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4.28 15:05
프리드리히 2세(1712~1786), 프로이센(통일 전 독일)의 왕, 짤은 지난 2012년에 제작된 독일 ZDF 다큐 영화 <프리드리히 대왕 - 모 아니면 도...Friedrich der Große Alles oder Nichts - Doku Deutsch über Friedrich den Grossen> 중의 한 장면(대왕 탄생 300주년 기념작)
소설 <난쟁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조세희, 1978년)에는 개와 관련된 인상적인 구절이 하나 나옵니다. 이 소설의 주인공들 중에는 재벌 3세도 있는데(연작 단편이라서 주인공이 여러 명입니다.) 그 재벌 3세 젊은이의 할아버지(정주영이 모델같음)가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습니다. "...독일에는 어떤 위대한 왕이 있었는데, 그 왕은 개를 정말 좋아했지.... 사람들이 개와 같은 충성심만 있다면 그 나라는 부강할거야, 마치 독일처럼.." 이 구절을 읽다가 하도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기는 했는데 그 독일 왕이 누군가 궁금하긴 하더라구요. 그 책 처음 읽을 때는 황제 빌헬름 1세(독일 제국 수립)인가 생각도 했었고.
그런데 그 개를 좋아한 독일 왕이 누군지 최근에 알게됐습니다. 프리드리히 2세는 중딩 시절부터 '계몽전제군주'라는 용어로 배웠었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이런 인물이 있었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이 분이 그 '독일의 애견 왕'인 줄은 몰랐었죠. 이 양반 어록이 워낙 유명해서 개에 대한 명언들도 많은데 그 중 가장 들어줄 만한 구절을 꼽는다면 "개의 충성심이 인간보다 낫다." 뭐 이 정도? 이 분의 애견 사랑은 워낙 대단해서 죽은 뒤에는 상수시궁(짤에 보이는 배경의 궁전)의 정원에 당신의 개들과 함께 묻혀있을 정도....(대왕의 작고 소박한 비석 옆에 개들 비석이 무려 11개가 줄줄이...-_-;;)
대왕의 개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는 다음의 일화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이 분은 일각의 평에 의하면 히틀러의 원조...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재위 기간 내내 주변 국가들에 대한 침략전쟁을 일삼았는데(1740년 슐레지엔 침공(1, 2차), 그 뒤로는 7년 전쟁(1756~1763) 일명 18세기의 세계대전이라는 별칭을 갖고 있죠. 그 전쟁의 와중에 쿠네스도르프 전투에 패했을 때는 정말 제대로 위기에 몰린 터라 수도 베를린이 적군(오스트리아)에게 함락되고 저 짤의 배경인 상수시 궁이 있는 포츠담 시까지 점령되어 저 아름다운 궁도 여지없이 약탈을 당했죠. 그 때 대왕이 키우던 개 두 마리도 적군이 데려갔는데, 나중에 전쟁 끝나고 평화협상 하면서 개를 돌려 받았다고....
그런데 요즘 몇 년째 개를 키우면서 느끼는 것인데, 개들도 그저 맹목적인 충성심을 갖지는 않더군요. 뭐랄까 같이 사는 인간이 원하는 바에 맞춰서 철저하게 적응한 것에 불과하다고나 할까...일단 제 경우는 그렇습니다. 저는 개라 해도 고양이처럼 독립적이기를 바랬는데 그런 내색을 정말 알아채고 독립적으로 살더란 말이죠. 아니 그걸 더 넘어서 이제는 심지어 저에게 뭐라고 야단을 치거나 이것 저것 해달라고 짖어대기까지...어떨땐 개가 뭔가 해달라는 걸 무시하다가 가끔 물리기까지 하는데...한 번은 너무 세게 물어서 저도 모르게 발길질을 했네요. 개 버릇을 너무 잘못 들였나...후회 중입니다.
아니 대체 이 분은 뭘 근거로 개의 충성심이 대단하다고 하신 건지...울 집 개 보니까 영 진짜 아닌데...대체 어떻게 길 들이면서 키웠을까 했더니 친구 왈, 개 조련사가 다 해줬을 걸...지금 이 글을 쓰는 와중에도 울 집 강아지가 제 발치를 어르대고 있습니다. 그 녀석은 지금 언제 저 발가락을 물어버릴까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거든요. 승질대로 발길질 했다간 병원비가 더 들...걸 우려해서 제가 맘대로 발길질을 못한다는 걸 너무 잘 아는 터라....에고 얄미워라...;;
여튼 대왕께서는 만년에 이런 어록도 남겼습니다.
"...노예들 다스리는데 지쳤다...."
지난 시절 나치가 욱일승천하던 때, 히틀러의 집권을 두려워했던 좌파 정당들은 대왕의 저 어록을 선거 구호로 삼아 대대적인 캠페인을 펼쳤습니다......결과를 생각해 보면 전혀 먹히지 않았던 구호이긴 한데.....대체 저 양반은 개의 충성심과 노예들 사이에서 어떤 방황을 하고 있었던 걸까 싶군요.
„Kronprinz Friedrich mit Schwarzem und Weißem Adlerorden“, Gemälde von Georg Lisiewski, um 1729
왕세자 시절의 프리드리히 2세, 이 분은 젊었을 적의 초상화나 초상 조각이 거의 없는 터라 이렇게 젊은 모습의 그림들을 접하면 정말 반갑더군요. 그나저나 요즘 동성애 이슈로 시끌벅적한 소동들을 지켜보고 있으려니 문득 이 분의 젊은 시절에 있었던 끔찍한 사건이 하나 떠올랐습니다. 모든 역사 기록이 침묵하는 와중에 - 단지 드러난 정황만으로 파악하건데 - 프리드리히 2세가 겪었던 유년 시절의 끔찍한 학대나 청소년기에 있었던 그 참혹한 사건은 분명히 이 사람의 성정체성과 관련이 있었던것 같습니다. 뭐 간단히 말해서 이런 겁니다. 단지 그렇게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부모를 비롯해 세상 모두가 증오하고 온갖 폭력에 시달려야 하고 끝내는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목숨까지...내놔야 할 지경까지 몰린다면.... 사람이 어떻게 될까...?
여튼 그런 지옥에서 살아남은 경이로운 인간 하나가 여기 있습니다.
개 한 마리 길동무 삼아 어둠을 건너 온...
.....그런데...이 분이 자기가 당한 고통을 자기네 독일 백성과 주변 국가들에게 마구마구 푼게 아닐까.....(심리학 용어로 '투사'라고 하더군요.) 요즘 그런 생각도 드는군요....
2017.04.28 16:15
2017.04.28 18:33
감사합니다^^ 실은 귀여운 강아지가 나오는 웃긴 짤방 하나 올리고 몇 마디 멘트로 끝내려다가 님 댓글 보고 이야기를 좀 더 붙였습니다. 덕분에 유머짤로 시작해서.... 어떤 비극적인 사연을 가진 인간의 초상으로 끝을 맺었네요. 조만간 프리드리히 대왕에 대한 글 한 편 쓸 계획입니다.
2017.04.29 00:55
아... 예상보다도 더 처절한(?) 이야기였습니다. 정말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조만간 쓰신다는 글도 기대할게요.
2017.04.29 06:44
2017.04.28 17:05
설마 개를 돌려받으려고 평화협정을 맺은건 아니겠죠 ㅋㅋㅋ
2017.04.28 18:39
어쩌면 그럴지도 몰라요…-_-;;…
나름 전쟁사 관련 자료를 심각하게 읽고 있었는데 저 놈의 일화 때문에 순간 빵 터지더라는…저 양반 때문에 죽은 사람이 대체 몇 십만인데 이런 것 가지고 사람을 웃기게 하나 싶어서 씁쓸하기도 하고.....프리드리히 2세는 7년 전쟁을 일으켰고(세상에…예방전쟁인가 뭐라나…이런 개드립까지 치면서 말이죠!) 결국은 승리해서 프로이센의 영토를 무지 확장했습니다. '대왕'이라는 칭호도 받았구요. 오늘날에는 전쟁과 복지정책…을 통해 독일이라는 나라의 근간을 만든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지요.
2017.04.29 08:56
2017.04.29 09:15
그러게 말입니다. 하필이면 그 말을 재벌 회장이 하니 더 기가 막히더라는…
여튼 이 소설 <난쟁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이 묘사하고 있는 1960~
70년대 한국의 노동 현실은 진짜 대박이죠…조세희 선생은 그런 착취 구조를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 기업 경영자들의 심리를 묘사하기 위해 300년전의 저 독일 왕 일화를 가져왔는데(은근 서양사대주의도 비꼬려고 했던것 같기도 하고…) 그 말을 들으며 자란 그의 손자는(주인공 재벌 3세) 불현듯 화가 나서 - 반항 심리로 - 할아버지의 개를 죽이려고 2층 침실에서 책을 집어던지기까지 합니다…다행히 책이 빗나가는 바람에 끔찍한 동물학대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만, 여튼 이런 일화들 묘사가 정말 인상적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모순을 깨달으면서도 그 모순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방황하는 그 재벌 3세 젊은이의 내면 묘사가 섬뜩하면서도 환상적이었거든요. 이런 심리 묘사는 문장으로써만 표현이 가능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죠.
2017.04.29 09:27
그런데 한편으로는 그 재벌 3세의 처지나 저 애견왕의 처지가 상당히 유사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씁쓸하기도 합니다. 프리드리히 2세가 태어난 프로이센 왕국은 그 시절 기준으로도(18세기) 세계에서 가장 군국주의화된 나라였고 대왕이 28세 젊은 나이에 왕이 되었을 때 상황은 이러했습니다. (나라 전체가 무슨 병영같았죠. 인구 29명당 1명이 현역 군인)
나름 계몽사상을 가진 철학자 군주였고 예민한 감수성을 지닌 음악가(플루리스트, 작곡만 100여곡 남김, 지금도 음반이 인기리에 발매됨…)이기도 했지만 그의 백성들은 개와같은 충성심을 가진 노예들 밖에 없…여튼 프리드리히 2세는 즉위하자마자 전쟁을 일으키며(1740년 슐레지엔 침공) 본격적인 영토 확장 정책에 나섭니다. 중세도 아니고 근세에 무슨 고대 국가의 정복 군주가 유럽 한 가운데에 출현…여튼 대왕 치세 내내 일어난 정복전쟁에 200만 밖에 안돼는 프로이센 사람들이 총동원 되었는데, 반란 한번 안 일어난것만 봐도 당시 사람들의 충성심이 어떠했는가 알겠더군요.
오늘도 로딩(...)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개의 충성심' 다음이 넘나 궁금하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