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까지 부산 영화의 전당에서 우디 앨런 근작전을 했었어요. <안개와 그림자>, <브로드웨이를 쏴라>만 제외한 1990년대 이후 작품들을 다 틀었죠.

그 덕분에 요번에 우디 앨런 필모그래피 중에 <안개와 그림자>를 제외한 모든 작품을 봤습니다 아하하! (사실 정확하게 말하면 TV영화와, 옴니버스, 그리고 타이거 릴리는 못 봤네요.)


제가 처음 본 우디 앨런 영화는 <맨하탄>이었어요. 처음 본 우디 앨런 영화가 <맨하탄>이라니 행운이었다고 생각해요!

것도 중학교 땐가, SBS에서 하는 시네포트였나 영화 소개 프로그램이었는데요. 어쩌다 거기서 그 60년대 영화를 소개한 건지 정확히 기억은 안 나요.

아마 뭐 걸작의 부스러기라든가 그런 코너였겠죠. 거기서 짧은 클립으로 지나가는데 대사들이 너무 콕콕 박혀서 

무슨 영화인지 제목도 못 듣고서, 인터넷에서 그 대사들로 마구 검색해서 영화 제목을 겨우 찾아냈던 기억이 납니다.

그 땐 영화 좋아하기 시작한지 얼마 안 됐을 때라 우디 앨런 얼굴을 봐도 그 사람이 우디 앨런인지 전혀 알지 못했거든요.


몇 년 전에 부산 수영만 시네마테크 시절에 우디 앨런 초기작전을 해서 (<브로드웨이를 쏴라>는 이 때 포함됐었어요.) 초기작은 그 때 쭉 보았는데 

맨하탄과 애니홀, 젤리그, 해리 파괴하기를 저의 '우디 앨런 베스트'로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맨하탄>이 단연 1위였구요 ㅎㅎ 

맨하탄은 나중에 DVD로 사서 열 몇 번 본 뒤부터는 몇 번 봤는지 세는 걸 그만두었을 정도로 울적할 때마다 자주 꺼내봤어요.


근데 제가 컴퓨터로 영화보는 걸 정말 싫어해서, 극장에서 안 틀어주면 (좋아하는 감독 영화일 수록) 절대 안 보는 철칙 때문에 

근작은 지금껏 못 보다가 올해 1월에 다 몰아서 봤는데요.


정말 너무너무 귀여운 할아버지라는 생각 밖에는 안 들었구요.

부산에서 상영했던 것처럼 우디 앨런 필모를 초중기작,근작로 나눠서 보면 

개별적으로 보면 좋아하는 영화들은 분명 초중기작 중에 많은데 

전반적인 분위기는 저는 근작이 더 좋더라구요.


좀 더 여유로워진 느낌이라고 해야하나. 초중기작에서 우디 앨런의 코미디나 캐릭터는 우디 앨런 그 본인의 캐릭터로 응집된 느낌이었는데 

근작들을 보면서는 캐릭터 묘사들이 훨씬 풍부해졌다고 생각했습니다. 일단 연기하는 배우로서의 우디 앨런도 백발이 성성한 할아버지 모습이 어쩐지 더 귀여워요.

<스쿠프>에서의 연기는 정말 다시봐도 걸작ㅋ


아무튼 우디 앨런 최고! 라는 팬심때문인진 몰라도 ㅋㅋㅋ 근작전에서 본 영화들은 다 너무 좋았어요.

듣자하니 90년대 중반쯤에 우디 앨런에 대한 평가는 '늘 똑같은 영화만 재생산한다' '이제 우디 앨런도 한 물 갔다' 였던 때도 있었던 듯한데 

제 눈에는 다 너무 귀엽지 말입니다. 심지어 이번 상영전에서 같이 본 사람들조차 대부분 혹평하는 <스몰타임 크룩스>나 <제이드 스콜피온의 저주>도 저는 너무 귀여워서 까무러쳤어요.

험브리 보가트 따라한답시고 중절모에 롱코트 입은 우디 앨런이 어찌나 귀여운지! 그리고 그 최면! 마술! 

<스몰타임 크룩스>도 깔깔 웃으며 봤던 거 같고요.

도리어 제가 제일 (싫어한다고 하긴 뭣하지만) 별로 였던 건 <스윗 앤 로다운>이었어요. 별로 우디 앨런 영화 같은 느낌이 안 나서 그랬나 모르겠네요. 하여튼 ☆루...


이거 우디 앨런이 만든 거 맞아? 싶었지만 좋았던 건 역시 <매치포인트>와 <카산드라 드림>이었고요.

두 정극은 웃음기를 쪽 뺐는데도 너무 잘 만든 작품인 거 같아요. 근데 둘 다 썩 다시보고싶은 영화는 아니었어요, 우디 앨런의 유쾌함을 좋아하는 저로서는요.

그치만 다시 봐도 의미가 있을 거 같긴 하더라구요. 수요시네클럽에서 정지우 감독이 <매치포인트>에 대해 숏바이숏 하듯이 카메라 움직임과 앞뒤숏을 예로 들어가며 우디 앨런의 연출력에 대해 감탄을 하는데 

듣고 있노라니 저도 카메라 움직임이나 숏과 숏들을 생각하며 다시 봐야겠단 생각이 들었어요.


이번 특별전에서 (다시 본 영화 말고 처음 본 영화 중) 제일 좋았던 건 <맨하탄 미스테리>, <매치 포인트>, <헐리우드 엔딩>입니다. 

<맨하탄 미스테리>는 정말 육성으로 빵빵 터지며 봤어요. 특히 우디 앨런의 몸개그라던가, 다이앤 키튼과의 짝꿍연기는 가히 환상.

다이앤 키튼과 좀 더 개그콤비처럼 여러 영화에 나왔더라면 좋았을 것을, 하는 무지막지한 아쉬움이..

<매치 포인트>는 정작 우디 앨런 팬을 자처하는 저는 안 봤지만 제 주변의 사람들은 (영화덕후가 아닌 사람들조차) 다 봤더군요.

다들 하나같이 '그 영화 주인공 XXX' 라며 쌍시옷 들어간 욕부터 하길래, 대체 무슨 영화길래 그러나. 우디 앨런 표 로맨틱코미디에서 좀 짜증나는 캐릭터여봤자 내 눈엔 귀엽겠지 ^*^ 하며 들어갔는데

로맨틱코미디가 아니더군요 와하하하 근데 진짜 잘 만들었어요...

<헐리우드 엔딩>은 이걸 왜 이제 봤나 싶을 정도, 보자마자 '나 이건 두 번 봐야겠다!'하고 결심했는데, 사실 두 번째 볼 땐 처음 볼 때만큼 웃기진 않더군요.


그리고 그 영화 자체를 좋아한다긴 뭣하지만 <에브리원 세즈 아이 러브 유>도 너무 좋았어요.

우디 앨런이 뮤지컬이라니?! 시니컬한 뉴요커가 발랄한 뮤지컬을!!? 

하면서 보러 들어갔는데 너무 우디 앨런다워서 낄낄낄.


이 영화 보면서 새삼 윤성호 감독의 <은하해방전선>이 생각났어요.

말 많은데 웃기고 안 밉게 귀여운, 감독 쏙 빼닮은 캐릭터는 뭐 다들 느꼈을 테고, 대놓고 오마쥬(?)한 <헐리우드 엔딩> 말고도

이 영화에서 아들 캐릭터요. 보면서 <은하해방전선>에서 그 유명한 (심지어 제 친구는 영화는 안 봤는데 인터넷 짤방 때문에 이 영화를 알더군요.)

정신병원 가서 검진 받다가 가족 중에 정신적으로 문제 있는 사람 없냐니까 '제 사촌 중에 조선일보 기자가 있는데요.' 하는 장면요.

이 영화의 아들 캐릭터는 그 설정을 한 씬으로 소비하지 않고 영화 전체에 잘 깔아서 이용한 것 같더군요.


아닌 게 아니라 저도 혼자서 '엄청 급진적인 좌파 부모 밑에서, 딱히 정치적인 의식 때문이라기보다 부모에게 반항하고자 하는 세상 모든 자식들 특유의 반항심으로 박근혜지지자가 된 열혈아들' 같은 설정을 생각했었는데 

<에브리원 세즈 아이러브유> 이 영화에서는 이미 그런 설정을 더 잘 활용한 거 같아요 ㅋㅋㅋ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장면.


극장에서 이 장면하고 마주쳤을 때 눈물이 핑 돌더라구요, 너무 좋아요 T_T

순전히 이 장면 때문에 두 번 봤습니다. 


제가 이 영화를 우디 앨런 베스트로 꼽을 일은 없겠지만, 이 장면만큼은 우디 앨런 필모그래피 전체를 통틀어 가장 아름다운 장면이 아닌가해요.




여러분의 우디 앨런 베스트&워스트는 무엇인지 궁금합니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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