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태를 느낀 친구와의 재회

2024.03.24 11:15

Sonny 조회 수:407

예전에 제가 권태를 느낀다고 썼던 친구와 다시 만났습니다. 이렇게 쓰고 보니 [패스트 라이브즈]의 만남 같은 거창한 기분이 드는데, 그냥 그 때 만났던 사람들 그대로 셋이 어울려서 다시 놀았을 뿐입니다. 같이 미술관을 가고 칼국수도 가고 삼청동을 쏘다니면서 사람 구경을 하다가 까페에서 하염없이 죽치고 있었습니다. 이 날 얼마나 많은 대화를 했는지 입술이 바싹 마를 지경이었습니다. 유재석이 이 맛에 조동아리 클럽을 유지하는구나 싶기도 했습니다.


인연에 너무 큰 감정을 부여하면 안되는 건가 봅니다. 그 친구와 다시 봤을 때 정말 아무렇지 않았습니다. 그건 아마 그 친구의 천성적 무던함 덕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저는 그게 저희 사이의 꽤나 큰 파국이었다고 느꼈는데 그 친구는 그렇게 안느껴서 그랬을려나요. 혹은 혼자서 저와 비슷한 '파연'을 느끼다가 어제 하루는 아무렇지 않은 척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 어찌됐든 실제로 마주했을 때 그렇게 꺼끌거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여전히 뚝딱이고 제가 놀리는 걸 참을 수 없게 만듭니다. 88올림픽을 이야기하는데 "그 때 참 좋았지..."라며 난데없이 영감처럼 넋두리를 늘어놔서 저희의 타박을 받았습니다. 그는 종종 기계적인 리액션을 합니다. 저는 그가 [패스트 라이브즈]의 유태오처럼 말한다면서 혹시 '비밀 교포'같은 게 아니냐고 놀리기도 했습니다.


인연이라는 건 한편으로는 초같은 것이라고도 생각했습니다. 심지에 불은 붙어도 더 이상 그 화력을 유지할 수 있는 초 자체가 없다면 예전처럼 또렷한 불꽃으로 타오르지는 않을지도요. 너무나 다른 사람이 서로 원하는 자극을 주고 받지 못하는 채로 그저 시간만을 함께 지내왔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조금은 먼 거리에서, 더 먼 간격으로 종종 안부를 주고 받고 관계를 유지하면 어떤 식으로든 끊어지진 않을 거라는 작은 믿음 같은 걸 얻었습니다. 그 때는 관계라는 것이 아주 딱딱한 유리같은 것이라 금이 가면 그걸로 영영 부숴지는 줄 알았는데 이제 다른 친구를 끼워서 이런 저런 경험들을 쌓으면 또 그게 새로운 초로 뭉쳐질 수도 있겠지요. 


놀라운 이야기들을 많이 들었습니다. 다른 친구가 무려 압수수색을 당했던 일, 직장에서 대표한테 성희롱을 당했던 일, 나는 솔로의 빌런스러운 행태를 보이는 누구, 싫어함을 공유하는 만큼 좋아함을 많이 공유해야한다는 작은 다짐... 평상시 스트레스를 주는 사람들이 저희의 불의하고 속된 대화속에서 시간 보내기의 재료로 알차게 쓰였습니다. 이들 덕에 저희는 상식인이자 교양인으로서의 지위에 마음껏 도취되었습니다. 그 와중에 그 친구는 저희의 지탄없는 심판 속에서도 다른 누군가를 변호하려 긍정회로를 모터가 탈 때까지 돌려서 저희가 또 웃었습니다. 한없이 좁은 인간 관계에서 무슨 그런 소프드라마가 많이 튀어나오는지요. 다음에는 연극을 같이 보러가기로 했습니다. 그 친구는 한 때 배우를 꿈꿨으니 이게 또 좋은 이야깃거리가 될 거라 기대를 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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