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인> 을 읽고

2022.06.01 13:55

thoma 조회 수:299

예전에 한 번 읽었지만 이번에 보니 간혹 어떤 장면에서 흐릿한 기억이 부분적으로 날 뿐, 처음 읽는 것과 다를 바 없었습니다. 

고전, 읽었다고 방심 마시고 다시 한 번 읽어 보시길.

아래에 내용이 겉핥기로 일부 나옵니다. 이 내용을 안다한들 소설을 처음 감상하려는 분께 방해가 되진 않는다고 생각합니다만. 

<행인>은 1912년에 시작해 1913년까지 일 년 정도 연재하여 완성한 나쓰메 소세키 46세 때의 장편입니다.

아래 사진은 이 소설을 쓰던 무렵 작가의 집(소세키 산방)과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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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부로 된 이 소설은 1, 2부가 여행지에서의 일이고 3, 4부는 도쿄 집이 배경인데 4부 뒷 부분은 여행지에서 보낸 편지로 되어 있어 여행이 큰 비중을 차지해요. 

   

1부 '친구'

여행지인 오사카에서 친구가 갑자기 발병하여 입원을 하게 되고, '나'는 그 병원에서 오래 시간을 보냅니다. 친구는 중병이 아니라 병세에는 크게 신경쓰이지 않습니다. '나'는 설렁설렁 이것저것 살피면서 병원의 간호사나 미모의 다른 병실 환자를 관찰하고 그 결과를 친구의 정보와 주고받으며 잡담하는 중 그의 비밀스런 연애담 비슷한 것을 듣게 됩니다. 연애다운 연애는 아니지만 불행한 결혼 생활 후 이혼하고 머리가 이상해진 채 친구네 집에 잠시 머문, 지금은 죽어버린 친구 집안 지인의 딸과의 사연입니다. 

친구가 앓는 위장병과 사연 속의 아가씨가 가진 정신에 문제가 생기는 병은 소세키가 잘 아는 병이라 여러 작품에 등장하였죠. 그리고 '불행한 결혼'이라는 주제도. 

내가 아픈 것이 아님. 친구가 아픈데 심한 병은 아님. 나는 이 장소가 여행지라 일상의 의무에서 벗어나 있고 고독한 친구를 생각해 병원에 머무는 시간이 길 수 밖에 없음 - 이런 조건은 참 이상적인 것 같습니다. 멍하게 앉아서 남을 관찰하거나 창 밖 풍경을 살피면서 마음 속 생각에 잠기는 것 이외엔 할 일이 없어도 되는, 시공의 틈바구니에 위치한 화자를 내세우기에 말입니다. (이런 상황의 이런 화자라면 가장 유명한 소설이 바로 <마의 산> 아닐까요.)


2부 '형'

친구는 거의 나아져서 침대차로 도쿄로 가고 '나'는 어머니와 형 부부가 온다고 하여 남게 됩니다. 집에 살림을 돕던 친척 아가씨의 혼담 문제도 처리해야 하고, 겸사겸사 여행을 온 것이죠. 이제 본격적으로 여행지를 다니고 가족 구성원들의 성격과 관계, 갈등이 드러나게 됩니다. 형 부부는 서로에게 냉담한데 형은 그것을 못 견디며 괴로워하는 쪽이고 형수는 더 차분해 보입니다. 둘 다 남들 앞에서 상대로 인해 본인 마음을 괴롭히고 있다는 표현은 하지 않지만 형의 경우 오래 겪은 부모나 형제들에게 그 심사가 다 읽히는 것이죠. 여행이 진행되며 형 부부의 불화의 원인 중 하나가 화자 자신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하여 형은 '나'에게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하게 되고...

2부에서 인문 학자인 '형'은 역시 정신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좋게 봐 주면 생각으로 생각을 쌓아올리는 학자적 성격, 사색의 외곬으로 인한 것이지만 제가 보기엔 집안의 장남으로 뭐든 마음대로 해야 직성이 풀리고 자기 기준에 못 미치고 의심이 생기면 그 의심과 집착에서 놓여나지 못하는 히스테리적 성격에 원인이 있는 것 같습니다. 원만한 사람들끼리도 여행지에선 서로에게 너무 밀착하게 되어 삐걱이기 쉽지만 2부의 이 가족의 눈치보기 말 조심하기는 살얼음 판이다 싶은 장면이 여럿 있더군요. 본격 등장하는 '불행한 결혼'


3부 '돌아오고 나서'

집에 돌아와서 새로이 보게 되는 형이라는 사람은 가족 구성원 사이에서 물에 기름처럼 겉돕니다. 이전에는 학자니까 자기 공간에서 혼자만의 시간이 절대로 필요하겠지, 장남이니까 다들 어느정도 접고 대우하는(받는) 게 맞겠지, 하고 막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는데 이러한 형과 나머지 가족 사이 서로 간의 양해가 견고한 틀로 고정되고 형은 자발적, 비자발적 고립 상태가 됩니다. 다른 가족들은 형의 서재에 들어서면 뿜어져 나오는 사색(思索)의 오라(aura) 달리 말하자면 불친절의 냉기로 오싹한 느낌까지 갖게 되어 들어가길 꺼립니다.(저도 제 방에 들어오는 이들에게 이런 방법을 쓴 적이 있지만 가만 생각해 보면 들어오는 이들이 저보다 강자였을 때만 그랬던 것 같네요.) 어느 날 '나'는 형과 격하게 부딪히는 중에 욕을 먹고, 이후 저녁 식사 때마다 지겨움과 불쾌함을 견디다 못해 방을 얻어 집을 나옵니다. 그리고 오사카 사람과 진행 중이던 친척 아가씨의 결혼식이 있고, 그리고 '나'는 형의 강의가 이상해졌다는 평을 건너건너 듣게 됩니다. 이 소설을 읽어 갈수록 형인 이치로에게서 나쓰메 소세키 본인의 반영을 보게 됩니다. 3부에서는 부부와 가족 같은 가장 가깝게 맺어진 사람을 너무나 멀게만 느끼고 다가갈 방법을 모르고 내면으로 심연으로 둥둥 떠내려가는 '형'의 문제가 점점 부각됩니다. 


4부 '번뇌'

'나'는 형수와 부모님께 각기 전해 들은 형의 근황이 너무 걱정이 됩니다. 결국 친구가 연결해 주어 형의 절친 'H'씨를 만나고, 형과 여행을 가달라고 부탁합니다. 여행으로 심신의 전환을 바라고요. 그리고 형을 관찰한 편지를 써달라고 부탁합니다. 무리한 요구지만 어찌저찌 받아들여지고 초조한 기다림 끝에 편지를 받습니다. 


' H씨는 촘촘하게 줄이 쳐진 서양 종이에 만년필로 가득 써서 보내왔다. 장수만 봐도 두세 시간에 쓸 수 있는 편지가 아니었다. 나는 책상에 묶인 인형 같은 자세로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내 눈에는 조그맣고 까만 글자의 한 점 한 획도 놓치지 않으려는 결심이 불꽃처럼 빛났다. 내 마음은 편지지 위에 못 박혔다. 게다가 눈 위를 달리는 썰매처럼 그 위를 미끄러져 갔다. 요컨대 나는 H씨의 편지 첫 장 첫 줄부터 읽기 시작하여 마지막 장 마지막 구절에 이르기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렸는지 전혀 느끼지 못했다. 

 편지는 아래와 같이 쓰여 있었다. '


이후 내용은 편지로 이어지다가 소설이 끝납니다. 58페이지 분량의 편지네요. 긴 편지가 인용된 경우가 이 소설 다음의 장편 <마음>에도 있었던(유서였고 분량은 훨씬 많았으나) 기억이 납니다. 편지라는 매체가 과거의 소설에선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했었죠. 이제는 역사의 한 장이 된 거 같습니다. 이 소설에서 편지의 문장이 매우 좋습니다. <마음>에서도 편지 속의 문장이 좋았던 기억이 나네요. 'H'씨의 편지에 드러난 형은 친구의 눈으로 본 형이지만 도쿄를 떠나 먹고 자고 하루 종일 붙어 있으며 가족처럼 생활을 하면서 본 모습이라 지금까지와는 다른 형의 내면이 행위와 대화로 깊고 솔직하게 드러납니다. 저는 형을 어떤 사람으로 이해해야 할 것인지 마음을 정하기가 어려웠어요. 편지의 내용이 혹시 궁금하시면 소설을 읽어 보시기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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