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단상

2012.09.28 00:12

옥수수가 모르잖아 조회 수:1300

 

굉장히 오랜만에 지하철을 탔어요.

 

제가 서 있는 앞자리에 앉은 여고생이 스케치북을 꺼내 승객들을 스케치하기 시작했어요. 첫번째 그린 것이 스마트폰을 만지고 있는 건너편 남자의 팔과 손의 동작이었지요. 소녀의 옆자리엔 20대 여성이 앉아 있었는데, 그녀와 나는 소녀의 그림을 몰래몰래 엿보고 있었지요.

 

소녀의 옆자리에는 어떤 소년이 앉아 있었는데, 소년은 스마트폰에 수학 문제를 띄워 놓고, 영수증 같은 작은 종이에다 답을 구하고 있었어요. 문제는 사진으로 촬영된 것이었어요. 그걸 뭐라고 부르나요,  수직선 수평선이 십자로 교차하고 직선이 좌우로 V자를 그리고 있었지요.

 

그림을 그리는 소녀는 가끔 옆자리 소년의 수학 문제를 엿보았지요.

 

그 옆옆자리의 할머니는 또 옆자리 승객의 스마트폰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계셨어요. 쪼글쪼글 주름진 얼굴엔 호기심 반, 뭔지 알 것 같다는 표정이 반.

 

저는 할머니의 시선을 따라 핸드폰을 보고, 그 핸드폰의 주인인 어떤 남자의 얼굴을 보았어요. 그 사람의 얼굴에선 미소가 사라지질 않더군요. 왜 웃고 있는지는 금방 알 수 있었어요. 그의 등 뒤 유리창에 비친 스마트폰 화면엔 동그란 아기의 얼굴이 나왔다가, 그 아기의 동영상이 나왔다가, 사나이의 손짓에 따라 아기의 얼굴이 커졌다가, 작아졌다가.

 

다시 할머니를 보니 역시 눈을 떼질 못하고 계시고,  20대 여성은 그림을 그리는 소녀와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고, 저는 내렸어요.

30여 분 이상 스마트폰과 관련된 풍경을 본 셈이지요. 그런데 사람들이 외따로 떨어져 골몰해 있다기 보단 이상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이 들더군요. 이상하지요. 핸드폰은 개인적인 물품이고, 타인의 핸드폰 화면을 엿본다는 것은 무례하거나 불쾌한 종류의 일인데 말이지요. 소녀의 스케치북도 마찬가지고요. 

 

매일 버스를 이용하는지라 가끔 지하철을 타면 풍경이 바뀌고 있다는 것이 확실히 느껴집니다. 모두가 한 방향을 보고 앉아 있는 버스와는 아무래도 달라요. 버스에서도 다들 스마트폰을 하지요. 그래도 지하철과는 앵글이 꽤 다르거든요.

 

몇 달 전에 탄 지하철에선 유독  연인들의 진한 스킨쉽이 눈에 띄어서, 격세지감을 느꼈었는데 말이죠.

 

버스만 타고 다니는 저는 왠지 구시대 사람이 된 것같이 지하철 풍경이 신기하더군요.

 

집에 오는 길에 보니 달이 어제보다 더 부풀었어요.

며칠 후면 추석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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