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벽장이나 장롱 속에 들어앉아 있기를 좋아했던 분 계신가요?

저는 어렸을 때 벽장 속에 곧잘 들어가 혼자서 몇 시간이나 놀곤 했어요.

딱히 그럴싸한 이유는 없었어요.

벽장 속에 갇혀 있는 오래된 옷들의 다소 쿰쿰한 냄새와, 몸에 닿는 옷들의 감촉, 어두컴컴하고 비좁지만 오히려 안온한 느낌을 주는 공간의 힘,

그리고 누구 하나 나를 쫓는 이는 없지만, 그래도 뭔가로부터 숨을 수 있는 나만의 장소를 찾았다는 기쁨이 그 이유라면 이유.  

 

아이 손바닥 하나 겨우 비집고 들어올 만큼 벽장 문을 살짝 열어놓고, 옷들은 등받이와 쿠션 삼아 앉아 혼자 이런저런 공상,

예를 들어 이번 가출 때 비상식량은 감자깡과 양파깡의 조합이 좋을 것인가, 새우깡을 주로 하되 고구마깡같은 달착지근한 것들을 곁들일 것인가,

얼마 전 바뀐 새로운 짝이 나와 똑같은 디자인의 색상만 다른 가방을 갖고 있는 것을 보니 뭔가 우리 사이는 심상치않은 것 같다는 확신을 되뇌이며

소형 라디오를 조그만 소리로 틀어놓고 잠을 청하기도 했고,  누군가 날 찾으러 이곳저곳을 뒤지며 다닐 지도 모른다는 기대 반 불안감 반에 살짝 설레여

괜히 귀를 문가에 가까이 귀울여 숨을 고르기도 했죠.

 

시간이 조금 흘러 벽장 속에 몸을 숨기는 게 점점 갑갑하고, 불편해지면서 새로운 대체공간을 찾아 집안을 빙빙 돌다가 발견한 것은 언니들의 장롱이었어요.

언니 둘이 함께 쓰던 방에 놓인 그 장롱은  엄마가 결혼할 때 혼수로 해왔던 커다랗고 뚱뚱한 장롱이었죠.

장롱 중앙에 커다란 전신거울이 붙어 있고 묵직한 미닫이문이 양옆으로 달려 있어,

문을 열고 닫을 때마다 나던 드르륵, 드르르륵 소리가 괜시리 좋아 쓸데없이 혼자 문을 열고 닫곤 했죠.

 

장롱 한 칸에는 잘 안 쓰는 이불과 요가 높이 쌓아져 있었는데, 문앞에 의자를 대고 낑낑대며 이불더미 위로 올라가서 앉아 있으면

장롱 천장이 머리에 달랑말랑 아슬아슬, 마치 자신이 완두콩 공주라도 된냥 아, 이 침대 밑에는 뭔가 딱딱한 것이 있어 편히 있을 수가 없구나..하..

이러면서 아쉬워하는 시늉을 내며 다시 장롱 밖으로 나왔어요.

 

다른 한 칸에는 외투와 스웨터 따위가 들어 있었는데 주로 이용했던 것은 이불칸이 아니라 바로 이 칸이었죠.

이 칸은 그 전에 애용하던 벽장과 비교해 볼 때 무릎을 가슴팍까지 끌어올리지 않아도 될만한 충분한 공간이 있었기에

소소한 다과-라고 해봤자 과자-와 손전등을 무릎 사이에 끼워넣고 ABE 같은 것들을 읽을 수 있었어요. 

룰루와 끼끼 같은 책을 더듬더듬 읽으며 아, 고래는 플랑크톤을 좋아하는군.. 황제펭귄은 성질이 사납군.. 이런 식으로 시간을 보냈어요.

그러다 갑갑증이 치밀면 문을 드르륵, 벌컥 열고 나와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가 장롱에 칩거한 동안 그간 집안에 무슨 일이 없었나 엣헴, 동정을 살피며 기웃거렸죠.

 

장롱과 벽장 이외에 어린시절 이상하리만치 애착을 보이던 다른 하나는 커튼이었어요.

집안 곳곳에 있는 커튼 중 안방과 거실의 커튼을 잡고 늘어졌는데, 이 커튼들은 천장부터 바닥까지 길게 늘어져있는 모양이 무슨 연극무대의 막을 알리는 커튼같았죠.  

식구 중 누군가 혹은 아주 가끔씩 놀러오던 내 또래의 누군가를 놀래키고 싶을 때는 장롱이나 벽장보다는 커튼 뒤에 몸을 숨기고 꼼짝하지 않고 참을성 있게 기다리다가

갑자기 튀어나오는게 효과적이라는 걸 안 이후부터 기회만 잡으면 현관쪽과 가까운 거실 커튼에 몸을 숨겼어요.

불현듯 서러워지거나, 억울할 때 흐르는 눈물을 숨기기 위해 커튼 속으로 숨었던 적도 여러번 있었죠. 

커튼 뒤에 선 채 양볼로 흐르는 눈물을 번갈아 커튼에 닦아내며 눈물 훌쩍, 콧물 훌쩍이다보면 저기 어디에선가 TV 소리가 들리고,

그러면 또 서러움은 사라지고 TV를 보고 싶은 열망에 잠시 몸 달아하다 쭈뼛쭈뼛 커튼 속에서 나와 TV가 보이는 곳으로 슬그머니 이동해서 시치미를 떼고 함께 TV를 보곤 했죠.

 

어느 날은 성질 나쁜 오빠가 웬일로  같이 놀자고 설레발을 치며 어울리지 않는 친절과, 아양을 떨길래 떨떠름하면서도 같이 놀자는 말에 조금 설레어

오빠 뒤를 따라 안방 화장실로 따라갔더니, 갑자기 주머니에서 아빠의 일회용 면도기를 꺼내보이며 함께 면도하기 놀이를 제안하더군요.

제가 그닥 내켜하지 않자 본인이 먼저 시범을 보여 안전성을 증명하겠다며 면도기에 뚜껑을 덮은 채 슥삭슥삭 턱수염을 깎는 시늉을 하는데..

호, 면도란 뭔가 폼나고 멋있는 거구나 싶어 서슴지 않고 나도 한 번 해보겠다고 면도기를 뺏어 들었어요.

 

하지만, 이게 무슨 일인지 면도기를 얼굴에 대고 이리저리 문지렀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따끔따끔한 거예요.

따끔따끔하는 그 느낌이 불쾌해, 마음을 가라앉혀줄 커튼으로 직행해서 커튼을 몸에 반쯤 휘감고 가만히 얼굴을 대고 있으려니 따끔따끔함이 점점 심해졌어요.  

실크를 가장한 합성섬유의 커튼감과 얼굴 어딘가의 따끔함이 맞물려 고통이 배가될 무렵 얼굴을 떼고 무심코 커튼을 봤더니 얼굴을 뗀 자리에 핏자국.

엄마가 열심히 세탁해 늘 하얗기만 했던 커튼에 묻은 붉은색을 보고 잠시 이게 뭐지 싶어 멍하다가, 피라는 것을 깨닫고 놀랐어요.  

그제서야 화장실에서의 면도하기 놀이가 오빠의 음모와 사기에 다름아님을 깨닫고 따지러 갔더니 녀석은 이미 줄행랑.

범행현장을 그대로 놔두고 도망친 뻔뻔함을 뒤로 하고 면도기를 살펴 봤더니, 뚜껑이 열려 있는 상태이더군요.

자신은 뚜껑을 닫고 안전하게 면도 흉내를 한 거고, 저는 일종의 마루타가 되어 뚜껑이 열려 있는 면도기를 사용했던 거죠.

복수를 다짐하며 엄마의 화장대 앞으로 가서 거울을 보니 오른쪽 눈썹 바로 아래에 핏방울이 맺혀 있는 게 너무나도 잘 보였어요.

무력함과 분노, 호의라고 생각하고 의심없이 같이 따라 놀았던 스스로가 한심해져 커튼 속에 들어가 누가 들을새라 숨죽여 울었죠.

정말 한참이 지난 지금도 가끔 눈썹 밑에 나있는 작은 흉터를 보면 그때가 떠오르는데,  정작 어떻게 보복했는지 도무지 기억나지 않아 뭔가 억울할 뿐.

집에서 커튼을 떼어버린 지 오래고,  커다란 거울이 달려있던 장롱도 오래전에 버리고 없지만 벽장만은 남아있는데 

장롱과 커튼이 없는 집에서의 벽장은 저에게 더이상 의미가 없죠. 지나칠 때 보여도 너는 그냥 벽장일뿐.  과거에는 그냥 벽장이 아니었는데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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