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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꾸물대다가 한 두시 사십분쯤 집회 장소에 도착했습니다. 지나가는 길에는 여자경찰분들이 현장을 통제하고 있더군요. 한창 발언이 이어지고 있었고, 마지막으로는 어떤 교회의 목사님이 나와서 연설을 했습니다. 이번 가자지구 학살사건에 대해 이스라엘을 옹호하는 개신교 쪽의 분위기를 알고 있어서 좀 의외였습니다. 모든 목사라고 해서 그런 기류에 휩쓸리는 것도 아닐 것이고 또 그 속에서도 무고한 가자 주민들이 계속 학살을 당하는 것에 누군가는 반응할 수 밖에 없을 것 같아요.


프리 프리 팔레스타인을 외치며 행진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조금 겸연쩍더라고요. 다들 알음알음 녹색당이나 어떤 단체에서 오신 거 같은데 저만 혼자 온 느낌...?? 바로 앞쪽에서 녹색당의 오스틴 배쇼어 분도 봐서 좀 신기하기도 했구요. 그렇게 계속 구호를 외치면서 행진을 하다가 서이초 순직인정 집회를 봤습니다. 행진을 주도하시는 분께서 그 분들의 집회에 누가 되지 않게 딱 음소거를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그 구간을 지나칠 때는 아무 말도 없이 깃발만 펄럭이면서 갔습니다. 퀴어퍼레이드 같은 집회를 하면 오로지 깽판의 목적으로만 소리를 높이는 반대 시위를 맞닥트리면서 질 수 없다는 기분으로 계속 구호를 외치는 행진만 했었는데요. 이렇게 다른 집회를 존중하면서 조용히 지나가는 경험을 하니 좀 이색적이더군요. 동시에 다른 이의 슬픔을 존중하는 그 마음이 느껴져서 약간 감상주의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아이랑 같이 나온 어머니도 있었습니다. 가족 단위로 이렇게 시위에 참여하는 모습에서 여러 질문을 던지게 되더군요. 가족주의라는 말 자체가 더 큰 단위의 이기주의처럼 들리게 된 이 시점에서, 나의 가족을 생각하는 그 마음에서부터 연대가 시작될 수 있지 않은지 그 가능성을 생각해보기도 하고요. 또 아이를 떼어놓고 시위를 갈 수 없는 육아의 고충, 여성의 사회생활에 뒤따르는 애로사항도 생각해보게 되구요. 어쨌거나 집회 혹은 시위의 주체를 무의식적으로 남성 개인의 단위로 먼저 생각하게 되는 것도 좋지 않을 것 같단 생각을 했습니다. 그렇게 한시간쯤 걸려 한바퀴 딱 돌고 이스라엘 대사관 앞까지 온 다음에 저는 이탈했습니다.


그리고 기온은 낮은데 2월 중순 치고는 너무 뜨거워진 햇빛 때문에 정말 긴장하게 되더라구요. 기후위기의 속도가 너무 빠릅니다. 이제 개발이나 소모적 생산활동을 통한 이윤추구보다는 더 이상 인간이 살 수 없어지는 이 행성의 변화에 진짜 큰 관심을 기울이고 변화에 대한 각오를 좀 해야되는 게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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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청역 앞에서 하는 촛불집회에 가기 전에 잠깐 앉아서 혼자 노닥거렸습니다. 그런데 주변에서 어떤 20대 남자로 보이는 분이 '이재명 구속', '문재인 구속'의 깃발을 가방에 꽂고 따릉이를 타고서 배회하더군요. 그 광경 자체로도 좀 끔찍했는데 촛불집회 가려는 시민들한테 소리를 지르면서 일부러 도발하는 게 좀 괴상해보였습니다. 뭐랄까, 자신만의 대안세계에 완전히 갇혀있는 그런 반사회적인 느낌이 났는데... 정말 싫었습니다. 과연 정치적 선택을 가치관의 다름이라고만 할 수 있는지, 이게 정말 다름의 문제인지 처참한 기분으로 이런 저런 상념에 빠졌습니다.


이번에 시위를 하면서 엉뚱하게도 미학적인 효과에 대해 생각해보고 있었습니다. 집회에 합류하기 전에 길을 건너는데 거기서 또 어떤 분들이 "촛불 꺼져"란 피켓을 들고 있더라고요. 나는 너희를 싫어한다는 것 말고 도대체 어떤 정치적 의미를 담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어처구니없는 문구였습니다. 그 피켓을 든 쪽에서 엄청 소리가 큰 마이크로 이상한 구호를 외치고 있었는데, 가까이에서 들어보니까 대충 "탕 탕 탕 탕 이재명 방 탄! 탕 탕 탕 탕 문재인 탕 탕!" 이런 문구였습니다. 진짜 술주정 같은 무의미한 소리들이었는데 계속 듣다보면 정신착란 올 것 같더라고요. 그 지역을 벗어날 때까지만 이어폰을 끼고 있었습니다. 양산에서는 이것보다 훨씬 더 지독하고 저질스러운 고성방가 공격이 이어졌겠죠. 문재인씨와 시민들에게 정말 고생했다는 이야기를 전하고 싶어졌습니다.


제가 합류한 행렬에서는 대전? 대구? 의 촛불집회단이 있더군요. 거기서 주도적으로 구호를 외치시는 분들이 여성분들이었는데, 약간 세대가 다르게 보이는 두 분이 함께 계속 윤석열을~ 김건희를~ 외치시는 게 좀 인상깊었습니다. 저도 예전에 박근혜 퇴진시위 때 그런 식으로 구호를 외쳐봐서 그 어색하면서도 용기를 내는 그 마음을 알 것 같더라고요. 두 분이 계속 히히거리면서 서로 구호가 꼬이기도 하고 그럴 때마다 또 웃고, 명랑한 목소리로 계속 시위를 주도하는데 저도 괜히 즐겁더라고요. 이런 식의 구호를 외치다보면 전체적으로 분위기가 비장미를 띄곤 하는데 그것보다 조금 더 일상적인 분위기에서 행진을 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정치적 투쟁을 하는 건데, 일상행활이 있는 시민들이니까요. 좀 켄 로치 영화스럽다고 혼자 괜히 작은 감동도 느끼고요.


이렇게 현장에서 보니 여자는 정치에 관심이 없다는 말이 얼마나 큰 편견인지 체감하게 되더군요. 저는 엄마랑 맨날 윤석열 욕밖에 안합니다. 대화의 한 6,70퍼센트는 윤석열 욕인 것 같아요. 회사 제 옆자리분하고도 가장 많이 이야기하는게 윤석열 욕이에요ㅋㅋ 촛불집회의 성비를 보면 여성의 비율이 최소 4.5 : 5.5정도는 될 겁니다. 남편이랑은 정치 이야기를 할 수가 없다는 기혼여성분들의 증언도 좀 많이 들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민주당이나 진보정당들이 여성유권자로서의 정체성을 조금 더 건드려야하지 않을까, 하는 그런 생각도 하면서 행진을 했습니다.


다만 촛불집회를 하면서 모든 순간이 좋기만 했던 건 아닙니다. 집회 분들이 간혹 부부젤라를 사서 불고 다니는데, 어떤 중년 남성분이 술에 취했는지 어쨌는지 명동 영플라자 쪽에서 버스정류장 앞에 있는 어린 여성분 귀에 대고 부부젤라를 빽 불어대더라고요. 그 여성분은 무척 당황하셨습니다. 왜 저래...?? 하고 있는데 그 뒤의 다른 남성분이 바로 저지하시더군요. 지금 뭐하시는 거냐고, 이러시면 안된다고요. 그 부부젤라를 불었던 분은 뭐라뭐라하다가 계속 혼나니까 대열에서 이탈했습니다. 그 여성분의 불쾌감이 길게 가지 않길 바랄 뿐입니다. 그래도 바로 자정이 되서 예전보다는 마음이 덜 무거웠습니다. 이제 이런 일이 아예 없도록 해야할텐데요.


종로쪽에서 팔레스타인 시위도 그렇고, 명동에서도 많은 분들이 폰카로 행진을 찍으시더군요. 이게 신기해보이는 만큼 다들 적극적으로 공유하고 또 문제의식을 나눴으면 좋겠습니다. 누군 알앤디 예산 돌려내라고 졸업식에서 소리만 쳐도 끌려나가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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