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펌] 자력구제가 답인가

2014.04.22 21:04

윤주 조회 수:1350

http://m.hani.co.kr/arti/opinion/column/633845.html

 

박근혜 정권의 위기대응능력은 그 자체로 재난이었다. 노동자들 때려잡고 간첩사건 만들어내고 댓글로 여론 조작하는 데에 그토록 유능했던 국가가, 시민들 목숨을 구하는 데엔 절망적으로 무능했다. 세월호 사고 소식은 분 단위로 일상 속에 틈입해 들어왔다. 우리는 속수무책 슬픔과 증오에 사로잡혀야 했다. 기초적인 사실관계조차 파악하기 힘든 아수라장이 며칠째 지속됐다. 여과되지 않은 감정의 배설물들이 날것으로 흘러다녔다. 제정신을 겨우 유지한 소수 언론을 제외하고 대다수 언론이 자극적인 이야기들을 닥치는 대로 확대 재생산했다. 황당무계한 음모론도 무성했다. 더 위험하고 우려스러운 건 ‘사고 나면 누구도 믿을 수 없으니 각자 알아서 자력구제 해야 한다’는 냉소가 만연하고 있다는 점이다.

 

피해가 이렇게까지 커진 원인은 무엇일까? 사람들은 말한다. 권위에 순종하도록 교육받은 사람들이 ‘가만히 있으라’는 선장의 지시를 순진하게 따랐기 때문이라고. 약삭빠르지 못한 죄로 안타까운 변을 당했다고. 각자도생하는 사회를 비판해온 진보 지식인들도 ‘착해서 늘 당하기만 하는’ 희생자의 서사로 이번 사고를 응결시켰다. 확실히 이런 주장은 사회의 폐부를 아프게 찌르며 우리의 죄책감과 분노를 자극한다. 국난이 터지면 지도자는 혼자 살겠다고 도망가고 민초들은 자기 자리를 지키다 죽어가는 풍경, 참으로 익숙하지 않은가. 조선의 왕 선조와 초대 대통령 이승만으로 대표되는 한반도의 ‘유구한 전통’ 말이다.

 

그럼에도 논점을 지시이행 여부로 좁혀버리는 이런 관점에는 두 가지 이유에서 동의하기 어렵다. 첫째, 사태의 인과관계를 뒤틀어 버린다. 피해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진 직접적인 원인은 승객의 고분고분한 순응이 아니라 선장의 치명적인 판단 착오였다. 더 명확히 말하자면 ‘선장 지시를 따랐기 때문에’ 사람들이 죽은 게 아니라, ‘선장이 잘못된 판단을 했기 때문에’ 그들이 죽었다. 둘째, 이런 관점은 자력구제를 승인하고 강화하는 기능을 한다. 책임자의 지시에 순응하는 바람에 죽었다는 서사는, 풍자나 역설일지라도 결과적으로 ‘자력구제 하라’는 메시지를 정당화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선박과 항공기처럼 고립된 운송수단에서 사고가 발생할 경우 지식과 경험을 지닌 운항 책임자의 명령에 따르는 것은 대체로 반대의 경우보다 생존 확률을 높인다. ‘세월호 이후’에도 마찬가지다.

 

하필 세월호 선장은 상황판단과 위기대응에 너무나 취약한 사람이었다. 재난상황에서 책임자의 작은 선택이 결정적 분수령이 되는 일은 드물지 않다. 뛰어난 판단력의 리더가 현장에 있는가 없는가는 ‘운’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번 사고는 단지 ‘선장 잘못 만난 불운’이라 할 수는 없다. 언론의 취재 결과 세월호는 승무원이 책임과 권한을 제대로 발휘하는 것이 애당초 어려운 배였기 때문이다. 갑판부, 기관부 등 안전과 직결된 부서 승무원 70%가 6개월~1년 계약의 불안정·비정규직 노동자였다. 심지어 선장조차 1년 계약직이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의 갈등 탓에 사실상 내부 명령체계가 이원화되어 있었다는 의혹도 제기됐다. 진부한 표현이지만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언제든 일어날 수 있었던 인재였다’고.

 

이번 사고로 ‘책임 있는 전문가’에 대한 신뢰가 크게 무너져 내린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가장 철저한 방식으로 책임져야 할 주체는 따로 있다. 시민 생명이 직결된 업무를 외주화·비정규직화하는 노동환경을 조장하고 심지어 강요해온 국가, 시민 생명이 위험에 빠졌을 때 철저히 무능하고 비겁했던 국가, 바로 이 나라 대한민국 정부다. 다시 이런 비극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려면 철저히 따져 묻고 독하게 뜯어고쳐야 한다.

 

박권일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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