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23일 토요일 오후 4시 30분에 한국영상자료원에서 <버닝>을 상영하길래 글을 올려봅니다. 이 글에는 엔딩에 대한 자세한 언급이 있으므로 그것을 감안해서 읽어주시기를 바래요. 그리고 글의 형태로 작성되어서 말투가 이런 것이니 양해 부탁드려요.)

 

<버닝>은 청춘물과 미스터리 스릴러가 느슨하게 결합된 형태의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이 영화가 청춘물의 성격을 띠는 것은 이창동이 애초에 이 영화를 통해 현재 한국 청년들의 분노를 다뤄보고자 했기 때문이다. 청년들이 직장을 구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어떤 무기력함에 빠져 있으며 그로 인해 내면적으로 어떤 분노를 갖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사실 그 분노의 실체를 알지 못한다. 그들이 분노할 대상은 미스터리 속에 감춰져 있는 것이다. 극중 종수는 “세상이 미스터리.”라고 말하는데 바로 이 지점이 <버닝>이 청춘물인 동시에 미스터리 스릴러로서의 성격을 띠게 되는 이유다. 이 영화는 한 두 장면만 빼고는 모두 종수의 시점으로 진행되는데 종수가 바라보는 세계가 미스터리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이 영화도 자연스럽게 세계의 비밀을 감춘 채 진행되는 것이다. 종수의 시선으로 바라본 세상의 모호함은 관객에게도 그대로 전달되어 이 모호하지만 매혹적인 세계로 관객을 이끈다. 

 

<버닝>과 관련해서 두 편의 영화를 떠올릴 수 있다. 하나는 알프레드 히치콕의 <현기증>(1958)이고 또 다른 하나는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욕망>(1966)이다. 이 영화에서 종수가 벤을 차로 장시간 동안 미행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장면은 <현기증>에서 스코티(제임스 스튜어트)가 매들린(킴 노박)을 차로 미행하는 장면과 이미지적으로 상당히 유사하다. 단순히 미행을 하는 장면의 유사성을 넘어서 미행의 대상이 되는 인물과 관련지어 볼 때 매들린이 스코티에게 정체불명의 존재인 것처럼 벤이 종수에게 정체불명의 존재라는 점도 동일하다. <현기증>이 매들린을 추적하는 이야기라면 <버닝>은 일정 부분 벤을 추적하는 이야기인 것이다. <욕망>의 경우 이 영화의 엔딩 장면과 <버닝>을 연관지어 생각해볼 수 있다. <욕망>의 엔딩에서 토마스(데이빗 헤밍스)는 살인 사건을 해결하지 못한 채 영화의 초반에 마주쳤던 마임 그룹의 사람들과 조우한다. 그들은 테니스장에 들어가서 마임으로 테니스를 치기 시작한다. 처음에 토마스는 그들의 마임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마임을 하던 여성이 토마스쪽으로 공이 넘어간 제스처를 취한다. 그러자 토마스는 마임의 참여자가 되어 공이 떨어진 곳에서 공을 주워서 테니스를 치는 사람들쪽으로 던진다. 그러자 그때부터 테니스장에서는 테니스를 치는 사운드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이것은 <욕망>의 주제와도 관련이 있는데 이 시퀀스를 통해 관객은 절대적 진리란 존재하지 않으며 주관적으로 자신이 어떤 것을 믿는 순간 그것은 그 믿는 자에게 하나의 진실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버닝>에도 <욕망>과 유사한 장면이 있다. <버닝>에서 해미는 마임을 배우고 있는데 영화의 초반에 종수 앞에서 귤을 까서 먹는 마임을 하면서 “여기에 귤이 없다는 걸 잊어버리면 돼.”라고 말한다. 그렇게 생각하면 비로소 귤이 있다고 믿을 수 있는 상황이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버닝>은 세계의 진실은 무엇인가를 탐구하는 영화인데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구현하는 마임은 모호함으로 가득 찬 세계를 은유하기 위한 장치로 적절하다. 마임을 진실과 거짓의 문제와 연결시켜서 생각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영화 속에서 해미가 갑자기 사라지면서 <버닝>은 부재와 존재의 경계에 대한 질문을 던지며 진실과 거짓의 문제를 좀 더 심화시키기까지 한다. <현기증>과 <욕망>은 현실과 환상, 거짓과 진실의 관계를 탐구하는 영화라고 할 수 있을텐데 그런 측면에서 <버닝>과 통하는 지점이 있다. 

 

<버닝>에서 이창동은 그의 전작들과 다르게 히치콕적인 서스펜스를 능수능란하게 구사한다. 그런데 히치콕이 그의 많은 영화들에서 스피디한 전개 속에서 서스펜스를 구축해가는 것과 비교해볼 때 <버닝>은 느린 호흡으로 천천히 서스펜스를 쌓아간다. 히치콕은 주관적인 시점의 활용의 대가라고 할 수 있다. 히치콕의 영화에서 관객은 주인공의 시점을 따라 사건을 경험하게 되고 주인공이 본 것들을 바탕으로 미스터리에 대한 단서를 확보하고 사건을 해결해나가기 때문이다. 히치콕의 영화와 유사하게 <버닝>에서 관객은 철저하게 종수의 시점에서 모든 것들을 보게 된다. 종수의 시점을 따라가면서 세계를 파악하게 되고 해미와 벤이 어떤 특성을 갖고 있는 인물들인지에 대해서도 유추하게 된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 영화가 종수의 시점으로 관객이 보게 되는 것들을 바탕으로 관객이 서사를 이해하고 이 영화가 어떤 내용을 전달하기를 원하는지에 대해 추측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한편 종수의 시점으로 보는 것들만 갖고 세계를 이해하고 판단하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가에 대한 질문도 동시에 던지고 있는 것 같다는 인상을 관객에게 전달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영화 보기에 대한 질문이 될 수 있다. 우리는 보통 영화 속에서 보이는 기호들을 해석해가면서 영화를 이해하는데 <버닝>을 보면서 관객은 관습적인 방식으로 영화를 독해해나가고 있는 스스로를 보게 되는 순간이 있기 때문이다. 관습적인 독해를 바탕으로 스토리를 파악하고 있는 자신을 보게 되는 순간 과연 그렇게 독해하는 것만이 영화를 이해하는 방식이 맞는지에 대해 스스로 질문을 던지게 된다. 관객이 이런 질문을 던지게 되는 것은 <버닝>의 전개 방식이 논리적으로 설명이 되지 않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가령 해미는 갑자기 왜 사라졌는지에 대해 영화는 끝까지 그녀의 사라짐의 이유에 대해 알려주지 않는다. 그리고 영화 속에는 진술이 엇갈리거나 진실 여부를 확인하기 힘든 것들이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는 종수의 집 근처에 있었다는 우물의 존재 여부이다. 해미는 그녀가 그 우물에 빠진 적이 있으며 그런 상황에 있는 그녀를 종수가 구해줬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후에 종수가 해미의 어머니와 언니를 만났을 때 그들은 그 우물의 존재를 부정한다. 마을의 이장도 마찬가지로 부정한다. 그런데 종수의 어머니는 그 우물의 존재를 인정한다. 해미가 기르고 있다는 고양이인 보일은 영화 속에 등장하지 않는다. 종수가 벤의 집을 방문했을 때 종수가 발견한 고양이가 보일일 가능성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도 가능성일 뿐이지 확실한 것은 아니다. 

 

관습적인 영화 보기의 방식을 경계하고 있는 듯한 <버닝>의 태도는 이 영화가 스토리텔링 또는 영화에 관한 질문을 담은 메타적인 측면이 있는 작품이라는 것과 연결시켜서 생각해볼 수 있다. 이 영화에서 종수는 소설가 지망생으로 나온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그에게 어떤 소설을 쓰기를 원하는지에 대해 질문했을 때 어떤 소설을 써야 할지에 대해 결정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라고 말한다. 그런 그는 영화의 말미에 마침내 컴퓨터 자판기를 치면서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그가 소설을 쓰는 모습을 보여준 이후에 이창동은 종수가 벤을 황량한 들판에서 살해한 뒤 트럭을 몰고 가는 것으로 영화를 끝낸다. 종수가 소설을 쓰는 모습을 보여준 뒤에 그의 살인 장면이 등장하기 때문에 그의 살인이 실제로 일어난 것인지 아니면 소설 속 허구인 것인지에 대해 관객은 명확한 판단을 내리기가 힘들다. 종수가 소설가 지망생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이 영화의 전체를 다시 떠올려보면 어쩌면 이 영화 전체가 종수의 소설 속 장면들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종수가 벤을 살해하는 것은 그의 분노의 표현이다. 그것은 뼈빠지게 알바를 해서 연명하고 있는 그에 비해 벤이 노는 것에 가까운 일을 하면서 채광이 잘 되는 고급 저택에서 여유롭게 삶을 영위해가는 모습을 보고 느끼는 상대적 박탈감 때문일 수도 있다. 그리고 벤이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구석이 있는 인물이라는 점도 종수가 그에 대해 알 수 없는 분노를 품게 된 이유일 수도 있다, 해미가 사라진 이후에 벤의 집의 화장실에서 해미가 손목에 차고 있던 시계를 발견하고 해미가 기르고 있었던 고양이를 벤이 기르고 있다는 사실들에 착안해서 그를 연쇄 살인범으로 판단을 내린 상황에서 해미에 대한 복수를 하고자 벤을 살해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런데 종수가 벤에 대한 판단을 내리는 과정은 지극히 주관적인 것이 될 수 있다. 종수가 벤을 오판했을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종수는 벤의 집을 방문했다가 발견한 고양이가 해미가 기르고 있던 고양이라고 확신하지만 종수가 고양이의 이름을 불렀을 때 그 고양이가 종수에게 다가왔다고 해서 반드시 그 고양이가 해미가 기르고 있던 고양이와 일치한다고 볼 수 없다. 마찬가지로 종수가 벤의 화장실에서 해미가 손목에 차고 있던 시계를 발견했다고 해서 반드시 벤이 해미를 죽였다고 판단할 근거는 없다. 종수는 어떤 맥락에서 그의 눈 앞에 보이는 현상들을 해석했기 때문에 벤을 살해하는 결론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이것을 메타 서사의 관점에서 말해본다면 종수는 벤을 살해함으로써 그가 욕망하는 서사를 실천한 것이다. 즉, 종수는 그의 욕망을 실현하는 도구로서 소설을 창작한 것이다. 이 영화를 보는 관객에게도 이 영화를 자유롭게 해석할 권리가 있다. 관객이 이 영화를 자유롭게 해석하는 것은 그가 지향하는 서사에 관한 욕망을 실현하는 과정이 될 것이다. 이렇게 <버닝>은 관객이 영화를 보는 행위가 각자가 갖고 있는 서사에 관한 욕망을 실현하는 과정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관객에게 일깨워준다.

 

<버닝>의 마지막 장면에서 종수는 벤을 살해하고 피가 묻은 그의 옷을 모두 벗어서 벤이 타고 온 자동차와 함께 태워버린다. 벤이 종수에게 말했던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취미를 어떻게 보면 영화의 마지막 순간에 종수가 실천한 것이다. 벤이 실제로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모습은 영화 속에 나오지 않기 때문에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무언가를 태우는 행위가 영화 속에서 최초로 등장하는 것이 마지막 장면인데 벤이 불에 타 사라져 버림으로써 그때까지 영화 속에서 이어져오던 서사는 일단락된다. 그러니까 벤이 비닐하우스를 태운다고 말한 메타포는 영화의 엔딩에서 영화를 중단시켜버리는 수단으로 발전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완전히 나체가 되어서 트럭을 타고 ‘버닝’의 현장을 떠나고 있는 종수의 모습에서 우리는 새로운 서사가 출현할 가능성을 품게 된다. 종수가 입고 있던 옷이 그때까지 진행되어 왔던 영화의 서사와 관련되어 있었다면 종수가 새롭게 입게 될 옷은 그를 또 다른 서사의 세계로 인도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언가를 태워 없애버리는 ‘버닝’은 새로운 것의 창조가 되어 버리는 역설이 성립된다. 비로소 우리의 눈 앞에 새로운 서사가 펼쳐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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