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의 이불킥과 아지랑이

2022.05.03 03:34

kona 조회 수:336


지난 주말 본가에 다녀왔습니다.
원래 목적은 코로나 시국의 일손 부족한 본가의
농삿일을 돕는 데 있었습니다만.
자식들을 아끼시는 어버이의 하해와 같은 은혜 덕으로
육신의 수고로움은 내려놓고 먹고 또 먹고 왔습니다. 하하;;;

지척에 계신 할머니를 비롯한 친지까지 뵙고
오후 느지막히 본가에 도착, 차에서 짐을 빼고 있었습니다.
대로 근처였지만 한창 농사철 오후라 근처를 지나는 차도 
사람도 없었지요.
1박 2일 간 사육(?)식을 엄청 먹은 탓에 배속이 너무 빵빵해져
가스가 가득 차 있었습니다. 
때마침 사람도 차도 없는 틈을 타 가스를 마음 놓고
분출(?!)하고 고개를 들어 조수석 문을 닫으려는 찰나,
반대편 지나가는 탑차 운전자와 눈이 마주쳤습니다.
운전자가 제 쪽을 보며 웃더군요.
순간 속으로 이면도로라 반대쪽까지 소리가 들렸나
아, 뭐 팔리는군 하며 시선을 거두려는데, 그쪽에서 웃으며 계속 저를 봅니다.
뭔갈 말하려 하는 표정으로요.
길이라도 물으려는 건가 싶어 저도 상대를 쳐다봤지요.
그는 연신 함박웃음을 지으며 제 쪽을 보고 있었지요.
저는 뚱한 표정으로 상대를 응시하고 있었고요.
대략 20초에서 30초 정도였던 거 같은데요.
그는 제가 아무 말 없이 멀뚱히 있으니 이윽고 고개를 돌리고는
도리질을 치며 알듯 모를 듯한 웃음을 보이며 지나가더군요.
별 이상한 인간이 다 있네 하며 집 안으로 들어섰습니다.

그러다 불현듯 한 사람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그는 제 초,중등 동기였어요.
동창이었지만 이름과 얼굴만 알 뿐 친한 사인 아니지요.
하지만 우린 둘만 공유하는 시간의 한자락이 있어요.

녀석에 대한 제 인상은 중학교 입학 후 같은 반이 된 후 결정 되었어요.
좀 더럽고 거칠고 통제할 수 없는 문제아(?)에 가까운 말썽쟁이란 인식이었지요.
다른 아이들의 분위기 또한 저와 비슷했죠.
친하게 지내는 친구도 없는 듯 했죠.
사실 이런 인식은 그 아이 잘못이 아니었죠.
1년 중 360일은 알콜과 동고동락하던 녀석의 아버지 때문이었지요.
술이 과해지면 가재도구를 부수고 가족들을 못살게 굴던 분이었지요.
그 희생양 중 하나가 녀석이었고요.
그렇다면 저는...
왕따(은따+@)였죠.
야마다 에이미의 풍장의 교실에 나오는 모토미야보단 나았지만
돌이켜 생각하면 무슨 차이가 있었나 싶습니다.
그렇지만..
비록 저는 왕따였지만 성적은 상위권이어서 교사들에겐 이쁨 받는 학생이었습니다.
당시 저희반 담임은 외지에서 온 젊은 여교사였는데 
저를 많이 예뻐해주셔서 동기들 안에서 섬처럼 동떨어져 있는 제겐 구원자셨죠.
뒤에 생각하니 상냥하고 친절했지만 약간 공주과(?)였던 분으로 기억합니다.
후일담으로 본인이 담임을 맡지 않은 반(경쟁반)과의 성적 경쟁에 신경을 많이 쓰셨다 카더라는..
어쨌든 호르몬 왕성하고 또래문화에서 밀쳐지기 싫어하는 남자애들의 만만한 먹잇감이었던 저는
재수 없단 소리를 거의 일년 내내 듣고 지냈던 거 같아요.
여자애들과는 요단강만큼 널찍한 거리가 있었고요.
몇 십년이 흘렀지만 제 짝이 된,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저에게 재수 없다고 갖은 모욕을 퍼붓던
동창의 이름을 기억합니다.
물론 복수하겠다느니 하는 쓸 데 없는 생각 따윈 하지 않아요.
학년이 바뀌고 졸업한 후에 제 짝이었던 그 앤 먼지보다 존재감이 없어졌으니까요.
아무튼 소외와 고립을 온 몸으로 감당하던 시절, 그럼에도 굴하지 않던 강철 같은 의지는 있었던 날들이 
이어지던 어느 날의 종례 시간이었어요. 
담임 선생님이 이 말썽쟁이 녀석을 연단으로 불러 냈어요.
그리곤 뜬금 없이 노래를 시키는 겁니다.
저는 쓸 데 없이 집에 갈 시간만 늦추게 만드는 거지 라는 생각에 심드렁한 듯 삐딱하게 앉아 있었지요.
그런데 녀석이 부르는 한 음절의 가사가 끝나기도 전에 저는 자세를 고쳐 앉게 되었습니다.
뜻밖에도 매우 아름다운 녀석의 노래에 저는 단번에 매혹 되었지요.
네, 정말 청아하고 해사한, 더할 나위 없이 깨끗하고 어여쁜 목소리에 취해  
전 잠시 나마 천국 가까이 앉아 있었던 듯 했어요.
건전가요의 대명사가 된 그 노래, 원곡 가수의 노래에 일절 감흥을 못 느끼던 제게(지금까지도)
녀석의 노래는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교실 안은 그 아이의 노래가 내뿜는 청량함으로 가득 찼고 저 뿐 아니라 다른 아이들도 
그 순간 만큼은 모두 한마음으로 경청하고 있음이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우연히 녀석과 저는 종례 후 둘 만 교실에 남았다가 뜻하지 않게 말을 섞게(?) 됩니다.
청아한 녀석의 음색에 제 맘이 열려 있었고 그 아인 얘기하고 싶었겠죠.
욕설, 비속어 아닌 일상의 언어로 감정을 전달하는 경험이 고팠던 거죠.
무슨 주제로 얘길 나눴는지는 너무 오래 전 일이라 기억 나지 않아요.
수십 년 전 일이니까요.
아무튼 그 날의 기억은 서로에게 좋은 기억이긴 했습니다.
그렇지만 의미는 좀 달랐던 듯 해요.
저는 왕따였지만 그 날의 대화를 친밀함으로 발전시키고 싶진 않았어요.
왕따끼리 친한 게 무슨 의미냐는 오만함이었지요.
그 아인 달랐나 봅니다.
그 날의 대화 이후로 녀석은 제게 친밀감을 표시했지만 저는 냉랭했지요.
학년이 올라가고 반이 갈리고 녀석과 저는 접점이 없어졌지요.
중학교 졸업 후 같은 지역에 남았던 저와 달리 녀석은 다른 고등학교로 진학했어요.
그 후 고등학교 때 한 번 정도(그 때도 그는 친근한 태도였어요) 마주친 후 녀석을 마주치는 일은 없었어요.

그런데 이상한 건 말입니다.
제가 우울의 바닥을 찍을 때 문득문득 그 아이 생각이 난다는 거예요.
그리고 우울하지 않을 때 생각날 적엔 제발 그 아이가 잘 살고 있길,
잘 되길 바라고 있었죠.
지나간 주말의 녀석은 제가 바라던 모습은 아니었지만...
그의 표정에서 짐작하건대 잘 지내는 듯 보였고
제게 보낸 환한 얼굴로 보건대 적어도 삶 속에 뿌리 내리고 있는 듯 보였습니다.

녀석의 미소는 지금의 제게 작은 빛으로 다가왔어요.
정말로 오랜 만에 대가 없는 호의의 얼굴을 봤으니까요.
어떤 이해 관계 없이 추억 한자락으로 저는 간만에 진솔했던 그 오후의 말갛던 소녀를 
떠올릴 수 있었어요.

아마 한 평생 말하거나 물어볼 일은 없겠지만...
그 친구에게 해주고 싶고 물어보고 싶은 얘기가 있습니다.
그 때 너의 노래가 참 아름다웠고 네가 부른 그 노래를 너 만큼 부르는 이를 누구도 보지 못 했다고.
지금도 노래하고 있냐고... 
(혹시나 싶어서 유튜브에서 니 이름으로 검색도 해봤다고...)
적어도 아끼는 사람에게 네 아름다운 목소리를 들려줬으면 좋겠다고.

네가 잘 지낸다면 좋은 일이네, 나도 잘 지낸다 라는 로마인들의 인사를 하고 싶지만..
사실 나는 잘 못 지낸다.
건강이 꽤 나빠져서 좋아하진 않지만 적잖은 위로를 주는 술은 완전히 끊어야 할 듯 하고.
아끼는 이들에게 짐짝 같은 존재가 된 건 아닌가 하는 자책에 잠 못 이루는 날이 많다고.
하지만 이 모든 건 공중에 흩어질 말들이고.
그냥 네가 잘 살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나도 잘 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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