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8.31 15:53
예전에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잠깐 만났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제가 크지도 작지도 않은 문제로 너무 힘들어서 내려 놓았습니다.
그런데 6개월 쯤 지나서 다시 연락이 왔습니다. "잘 지냈어?"라는 말로 시작하더니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전화 통화를 하게 되고, 며칠 후에는 퇴근 길에 만나 가볍게 저녁을 먹게 되었습니다.
오랜만에 본 그는 살이 조금 빠져 광대 밑의 뺨이 더 깊어진 것 빼곤 모두 똑같았습니다. 퇴근 후라 조금씩 흐트러진 정장과 반곱슬이라 머리가 길면 사방으로 더부룩해지는 머리카락.
늘 너무 길어서 도저히 봐 줄 수 없을 때까지 참다가 갑자기 바짝 자르고 나타나곤 했었어요.
밥을 먹다가 이야기가 길어지고, 조금 늦은 시간이 되서 그는 저를 집앞까지 바래다 주고 집 앞에서 다정하게 몇 마디 더 나누다가 헤어졌어요. 다음에 또 보자며 약속도 잡혔습니다. 집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거울을 보니 제 얼굴에 미소가 머금어져 있었어요. "다시 시작 되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싫지 않았습니다.
요 며칠 조금 붕 뜬 상태로 보냈습니다.
그리고 오늘 그의 꿈을 꾸었습니다.
그와 제가 벤치에 앉아 있었고, 그가 핸드폰으로 사진을 보여 주며 저에게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원래 떨어져 있는 동안 재미있는 것을 발견하면 사진을 찍어 두었다가 나중에 저에게 한 장 한 장 보여주며 이야기 나누는 걸 좋아했었죠.
그는 허리를 숙인채 구부정하게 앉아 스마트 폰 사진을 한 장 한 장 넘기고, 저는 왼쪽 뺨을 그의 오른쪽 어깨에 댄 채 그것을 한 장 한 장 봤습니다.
그 사진 안에는 아이도 아니고 어른도 아닌 예쁜 소녀가 있었습니다. 사진 들은 그 소녀와 그가 놀이 공원에 가서 함께 찍은 사진 들이었습니다.
단 둘이 간 건 아니고 소녀의 이모와, 어머니, 그리고 조카인지 늦둥이 동생인지 모를 어린 아기도 사진 속에 등장 했습니다.
그는 한 장 한 장 자상하게 설명을 하며 넘기는데, 저는 저도 모르게 그 소녀에게 질투를 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다가 어떤 사진을 보고는 "잠깐" 하고 그의 손을 멈추게 했어요. 저는 그의 어깨에서 제 뺨을 떼고는 물어 봤습니다. "이건 자기가 이 친구를 업어주고 있는 거야?"
소녀가 그의 바로 뒤에 붙어서 서 있는 것 같기도 하고, 혹은 그가 소녀를 업고 셀카를 찍은 것 같기도 한 사진이었습니다.
나는 표정 관리가 안 될 정도로 질투심에 사로 잡혔습니다. 여자로 보기엔 어리기도 하고, 그렇다고 아이도 아닌 그 소녀에게 질투를 하는 게 맞는지, 혹은 내가 예민한 건지 혼란스러워서 뭐라고 해야 할 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으응...아닐 걸?" 하는 그의 대답을 들어도 못 미덥기만 했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뭐라고 설명을 합니다. 이 아이는 친동생 같은 아이고, 그 집 어머님도 나를 너무 잘 알고, 우린 같은 교회를 다녔고, 날 큰 오빠 처럼 생각하고...
저는 그 말이 들리지 않고, 계속 그 소녀가 밉고 질투가 나고 그까지 미워집니다. 그리고 엉뚱하게 이렇게 말을 합니다. "아 그래? 좋네~축하해!"
"축하? 뭐를 축하한다는 건지..?" 라는 그의 말을 끝으로 잠에서 깨어 났습니다.
그리고 문득 생각이 났습니다. 맞아 그랬었지. 그와 그만 만나게 된 이유는 따로 있었지만 그 이면에는 그 사람 주변의 여성들 때문이었습니다.
이제 막 소녀티를 벗은 어린 여자 부터 10살 연상의 누나까지, 그의 주변에는 수 많은 이성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과 모두 아주 친밀한 사이였구요.
저도 그가 바람둥이가 아니고 제게 충실했다는 건 믿습니다. 그 여성들과 선을 넘는 어떤 것도 하지 않았다는 것도 믿습니다.
하지만 뭔가 그 관계들이 하나하나 신경이 쓰였습니다. 저는 그녀들이 그에게 마음이 조금씩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마치 가스가 새고있는 방을 보는 것 처럼 불안했습니다.
지금은 아무 일도 없지만, 작은 실수로 생긴 단 한 번의 스파크로도 펑! 하고 폭발해서 불이 붙을 것 같은 관계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끊임 없이 어떤 사건들이 생겼습니다. 그는 결코 그녀들과 선을 넘는 일은 하지 않았지만, 반대로 말하면 선 안에서는 뭐든지 다 했습니다.
선 근처에 아슬아슬하게 머무르면서 넘을락 말락 하는 느낌이랄까요.
그는 지방 출신이라 혼자 사는데, 서울에 일이 있어서 올라 온 고향 여동생을 하룻밤 재워준 후, 다음 날 저 만나는 데 데리고 나온 경우가 있었습니다. 기차 탈 때까지 놀아 준다구요. 나중에 그러더군요 "결혼을 약속한 애인이랑 심하게 싸워서 기분 전환 하러 서울 올라온 거다, 그 약혼남도 고향 동생인데 어제 전화하니까 '형한테 갔으면 됐다'고 하더라"
그는 작은 섬마을 출신입니다. 제주도가 아닌 작은 섬이요. 그러다보니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란 고향 친구들과의 유대 관계가 각별했습니다.
어렸을 땐 우리 집 딸, 옆 집 아들 구별 없이 다 커다란 고무대야에 넣어서 앉혀 놓고 한 사람씩 꺼내서 씻기고 그랬다더군요.
이런 종류의 일들이 많았습니다.
친한 누나, 교회 친구, 회사 동료, 아는 어머님, 친구가 부탁한 여동생, 사춘기 때 짝사랑 했던 여자 동창생...
반면에 전 서울 사람이고 여중,여고나 다름 없는 공학을 거쳐, 여대나 다름 없는 대학 생활을 했습니다. 정말 편한 이성친구는 5명이 안되구요, 이들과의 관계도 동성 친구에 비하면 밀착도가 낮은, 비교적 서먹한 관계 입니다. 친구로 지내다가 감정이 깊어져 연인으로 발전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연인이 생기면 이성 친구와는 단둘이 보지 않는 등 조심을 하게 되더라구요. 그래서 그의 그런 관계들을 머리로는 이해하려 노력 하면서도 마음 속으론 거부감이 들었습니다.
그는 내가 가장 소중하다고 했습니다. 다른 모든 사람들은 그 다음이라고...
저는 그를 많이 좋아한 만큼 두려웠고, 내가 먼저 다가간 탓에 자신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 다음으로 소중하다는 그녀들이 두렵고 얄미웠던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도 이런 감정이 부끄러워서 저에게 조차 숨겼나봅니다.
표면상으로 그와 저는 전혀 엉뚱한 다른 문제로 헤어진 것으로 되어 있었고, 그 뒤에 '질투'가 있었다는 걸 깨달은 건 몇 달 후였습니다.
꿈이 너무 생생해서, 꿈에서 깨고 나서 잠시 멍했습니다.
제가 자다가 일어났다는 자각이 들기까지 몇 분이 흘렀고 그 사이에 전 순간 이동 혹은 시간 여행한 사람 같은 기분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를 다시 만나게 되어도, 꿈 속에서 그랬던 것 처럼, 사소하고 평온한 만남 도중에 그런 일들이 또 불쑥불쑥 찾아 오겠지요. 그리고 전 꿈에서 처럼 비딱하고 엉뚱하게 반응을 할 거고, 아마 그는 눈을 크게 뜨고 의아해 하다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뭔가 다른 걸로 절 웃기려 하겠지요.
가족들이 다 외출해서 집은 조용하고, 커튼이 쳐져 어둑한 거실에서, 혼자 멍하게 앉아 이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갑자기 모든게 허무하고 슬퍼졌습니다.
그리고 뭔가 외롭습니다.
2014.08.31 16:09
2014.08.31 16:40
흐흐흐님~ 군중 속에서 외로움을 경험하는 것 많이 공감 됩니다. 마지막 문장이 뭔가 마음에 남네요.
2014.08.31 19:53
좋은 꿈을 꾸셨네요. 자기자신을 직면하는 게 가장 어려운 일이죠. 그리고 다른 얘기지만, 글을 참 조곤조곤 잘 쓰시는 것 같습니다 :)
2014.08.31 21:22
사냥꾼 님~. 감사해요. 그러고니 '좋은' 꿈이네요. 부끄러운 감정은 바로 안나타나고 자꾸 가면을 쓰고 뒤에 숨는 것 같아요. 나 조차도 몰라봐요. 글 잘 쓴다는 칭찬 너무 기쁩니다.
2014.08.31 22:40
2014.09.01 09:20
깅고님~. 그렇다면 어쩌면 이번에는 더 잘 하자고 꾼 꿈일 수도 있겠네요. 뭔가 마음에 위안이 되어요. ^^
오늘 밀린 eidf 출품작 보고 있는데 다큐라는 것도 인간의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각자 외로운 싸움을 하는 거죠 우린 서로 외롭게 떨어져서 각자의 삶을 바라보고요
결혼이란 것도 내 외로운 삶의 연장이겠다 하는 생각을 친구들이 모일때마다 해요
대여섯 되는 군중 속에서도 외로움을 경험하고 그러잖아요(나만 그럴수도;)
사랑이란 무엇일까를 한참 생각해보다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결론에 이르고요
그래도 감정의 뒷맛을 느끼며 사랑을 느껴보고 있어요
체스를 두고 실수를 보고 내 모든 용서될수 없는 실수들을 돌이켜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