이 행위는 [헤어질 결심]에서 양가적인 측면을 보입니다. 관음이 그저 보는 것에 한정되는 게 아니라 아예 그 공간 안으로, 대상자의 곁으로 침투하는 일종의 3d 적인 연출로 진일보되죠. 이런 관음행위는 이 영화의 가장 끈적한 순간들입니다. 해준이 숨을 내쉬면서 서래를 걱정하거나 참견하려는 부분은 심하다 싶은 변태적 욕망이 엿보이죠. 박찬욱은 이 행위의 주체와 객체를 후에 가서 뒤집어 놓습니다. 서래를 훔쳐보는 자로, 해준을 보여지는 자로 설정해놓죠. 이로서 관음은 여전히 변태적 행위이나 서로가 서로 엿보기를 원하고 '음미하고' 되돌려주는 존재가 되면서 이 행위는 쌍방의 끈적한 교환 행위가 됩니다. 특히나 그 쌍방간의 교환을 전부 알고 느끼는 사람이 해준이 아닌 서래라는 점에서, 이 영화는 여성이 남성을 느끼는 영화로 전환합니다. 


이 마지막 테마는 조금 더 자세히 써봐야겠네요. 일단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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