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 [애프터 양] 보고 왔습니다

2022.06.10 18:49

Sonny 조회 수: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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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프터 양]을 두번 봤습니다. 지금 최종적으로 갈무리된 제 감상은, 이 영화는 생각만큼 따스하거나 아름답지만은 않다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는 영화를 처음 보도난 뒤 제 기분을 아랑곳하지 않고 훨씬 더 비판적으로 평을 한 정성일 평론가의 영향과, 재감상으로 인해 최초의 감동이 조금 휘발되었다는 영향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처음에 볼 때 안보였던 장면들이 더 세세하게 들어와서 감상의 측면에서는 보다 온전해졌으니 첫번째 느낌보다 두번째 느낌이 더 정확하다 생각합니다.


이 영화의 서사는 그 자체로 함정을 갖고 있습니다. 이야기는 양이 작동을 멈추면서부터 시작됩니다. 양이 제이크, 카이라, 미카로 이뤄진 이 가족 안에서 어떻게 지냈는지는 경험의 파편들(사진 찍는 장면, 식사 장면, 기괴한 합동 댄스)만이 제시됩니다. 이 5분 가량의 프롤로그 이후 양의 정지 상태에서 제이크를 통해 우리는 양의 기억들을 흝어봅니다. 양의 메모리들은 그 프롤로그보다도 더 파편적이고 쪼개져있습니다. 그 파편들만 가지고 우리는 양이 가족들과 어떻게 지냈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끽해야 몇초 정도의 움짤 비슷한 형태의 기억들에서 우리가 양과 가족의 관계를 추리해내는 건 불가능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양이 가족들과 보낸 시간을 소중히했다는 착각에 빠집니다. 제이크가 양의 메모리를 들여다보며 눈물을 흘렸기 때문에. 그리고 엔딩 장면에서 미카와 제이크가 양을 그리워하는 듯이 말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 가족이 양을 들여다보는 시선으로 양의 기억의 편린을 확인하고 그를 그리워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양이 이 가족을 어떻게 느꼈는지는 정확히 알 수가 없습니다.


이것을 뒷받침하는 씬들이 몇개 있습니다. 일단 제이크가 양의 메모리를 확인하면서 가장 먼저 발견하는 파편이 에이다의 것이라는 점입니다. 우리는 그 이후의 서사 때문에 제이크가 양과 자신을 포함한 가족들의 관계를 기억으로 확인한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그러나 가장 먼저 확인하는 것은 에이다의 짧은 영상이고, 그 다음에도 에이다에 관련된 기억을 봅니다. 그 뒤에야, 제이크는 자신의 가족에 대한 양의 기억들을 확인합니다. 이것은 단지 우연일 수도 있겠지만 가설을 하나 세울 수도 있습니다. 제이크가 양의 메모리를 작동시키자마자 에이다의 기억을 확인한 것은, 양의 메모리 중 가장 선명하고 핵심적인 기억이라서 보는 사람이 발견하기 제일 쉬웠을지도 모릅니다. 즉, 양의 기억을 구성하는 제일 의미심장한 타인은 가족은 알지 못하는 가족 외부의 누군가입니다. 그래서 이 영화의 스토리는 가족이 죽은 가족에게서 가족의 기억을 찾는 것이 아니라, 가족인줄만 알았던 사람의 기억 속에서 가족이 아닌 자로서의 기억 (혹은 가족 내부의 기억에 침투한 외부인의 기억)을 찾아나가는 스토리입니다. 도식적으로 말한다면 양아들의 사진첩을 보면서 아버지로서 자신이 전혀 모르는 누군가의 친구이자 연인으로서의 양아들의 자아를 확인해나간다고도 할 수 있겠죠.


그 다음에는 양의 기억의 형태를 들 수 있습니다. 양의 메모리에서 발견되는 가족과의 시간은 조금 이상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사진이 아니라 기억인데, 그 메모리 속에서 양은 늘 가족들을 바라보고만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가족 내에서 관찰자의 위치에 머무릅니다. 가족들과 뭔가를 함께 하는 식의 기억을 양은 갖고 있지 않습니다. 이것은 두 가지 형태의 기억과 구분됩니다. 하나는 양의 메모리 안에 있는 에이다의 기억입니다. 거기서도 양의 메모리는 일종의 퍼슨 오브 뷰로 관찰자 시점을 갖고 있지만, 그 기억조각 속에서 에이다는 바라보는 양에게 말을 겁니다. 이것은 자신이/에게 말을 걸기에 너무 멀리 떨어져있는 가족들과의 기억과 구별됩니다. 또 하나는 제이크와 카이라가 재구성하는 기억의 형태입니다. 이들은 양과 대화를 나눈 기억을 떠올립니다. 그 기억 안에서, 이들은 전지적 시점으로 자신과 양이 모두 씬 안에 들어가있는 양식을 재현합니다. 양에게 말을 하는 자기자신을 기억 속에 포함시켜서 재현하는 가족들과, 늘 가족들을 바라만 보는 양의 기억은 확실한 차이가 있습니다. 이것은 자기 자신이 다른 이와의 거리를 체감하는 정도의 차이일지도 모릅니다. 제이크와 카이라는 '그 때 우리는 이렇게 대화를 했지'라고 우리로서 인식하지만, 양에게 제이크나 카이라는 늘 멀리 있는 타인들로만 느껴졌을지 모릅니다. 


제이크와 양이 차에 관한 대화를 나누는 씬에서의 대사도 이를 암시합니다. 양은 제이크가 차를 좋아하게 된 계기를 묻습니다. 제이크는 자신이 봤던 차에 관한 다큐멘터리 영화를 이야기하며, 차에 그 세계 자체가 녹아있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양은 그걸 실제로 믿냐고 묻고 제이크는 같이 차를 마시면서 체험해보자고 합니다. 둘은 같이 차를 마시고 제이크는 차 안에 그 세계까지 녹아있는지는 아직 모르겠다고 합니다. 이 대화는 가족 간의 유대감이 녹아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양이 제이크의 인간적인 부분을 묻고 제이크가 대답하는 일방적 대화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양은 그런 말을 슬쩍 합니다. "저에게도 차에 관한 정보 이외의 것들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왜냐하면 양은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작중에서는 테크노 사피언스라고 불립니다) 어린 시절부터 쌓여온 경험적 기억이 없고, 그 경험을 현재진행형으로 할 수도 없습니다. 양은 제이크에게 그의 개인적이고 인간적인 부분들을 묻고 들을 수 있지만, 제이크는 양에게 물어볼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양이 좋아하는 차라거나, 다른 좋아하는 음료수라거나,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고 좋았던 순간을 나눌 게 없으니까요. 그가 줄 수 있는 것은 회사에서 프로그래밍한 정보 뿐입니다. 


이것은 후에 제이크가 자신의 가족들과의 기억이 아닌, 다른 시간대에 축적된 양의 메모리들을 통해서도 확인됩니다. 베타 카테고리를 열었을 때 제이크는 양이 다른 가족들과 함께 보낸 기억의 조각들을 확인합니다. (그러니까 얼마 쓰지 않은 '새삥' 중고란 회사의 말은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애플의 리퍼폰이 생각나죠) 그 기억 속에서도, 제이크가 그 입양된 가족들과 대화를 나누는 장면은 거의 확인되지 않습니다. 뒷머리를 기른 양은 자신의 동생이 태어났을 때부터 성인이 되고 자신을 입양한 어머니가 죽을 때까지 시간을 같이 보내지만 남은 기억들 속에서 자신이 동생에게 동생아, 라고 말을 거는 장면들은 있어도 동생이 자신을 보면서 뭐라고 대답을 하거나 함께 하는 장면은 없습니다. 그리고 그 시간대의 기억 속에서도 양에게 말을 거는 타인의 기억은 오로지 에이다 뿐입니다. 양은 한 세대를 거쳐서 다른 가족으로 넘어가는 시간의 점프를 했지만 게속해서 바라만 볼 뿐 함께이지는 못하는 가족으로서의 기억들만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들을 종합해볼 때 우리는 [애프터 양]의 총체적인 슬픔과 아름다움을 더 정확히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양의 기억들이 슬픈 것은 그가 단지 앞으로 함께 하지 못해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심지어 영화가 제이크라는 화자를 통해서 보여주는 제이크 자신의 자기기만의 구조에서 생기는 착각일지도 모릅니다. 양은 가족들과 오랜 시간을 함께 했지만, 그의 기억 속에서 가족들은 늘 등만 보이는, 혹은 멀리 방 건너편에서 보이는 존재로서 남았습니다. 가족 안에 섞이지 못하고 끝끝내 겉도는 자로서의 기억만을 남기고, 유일하게 소통하는 사람은 가족 외부인(에이다는 이 영화 속 사회에서 그다지 좋은 시선을 받지 못하는 복제인간입니다)밖에 없던 자의 외로움을 영화는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대단한 선의를 가지고 해석했을 때, 제이크가 흘리는 눈물은 양의 가족 안 외로움을 부분적으로나마 눈치챘기 때문일 것이고, 그게 아니면 그저 가족이었다는 착각 때문일 것입니다. 이 영화를 찍은 감독인 코고나다는 어메리칸 코리안이고, 양의 역할을 맡은 저스틴 H 민 역시 아메리칸 코리안입니다. 이 영화가 그리는 외로움은 인간이라는 종에 섞여들지 못하는 테크노 사피언스의 SF 적인 외로움이면서, 그걸 은유로 쓰는 불완전 어메리칸으로서의 외로움일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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