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좀 순진한걸수도 있지만, 적어도 제가 막연하게나마 갖고 있던 한국 평균 남성의 양성평등에 관한 인식과 이번 사태에서 드러나는 태도가 많이 다릅니다.

그래서 과연 그 간극이 어디서 오는가에 대한 생각을 정리해본 내용입니다. 쓰고 보니 약간 면죄부를 써 준 기분이긴 하지만요.


이번 강남역 사건에 대해서, 몇 가지 논의점이 있겠지요.


1. 해당 살인이 여성혐오에 기인한 혐오범죄인가, 아니면 조현병 환자의 망상 범죄인가.

이것 역시도 바라보는 시선과 맥락에 따라 다양하게 이해될 수 있는 부분이겠습니다만...

경찰이 발표할 수 있는 건 어디까지나 이미 세워진 분류 체계 안에서의 관점이고, 그래서 이를 조현병 환자의 우발적 범행이라고 보는 것에 대해서는 어쩔 수 없다고 봅니다.

관료체제라는 것은 분절할 수 없는 것을 나눠서 정해진 틀 안에 넣어야만 할 때가 있으니까요.

다만, 범인이 노출되어 온 여성혐오의 환경이 상당한 영향을 끼쳤을 가능성이 있고, 실제로 사라져야만 할 여성혐오가 사회에 존재한다는 것에 저는 동의합니다.


2. 여성혐오를 없애거나, 최소한 줄이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 그리고 더 안전한 사회를 만들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데에 공감하는가.

글쎄요, 역시 순진한 생각일 수 있습니다만... 적어도 우리 사회가 이러한 것에 대해서 맥락 없이 공개적으로 반대할 정도로 미성숙한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물론 수준 이하의 인간들은 얼마든지 있었고 있습니다. 다만, 다수가 동의할 수 있는 의견은 역시 이쪽-여성혐오를 없애고, 더 안전한 사회를 만들자-이 아닌가 합니다.


3. 여성혐오, 그리고 잠재적 범죄자라는 표현에 대해.

misogyny의 번역어인 여성혐오는, 단어를 접했을 때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여성(에 대한)혐오]를 뛰어넘는 개념입니다.

하지만, 대체로 여성혐오에 대해 접하는 사람들이 그정도로 깊이 있게 찾아볼 이유는 없지요. 안타까운 부분이지만, 강제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지금 이슈가 된 강남역 살인사건이 여성혐오의 영향을 받았다는 데에는 무리 없이 합의를 이룰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만, 이 건에서 문외한들이 이해하는 여성혐오란 misogyny 개념 그대로의 것이라기보다는 위에서 이야기했듯 직관적으로 이해한 [여성혐오]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고 저는 이해합니다. 여성혐오가 만연한 사회라는 표현은 이해할 수 있지만, [여성혐오]가 만연한 사회라는 표현은,

대다수 사람들의 일상적인 경험에 반하거든요. 결국 여기서 "아닌데! [여성혐오]가 그렇게 팽배하진 않은데!"하는 반응이 나오게 됩니다.

심지어는 "나는 여자들을 좋아하는데 내가 왜 [여성혐오]야?" 하는 식의 얘기까지 나오죠.


당연히 여성혐오가 뭔지 찾아보지 않고 무턱대고 반박하는 측에 문제가 있습니다마는... 저는 조금 더 직관적인 다른 번역어가 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물론 학술 용어라는 것이 그 사용되어 온 맥락이 있다는 점에서 입맛대로 골라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학술 용어가 학술의 개념 안에서 머무르는 한, 그것이 일상 용어의 뉘앙스를 갖는다 하더라도 큰 문제가 되지는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다만, 그것이 영역 밖의 누군가에게 전해져야 할 때, 특히나 이번 사건처럼 빠른 속도로 확산되어야 할 때는

이런 작은 오해(마땅히 다른 말이 떠오르지 않는군요. misunderstanding을 말하고 싶은데...)가 쌓여서 같은 화제에 대해 전혀 다른 얘기를 나누게 만들 수 있습니다.

물론 이런 상황이 일어날 것을 예상하고 미리 대체용어를 논의할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었던 만큼 저는 지금의 논쟁이 필요 이상으로 증폭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잠재적 범죄자라는 표현도 마찬가지라고 저는 느낍니다. 남성 일반의 경향에 비춰 개체로서의 상대에 대해 알지 못하기 때문에 공포를 느낀다는 것과, 잠재적 범죄자라는 표현은 일상 수준에서 동치가 아닙니다.

맥락을 이해한다면 표현이 조금 과격할지언정 아주 틀린 말만은 아니라고 이해할 수 있을 일이지만, 당장 단어를 접하는 일반적인 남성이 받아들이는 감각은 이와 다릅니다.

주로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의 '잠재적 범죄자'에 가까운 개념입니다. "너는 언제든지 폭행, 강간, 살해를 저지를 수 있는 존재야"라고 이해되는거죠. 이래서야, 반발이 나올 수 밖에 없는 내용이 됩니다.


이러한 이유가 바로 좌파 운동권 남성들이 상대적으로 쉽게 "이 사회에는 여성혐오가 만연하다"와 "나는 잠재적 범죄자다"의 두 명제를 무리없이 소화하는 이유기도 하다고 봅니다.

그들은 페미니즘의 역사와 맥락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고, 또 일상적 뉘앙스와 다르게 사용되는 학술용어의 용법에 상대적으로 익숙합니다.

물론 모두가 페미니즘과 그 역사, 맥락에 대해 이해한다면 해결될 문제겠지만 얼마나 남았을지 모르는 그 순간까지 계속해서 무지에서 비롯된 충돌을 반복할 필요가 과연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결론을 내리기가 어렵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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