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 경아의 딸 보고 왔습니다

2022.06.23 21:21

Sonny 조회 수:359

06dde15199fab89aebabb80fb06039609896d248


제목부터 곱씹게 됩니다. 이 영화의 가장 주된 사건인 '사생활 영상 유출'은 영화의 주인공인 연수가 겪은 일입니다. 그런데 영화는 이 사건의 경험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대신 주인공의 어머니인 '경아'를 제목에 부각시킵니다. 그러면서 이 이야기는 단순히 성폭력에 대처하는 한 여성의 일이 아니라, 성폭력 피해자를 주변에 둔 사람이 외부인으로서 그 파장을 겪는 이야기라는 걸 보여줍니다. 이 영화에서 경아는 단순한 관찰자가 아니라 2차 가해 및 피해자를 이해하고 조력하는 당사자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많은 폭력이 그러하듯이, 또 성폭력이 주변인들에게 나름의 파장을 전달하는 사건이라는 걸 보여줍니다. 


[경아의 딸]이라는 제목에서 중의적인 의미를 읽어내게 됩니다. 성폭력 사건의 피해자를 이해할 때 가장 쉽게 호출하는 것이 '00의 딸'이라는 호칭입니다. 네 딸이라고 생각해봐라, 남의 귀한 딸을 쯧쯧... 유난히 보호받아야하고 여린 존재로 인식할 때 우리는 성폭력 피해자에게 가족을 대입하고, 가족 중에서 딸을 대입합니다. 그렇지만 그런 쉬운 호칭은 어떤 실질적 해결도 이뤄주지 않습니다. 성폭력 피해자를 정확하게 이해한다는 건 그런 가부장적인 보호와 통제의 틀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개인으로서 그를 바라본다는 것일테니까요. 영화는 경아가 딸을 이해하는데 실패하는 부분부터 이야기를 끌고 나갑니다. [경아의 딸]이란 제목은 어머니가 딸을 동등한 개인으로 바라보는데 실패했다는 함의를 품고 있는 제목일지도 모릅니다. 


영화는 경아와 연수의 영상 통화로부터 시작합니다. 이 영화의 소재를 대략적으로라도 알고 보러 간 사람은 첫장면부터 흠칫하게 됩니다. 가장 사적인 통신 방법인 영상통화가 그 사람의 집이라는 가장 사적인 공간을 보여주고 있으니까요. 영화는 시각적으로 사생활 유출이라는 범죄가 어떤 함의를 가지는지 이 장면을 통해 이야기합니다. 그런 범죄를 저지르는 남자들은, 피해자의 어머니조차도 잘 알지 못하는 한 개인의 가장 내밀하고 깊은 구석을 다 퍼트리면서 그의 일상을 다 부숴놓는다는 것을요. 이 영상통화에서 경아는 연수에게 남친 유무를 캐물으며 방의 구석구석을 자기에게 보여줄 것을 요구합니다. 그의 모습이 비록 답답해보이기는 해도 이 장면이 있기에 이 영화에서의 디지털 성범죄는 한 여자의 사생활을 파괴하는 데서 그치는 게 아니라, 그 개인과 연관된 모든 사람들의 일상도 같이 파괴한다는 의미를 강조합니다. 연수의 방은 어머니 경아와 함께 영상통화로 둘러보던, 디지털로 공유하던 그런 공간이었으니까요.


이 영화는 성폭력에 관한 이야기지만 가해자를 크게 신경쓰진 않습니다. 짤막한 소개를 한 다음 영상유출 사건이 터지고 연수는 전남친인 그를 곧바로 신고합니다. 그리고 영화는 그를 거의 비추지 않습니다. 성폭력 가해자와의 싸움이 어찌 지난하지 않을 수 있겠냐만은, 영화가 주목하는 것은 성폭력 피해자로서 일상을 회복하는 일입니다. 영화는 가해자를 미워하라고 하는 대신 피해자가 얼마나 많은 것을 잃고 그것들을 회복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지 홀로 남은 연수를 보여줍니다. 연수는 정말로 혼자가 되버립니다. 왜냐하면 성폭력 피해자는 자신이 겪은 일을 남들에게 공유하며 지지를 받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당사자로서의 수치심과, 피해자에게도 책임이 있었다는 2차가해가 따라붙을 것을 염려해 피해자는 스스로 고립됩니다. 


안타깝게도 경아는 연수를 고립시킨데 가장 큰 책임이 있는 사람입니다. 평소에도 늘 딸의 행동거지를 단속하던 그는 자신에게 메시지로 온 사생활 영상을 보고 연수를 '걸레'라는 단어까지 써가며 비난합니다. 어쩌면 연수의 마지막 버팀목이었을 그는 최초이자 가장 가혹한 2차가해자가 되고 맙니다. 이 부분에서 영화의 제목은 경아를 향하게 됩니다. 경아씨, 당신 딸이잖아요. 경아는 뒤늦게 연수에게 연락을 해보려하지만 연수는 폰 번호도 바꾸고 집주소도 알리지 않은 채 잠적해버리고 맙니다. 경아는 딸을 잃습니다.


---


이런 영화들은 아주 쉽게 피해자를 지옥에 빠트리는 우를 범하곤 합니다. 보는 사람이 꼭 그 악독함을 체험해야한다는 듯이, 피해자가 모욕을 당하는 상황을 전시하면서 현실의 피해자와 다른 사람들에게 불필요한 상처를 남기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영화는 굳이 연수를 공공장소에서 모욕당하게 하면서까지 그 고통을 재현하진 않습니다. 이 부분에서 [경아의 딸]은 안전장치를 걸어놓습니다. 연수는 교사이고 10대 남자들은 현재 성폭력 2차 가해에서 제일 잔인하게 돌변하는 집단이지만 우려하는 일들은 묘사되지 않습니다. 그렇게 넷플릭스식 무식한 방법을 동원하지 않아도 관객들이 연수의 처참함을 공감하고 있으리란 전제 하에 그에게 2차 가해를 하는 집단을 쉽사리 보여주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영화는 단계적 회복을 보여줍니다. 연수가 학교를 그만두고 재택근무로 시작한 원거리 수험 강사는 밥벌이용 일이기도 하지만 연수가 차근차근 밟아나가는 소통의 중간단계이기도 합니다. 연수는 바로 교단으로 돌아가 학생들과 마주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영화는 그래도 난이도가 낮은 대면을 연수에게 훈련시켜주는 것처럼 여학생과의 영상 채팅을 보여줍니다. 힘들겠지만 그래도 자기 얼굴을 공개할 수 있는 상황과, 그래도 믿을 수 있는 여학생을 연수의 대화 상대로 두고 연수가 바깥 세상과의 소통을 해나가게끔 합니다. 영화는 항상 이런 식의 중간단계를 끼워넣고 있습니다. 자신에게 모진 말을 한 엄마를 연수는 만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연수가 가장 믿고 있는 동료 선생님을 통해서 연수와 엄마의 부분적인 소통이 이뤄집니다. 디지털 화면을 바로 볼 수 없으니까 딱 한명(여성)만 볼 수 있는 화면으로 연수가 자신을 드러내게끔 합니다. 영화는 절대 서두르지 않습니다. 


이런 부분에서 영화는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경아를 철없고 꼰대같은 엄마라고 욕하는 건 쉬운 일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 주변의 사람이 성폭력 피해자가 되었을 때, 그의 고립을 존중하면서도 세상에 다시 나올 준비를 하게끔 도와주는 중간자적인 존재가 될 수 있을까요. 2차 가해를 하는 무심한 다수의 사람들이 있는 한, 피해자를 아무리 이해하려고 애를 써도 그 사람의 일상을 회복하도록 돕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


영화가 중간자로 끼워넣은 학생(박혜진)을 떠올려본다면, 이 영화는 총 3세대의 여자들이 서로 소통하는 이야기입니다. 5060 세대인 경아, 2030 세대인 연수, 그리고 10대인 박혜진의 학생까지 이들은 모두 여자로서 당한 폭력이 있습니다. 경아는 남편에게 가정폭력을 심하게 당했었고 연수는 전남친에게 사생활 유출을 당했습니다. 박혜진은 영화 상에서 아직 성폭력을 당하진 않았지만 첫경험 요구를 강압적으로 당한 것 때문에 혼란스러워합니다. 여성을 향한 폭력은 세대를 초월해 이어져오고 있다는 영화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연수는 아직 자신의 상처가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지만 박혜진을 만나 그의 고민을 듣습니다. 이 장면은 연수가 남의 고민을 듣고 싶어할지 조금 의심스럽기도 합니다. 그러나 피해자가 가장 강력한 연대자가 될 수 있다는 걸 떠올려본다면 그렇게 이상한 장면도 아닙니다. 같은 여자로서, 자신보다 어린 사람이 자길 더 잘 지키길 바라는 마음을 투영한 것일수도 있겠죠. 그걸 떠나서라도 그저 선생님으로서 학생의 고민을 들어주며 자신의 원래 자리로 돌아가는 연습을 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자신이 겪은 고통을 다른 사람은 당하지 않았으면 하는 그 마음을 연수는 실천하고 있는 것이 아닐지.


그런 연수를 보여주면서 영화는 마지막 숙제를 남겨둡니다. 연수를 이해해주지 못한 경아가, 연수가 한 것처럼 연수를 이해해주길 바라는 마음을 갖게 합니다. 


---


영화의 엔딩까지, 경아는 연수를 입원했을 때만 만납니다. 어찌보면 그 만남은 화해가 아니라 죽을지도 모르는 엄마를 향한 딸로서의 최소한의 도리라고 봐야할 것입니다. 둘의 관계는 그 때까지도 회복되지 않았고 경아는 계속해서 미안해할 뿐입니다. 그 두 사람의 감정의 골을 굳이 채워넣지 않고 놔둔 것이 저는 아주 현실적이라 보았습니다. 성폭력 피해자를 향한 2차 가해는 어머니라는 위치로도 쉽사리 관용되지 못할 영화의 단호한 선언이라고 봐야할 것입니다. 실제로 성폭력 피해자들은 가족들로부터 이해받지도 못하고 오히려 2차 가해를 당하는 경우들이 빈번하니까요. 


경아는 자신의 집을 팔고 이사를 갑니다. 그것은 딸과의 결별이 아니라 이제까지의 자신을 버리고 거듭나겠다는, 경아의 결심일 것입니다. 폭력적인 남편과의 기억이 얽힌 집을 떠나면서 경아는 용서의 의무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었겠죠. 그래서 이삿짐을 싣고 떠나는 그 차는 딸을 향해 먼길을 떠나는 모습처럼도 보입니다. 언젠가 연수가 엄마를 부를 때, 경아는 새로운 집에서 그를 맞으러 갈 것입니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DJUNA 2023.04.01 25384
공지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엔시블 2019.12.31 43941
공지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DJUNA 2013.01.31 352527
120492 듀게 오픈카톡방 멤버 모집 물휴지 2022.07.20 168
120491 [넷플릭스바낭] 순리대로 이어 달렸던 스콜세지 버전 '케이프 피어' 잡담입니다 [24] 로이배티 2022.07.19 601
120490 고양이를 플레이하는 게임 stray [3] 예상수 2022.07.19 381
120489 세상을 구하려는게 아니고 널 구하려는거다 [3] 가끔영화 2022.07.19 465
120488 의외의 작품들을 올려놓는 쿠팡플레이 - 캐슬록, 조금 따끔할 겁니다 [10] 폴라포 2022.07.19 857
120487 [토르: 러브 앤 썬더]를 보고 왔습니다 [9] Sonny 2022.07.19 647
120486 요즘 코로나19 상황 [9] soboo 2022.07.19 967
120485 침착맨 삼국지 컨텐츠 [5] catgotmy 2022.07.19 604
120484 유희열, 정말 이별이네요. 가요계 표절은 과몰입하면 안되나요? [20] 산호초2010 2022.07.19 1537
120483 무더운 여름 날, 점심시간의 생각들입니다. [9] 가봄 2022.07.19 455
120482 뒤늦게 넷플릭스에서 지브리 영화를 감상중이에요 [9] dlraud 2022.07.19 518
120481 유튜브 뮤직을 찬양합니다 [6] 칼리토 2022.07.19 511
120480 헤어질 결심 뒤늦은 잡담 [5] dlraud 2022.07.19 719
120479 프레임드 #130 [12] Lunagazer 2022.07.19 171
120478 [왓챠바낭] '케이프 피어'를 봤어요. 원조 흑백판! [24] 로이배티 2022.07.19 441
120477 새 (1963) [2] catgotmy 2022.07.18 272
120476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는게 안되는 이유가 뭘까요?(아빠와의 대화) [7] 산호초2010 2022.07.18 839
120475 축구 ㅡ 로마의 길고 얼어붙은 여름이 끝난 듯 [2] daviddain 2022.07.18 209
120474 CGV 명동 씨네라이브러리가 문을 닫는다네요 [1] 예상수 2022.07.18 432
120473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를 읽다가 catgotmy 2022.07.18 313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