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8.21 23:08
터널을 보고 나와 문득 촐라체에서 기적적으로 생환해 돌아왔다던 두 사람의 이야기가 떠올랐어요. 당시 구독 중이던 신문을 뒤적이다가 우연히 읽었습니다. 한겨레의 인터뷰인데(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415098.html) 산악인에 대해 잘 모르는 편이라 이름도 낯설었지만 강렬한 이야기였죠. 크레바스에 빠진 동료와 자일로 연결되었다가 악투 끝에 빠져나왔고 그러고도 하산까지 이틀 낮밤을 헤맸다는 건 일반인이 쉽게 경험하기 힘든 극적인 사건이었지만, 그보다 그렇게 생환해 돌아온 두 사람의 '관계'를 언급한 부분이 더 흥미로웠습니다. 사람의 관계는 복잡한 면이 있죠. 극적인 상황에서 나의 안전과 이익을 담보로 누군가의 위험을 덜어주는 선한 행위는 즉각적인 미움을 불러일으키지만 그건 일시적인 감정이고, 희망을 잃지 않고 그 산을 내려 가는 데에 누군가 함께 살아있다는 것이 커다란 의지가 되었다는 말도 생각할 여지를 주더군요. 그렇게 돌아온 두 사람이 서로에게 거리를 두게 되는 것도 흥미로웠습니다.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박범신 작가가 쓴 '촐라체'도 박정헌씨의 생환 이야기에 모티브를 얻었다더군요..
따지고 보면 무너진 터널 속의 미나씨는 우연히 만났고 미나씨의 죽음은 이정수에게 엄청난 스트레스, 그리고 후회와 죄책감을 일으켰지만 그 일과 관련된 감정이 영화에서 그리 깊이 있게 다뤄지진 않더군요. 두 사람이 동시 생환하는 이야기와는 애초에 다른 면이 있지만 그래도 그런 면으로 영화가 조금 아쉬웠습니다. 다른 면에선 미나씨가 죽고 난 후 죽음과 유족 자체를 배제함으로써 신파의 위험을 줄이고 집중감은 더했던 거 같습니다. 어느 4월의 비극이 떠올라 편히 볼 수 없었지만 '터널' 자체로는 적당히 괜찮은 영화였어요.
언제부턴가 생존에 대해 말하는 일은 그 자체로 어렵다는 생각이 듭니다. 누군가는 죽지만 누군가는 살아남는 일은 삶에서도 영화에서도 무수한데 어느 순간부터 숨이 막히는 주제로 느껴집니다. 미나씨가 그렇게 빨리 죽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영화는 그런 이야기를 오래 하지는 않았지만 저는 자꾸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뭐 어차피 터널 안의 이정수씨도 밖에선 이미 죽은 사람처럼 다뤄지기도 했지만요. 살아있다는 것에 대해 말하면서 누군가의 죽음은 너무 빨리 지우는 일이 영화에서도, 사회에서도 일어나는 것 같았어요.
아니, 영화에 대해 말하기보다는 그저 '생존'과 '누군가의 죽음', 사람 사이의 '관계'에 대해 말하고 싶었나봐요. 모두 막연한 이야기이죠. 그저, 일어난 어떤 일에 대해서는 이제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고 솔직히 말하고 싶어요. 다 아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사실 전혀 이해 안되고 알 수 없는 그런 일들이 있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이해할 수 없을 일들이 존재하고 있음을 인정해야 할 것 같아요. 기다리면 알 수 있고 다 이해될 거라고 기대했었지만 모든 게 그렇지는 않겠죠. 그냥 안되는 것도 있겠죠. 그런게 어렵고 무겁습니다. 아직 제 인생에 일어난 일도 놓아버리려면 시간이 필요한데, 시간이 흐른다고 다 정리가 되기나 할까 싶기도 해요. 어쩌면 전혀 별개의 이야기를 그냥 막 섞어서 하는 것 같기도 하네요.
2016.08.22 00:28
2016.08.22 12:51
가영님 말씀이 맞아요 그런데도 이해해보려고 애쓰는게 사람의 일이죠.
2016.08.22 12:56
상당히 현실감있게 전개되는 내용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로 동화적인 분위기가 깔려있다는 생각이 드는 게 그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실제 상황이라면 물 나눠주는 것은 고사하고 희생자의 인육으로 연명하지 않으면 다행이겠죠...
2016.08.22 13:43
초반부터 터널 속에 갇힌 남자가 생존하기에 어느 정도 유리한 환경을 조성한, 잘 만들어진 설정이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물, 고열량의 생일케익, 오래 버티지 않고 죽은 다른 희생자, 사료와 개, 라디오까지..
2016.08.23 03:59
사는건 뭘 깨닫고 그런게 아니란 생각을 합니다 시간의 우연에 잠시잠시 맞춰 가는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