꽤 오래 전 혈액형을 믿는다는 어떤 분의 글이 올라와 논쟁이 벌어졌던 적이 있지요. 당시 듀게의 반응은
굉장히 싸늘한 편이었습니다. 처음 글을 올리셨던 분은 예기치 못한 공격적인 반응에 마음도 많이 상하셨을 겁니다.
헌데 어제부터 올라온 사주 관련 글을 보니 의외로 사주를 믿는 문제에 관대한 분들이 계시는 것 같습니다. 그 분위기를
타서인지 '내가 경험한 잘 들어맞았던 사주' 사례담도 속속 올라오고 있고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저는 사주니, 혈액형이니, 별자리 
운명이니 하는 검증되지 않은 미신들은 일체 배제하는 것이 개인이나 사회의 지적 성취도나 정신적인 성숙에 도움이 된다고 봅니다.  

  
  사주를 믿는 행위를 옹호하는 입장을 대별해 보면,

1. 오랜 과거에 우리가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 우주의 법칙이나 인간의 운명을 감지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이들이 있었고,
그들에 의해 사주의 법칙이 수록되었다. 믿을 수 있다.

2. 사주가 맞는지 틀린지는 검증할 수 없다. 믿음의 영역일 뿐이다. 사주를 믿을 수 없다는 입장도 그 역시 하나의 믿음일 뿐, 마찬가지다.
또 사주를 믿는다고 크게 문제될 것은 없지 않은가. 더구나 사주는 카운셀링에도 도움이 되는 측면이 있다.

  이렇게 나눌 수 있는 것 같습니다.

  1의 경우는 사실 종교적 심성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흔히 종교에 대해서 '믿음의 영역'이라는 표현을 씁니다만, 그것은 종교가 특별한
존재여서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분석이 불가능한 대상이기 때문은 아닙니다. 그보다는 사회적 맥락에 따른 용인 내지는 관용에 가깝지요.
객관적으로 신뢰가 가지 않는 믿음이기는 하지만 굳이 믿고 싶다는 사람들에게 얼굴 붉히며 따지지는 않겠다는 것이죠. 이것은 종교 문제로
수없이 피를 흘려온 인류의 역사적 경험에 기인한 바도 있겠습니다. 물론 원칙적인 입장에 서서 종교를 포함한 모든 비합리적 사고에 메스를 들이대려고
하는 사람들도 없지는 않은데, 리처드 도킨스가 대표적인 사람이겠지요.

  합리적 사고가 인류가 사용해 왔던 모든 사유의 방식 중 가장 정확하고, 오류의 수정 가능성도 높으며, 객관성을 담보하는 방법론이라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입니다. 합리적 사고가 가진 설득력과 유용성 때문에 중세 서양의 신학에서도 이성으로 신의 존재를 증명해 보려는 시도는 
수없이 시도되었습니다. 굳이 현재의 인류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학문적 업적과 사회체계, 물질적 혜택들을 근거로 들지 않더라도 우리 
주위에서 흔히 일어나는 사기 범죄, 예컨대 보이스 피싱이나 가짜 산삼 구입 따위의 피해를 방지하는 데에도 합리적 사고는 유용하게 
사용됩니다. 합리적 사고에서 '믿음'이란 여러 단계의 검증을 거쳐 비로소 획득되는 권위이고, 그 권위도 영속적인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검증을 통해 철회되거나 수정될 수 있는 성격의 것입니다. 

  그런데 사주라는 것은 합리적 사고와는 매우 거리가 먼 믿음입니다. 우선 사주풀이에 사용되는 공식이 누구에 의해, 언제,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지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작동원리에 대한 설득력 있는 해명도 없습니다. 나름대로 내부의 논리 구조는 있습니다만, 어디까지나 전근대적인 지식
으로 만들어진 낡은 체계입니다. 예컨대 사주에서 사용되는 역법은 철저하게 지구의 공전과 자전 주기를 바탕으로 짜여진 것인데(물론 사주를 만든
사람은 공전이나 자전이라는 개념 따위는 전혀 몰랐겠죠), 전근대인의 세계관에서는 이것이 전 우주의 운동 법칙을 설명해 주는 절대적이고 신비한
수의 조합이었는지 몰라도, 지구가 태양계를 구성하는 여러 행성 중 하나라는 현대의 과학 지식이 개입되면 지구의 공전 주기나 자전 주기를 나타내는 
수치는 철저히 임의적인 것에 불과함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태양계를 구성하고 있는 행성들의 '1년'과 '하루'는 그 단위가 모두 다르고, 끝도 없이 펼쳐진 
우주로까지 사고를 확장하면 그 거대한 우주의 운명이 일개 티끌만큼의 존재감도 가지기 힘든 지구의 공전 주기나 자전 주기를 기준으로, 그것도 
고대 동양인들이 자기들 편의에 의해 만들어 놓은 시간기준에 맞추어 작동하고 있다는 생각이 얼마나 야랑자대한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2의 주장은 가장 기본적인 부분에서 논리적 오류가 있습니다. 2의 주장에 따르면 사주의 신빙성은 검증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므로, 사주를 믿는 것과 
믿지 않는 것은 동일한 가설단계를 취하고 있는 것이라고 상정하고 있습니다. 또 사주도 검증이 가능하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그럼 검증을 해 봐라. 신빙성 
없다는 검증 결과가 나올 때까지는 나는 일단 믿고 있겠다는 태도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합리적 태도는 아니죠. '아니라는 검증결과가 나올 때까지 
나는 믿고 있겠다'가 아니라 '맞다는 검증 결과가 나올 때까지는 믿음을 가지지 않겠다'가 옳은 태도입니다. 

  예를 들어 "JMS 정명석은 재림예수다"라는 주장을 접했을 때, 정명석이 재림예수가 아니라는 증거가 나올 때까지 일단 믿고 있겠다는 태도와 그가 
재림예수라는 증거가 나올 때까지 믿지 않겠다는 태도 중 어느 쪽이 옳은지는 자명합니다. 합리적인 사고를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귀납적인 태도를 취해야
합니다. 관련 자료와 근거들을 충분히 수집한 후 그 명제에 권위를 줄 것인지 여부를 결정해야지, 일단 권위부터 부여하고 추후 검증을 통해
권위의 박탈 여부를 판단하겠다는 태도는 어리석은 것이지요.

  사주를 믿는 것이 크게 해가 되는 것도 없지 않느냐, 효과적인 카운셀링이라는 순기능도 있지 않느냐는 주장도 있겠습니다만,  
비합리적인 믿음은 그것이 가시적으로 보여 주는 해악의 크기와 무관하게 이미 사회전체의 지적 능력을 떨어뜨리는 역할을 합니다. '합리적 검증에 앞서 
일단 믿겠다'는 태도가 용인되는 사회야말로 특정지역에 대한 편견,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악의적인 루머, 장삼이사들의 피를 빨아 먹는 거짓 종교인들의
활동 등이 손쉽게 확산될 수 있는 조건이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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