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남영동 1985는 지난 주쯤 봤습니다. 사실 정지영 감독의 연출만 따로 놓고 보면 썩 좋은지 모르겠더군요. 특히 환상 장면들은 너무 촌스러웠어요. 청룡에서 감독상을 받던데, '부러진 화살'의 연출은 좀 달랐나 모르겠네요.

그런데 그 연출이 이 소재에 엮이니까 묘한 힘이 있습니다. 고문의 현장, 고통받는 사람, 고문하는 사람, 바로 그 자리에서 일상을 이야기하는 이들, 이 모든 것을 직시하는 시선은 그 자체로 힘이 느껴졌어요. 게다가 촌스러움이 대놓고 묻어나는 부분들조차도 어느 순간부터는, 가까운 과거임에도 마치 오래된 과거인 양 꺼내놓기를 꺼리는 그 시절의 이야기 위에 쌓인 대중의 무의식 속 더께를 형상화한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고문의 장소에서 자신들의 연애, 가족, 스포츠 등을 이야기하며 서로를 직장 내 직책으로 부르던 그들은 곧 그 과거를 딛고 서서도 스스로의 일상에 바쁜 저, 혹은 우리를 비추는 거울 같아 찔리기도 했고요.

정지영 감독의 차기작을 극장 가서 또 보게 될지는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 영화는 좋았습니다.


2.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 영국 락앤롤 아레나 실황도 극장에서 봤습니다. JCS를 처음 보는 거라, 앤드류 로이드 웨버의 유명한 작품 중 하나이기도 하니 기대를 꽤 하고 갔는데 크게 실망했습니다.

노래는 좋았는데 내용이 심하게 유치하네요. 나름 현대 배경으로 각색했던데 그닥 정성들인 재해석이 아닌 대충 주요 요소들만 몇 개 일대일 대체시켜 놓은 수준입니다. 그런데 그마저도 성경의 큰 사건들을 그대로 살리는 전개와 종종 충돌을 일으켜 개연성이 그냥 안드로메다로 날아가버리더라고요. 전체적으로 전개가 빠르면서 작품 자체도 가벼운데, 가사와 연출은 또 어찌나 무게를 잡던지, 솔직히 오글거려서 혼났습니다.


3. 테이크쉘터, 세션, 홀리모터스는 어제 씨네큐브에서 봤습니다.

테이크쉘터는 정말 좋았습니다. 가정의 가장으로서의 역할에 강박을 느끼고 있는 주인공이 딸의 청각 장애로 인해 그 스트레스가 극심해지는데, 이러한 상황이 불길한 꿈들과 연계되어 세계 종말 분위기로 흘러갑니다. 그 자체로 하나의 훌륭한 은유인데, 영화는 꿈의 강도를 더하는 한 편 주인공의 과거에 대한 정보를 흘리며 주인공이 미친 건지 아니면 그 꿈이 정말 예지몽인지 관객조차 헷갈리게 하며 재미를 더합니다. 주인공의 상황은 점점 악화되고, 연출, 음악 등은 점차 관객을 옥죄어 옵니다. 관객 입장에선 답답해 미칠 노릇인데 계속 집중하게 되죠. 정말 재미있게 봤어요.

사회로부터 주어진 가정 내의 역할에 짓눌린 인물의 신경증이 종말론적인 분위기와 엮인다는 점에서, 동시에 자신의 가정이 사회가 강요하는 '온전한 형태'로부터 벗어나리라는 주인공의 공포가 대재앙과 동일시된다는 점에서, 주인공 커티스가 '멜랑콜리아'의 클레어와 겹쳐 보이기도 하더군요.


4. 세션은 생각보다 밋밋했어요. 기대를 너무 많이 한 탓인가 봅니다. 무거운 소재를 소소하고 유쾌하게 그려낸 미덕은 있습니다만, 딱 거기까지였습니다. 그냥 딱 선댄스 느낌... 평이 워낙 좋아서 전 그 이상일 줄 알았어요ㅜㅜ


5. 홀리 모터스는 정말정말 좋더라고요. 영화 초장부터 레오 까락스가 등장해 영화 앞에 심드렁해진 관객을 내려다 보는 장면이 나오면서, 대놓고 그가 요즈음 관객들에게 던지는 메시지임을 강조하더군요.

필름에서 디지털로 포맷이 변화하면서 영화 만들기가 손쉬워지고, CG가 배우-카메라-감독-관객의 관계 사이에 과도하게 개입하기 시작하면서, 관객이 필름 영화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심미안을 점점 잃어간다고 까락스는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Holy motors라는 제목,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의 배치로 리무진과 필름 카메라 혹은 영사기를 동일시해 놓고, 영화 내내 리무진과 바깥 세상을 오가며 수많은 연기로 수많은 영화를 만드는 주인공의 여정을 따라가면서, 영화 속 영화와 현실의 경계, 나아가 '홀리 모터스'라는 영화와 그 밖 현실의 경계까지 무너뜨리며 영화가 줄 수 있는 성스러운 아름다움을 온전히 관객에게 전달하려는 영화입니다.

적어도 지금으로서는, 홀리 모터스가 올 하반기에 본 영화 중 제일 좋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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