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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반부를 보면서는 조금 당황스러웠습니다. 듀나님은 트위터에서 파인딩 포레스터를 언급하시던데 전 여인의 향기가 너무 많이 떠올랐거든요. 주인공 한지우가 시험문제 유출 사건의 용의자로 몰리자 이학성이 연단에 올라가서 일갈을 하고 진범을 꾸짖으면서 한지우를 구해주는 장면은 알 파치노의 후하! 를 떠올리게 했습니다. 사회적으로 고립된 중년 남성이, 마음 여린 가난한 남학생과 친구가 되고, 그 다음에 그 학생의 퇴학과 관련된 문제를 해결해준다는 이 구도는 여인의 향기 그대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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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퍼런스를 따온 작품들은 특정 장면만을 끼워넣기 때문에 원본만큼의 카타르시스를 끌어내지 못합니다.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 역시 같은 약점을 갖고 있습니다. 이 영화의 레퍼런스인 여인의 향기에서 프랭크(알 파치노)가 찰리를 구해내는 그 장면이 감동적인 이유는 단순히 알 파치노의 카리스마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 장면의 감동은 여태 사회적으로 고립되어있던 중년 남성이 세상 밖으로 나와서, 자신을 구해준 어린 친구에게 은혜를 갚는다는 맥락이 깔려있기 때문입니다. 프랭크가 뉴욕 여행을 마치고 마지막으로 자살을 하려 할 때 찰리가 그걸 말립니다. 탱고는 넘어지는 실수 자체가 춤이 된다는 프랭크의 말을 그대로 인용하면서 프랭크의 절망을 물리치죠. 이 자살의 위기를 어린 친구덕에 극복하면서 프랭크는 자신의 회한 뿐인 인생을 그대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리고 프랭크가 느닷없이 찰리의 학교에 등장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 히어로이즘을 괴짜 아저씨의 성장과, 세대 차이를 극복한 우정으로 연결해서 보게 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프랭크의 연설이 외부적 조건에 기대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이 학교의 교사나 학생들은 그가 정확히 누구인지도 모릅니다. 쌩뚱맞게 튀어나온 어떤 아저씨죠. 프랭크는 '학생에게 밀고를 하도록 어른이 협박을 하는 게 과연 온당한 일인가'라는 정론을 펼칩니다. 이 연설은 어른의 위선을 고발하는 도덕적인 힘을 갖고 있습니다. 동시에 비겁을 고발하는 그 연설의 형식이 중간중간 F word를 섞어쓰며 거칠게 연설을 하는 알 파치노의 연기스타일과 섞여서 나옵니다. 무엇보다도 이 연설 자체는 극 중 프랭크의 캐릭터를 가져온다는 점에 의의가 있습니다. 늘 자기중심적이고 오만하고 자아도취에 젖어있는 아저씨였지만, 그런 캐릭터가 뒤집어보면 남들의 질타를 신경쓰지 않고 자신의 신념을 확고히 펼치는 그런 일장일단의 양면이 되는 거죠. 여태 민폐만 끼치고 남들 보기 낯부끄럽던 그 자기중심성이, 위기의 순간에는 많은 대중을 꾸짖는 오래 산 사람의 에토스로 돌변합니다. 연설 중간중간에 자신의 어리석음을 뉘우치는 내용 또한 강한 감정적 울림을 줍니다. 나는 이렇게 약하고 어리석게 살아왔지만 이 젊은 청년의 미래까지도 그렇게 망가트릴 필요는 없지 않겠냐고.


그에 반해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에서 이학성의 힘은 너무나 약합니다. 이건 배우의 문제가 아니라 애시당초 캐릭터가 유명한 수학자라는 권위에 기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학성이 등장할 때 사람들은 그를 리먼 가설을 풀어낸 수학자로 인식합니다. 대단하신 분께서 몸소 납셔서 이야기를 한다는 이 구도에서 인간적인 관계는 휘발되고 권위에 의한 일방적인 구조만이 작동합니다. 알고 보니 찐 수학천재였다, 라는 이 일종의 사이다썰 같은 이야기에서는 배우의 열연도 힘을 잃습니다. 모든 걸 포기하고 잠적하려다가 다시 등장한 이학성에게 인간적인 연민은 느껴지지만 레퍼런스만큼의 시원함은 없습니다. 너무 적나라하게 악역으로 등장하는 담임선생의 캐릭터도 이학성의 연설을 단순한 증언처럼 휘발시킵니다. 


그래도 어찌저찌 드라마의 동력을 갖추고 흘러가던 영화가 노골적인 베끼기로 클라이맥스에서 힘을 다 잃어버리는 걸 보면서 좀 안타까웠습니다. 롯데시네마는 왜 조금만 손대면 괜찮을 작품을 이렇게 안전한 베끼기 형식으로 만들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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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이 영화에 낙제점을 주고 싶지 않았던 건, 사회적 약자들을 주인공으로 삼고 있는, 시야의 출발점 때문입니다. 이 영화의 장점은 소재 그 자체에서 나옵니다. 주인공인 한지우는 사회적 배려 대상자 학생이고 이학성은 탈북자입니다. 이 사회적 배경을 뺀다면 이 영화의 드라마적인 힘은 전혀 발휘되지 못할 것입니다. 신비의 수학고수 경비원과 단순한 낙제생은 서로 엮일만한 접점은 크게 없을테니까요. 이 영화의 시작점, 이학성이 한지우의 시험문제를 다 풀어놨던 장면에서 우리는 이학성이 왜 굳이 그런 오지랍을 펼쳤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수학자로서 전혀 인정받지 못하고 숨어살아야만하는 그가 몰래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고 싶었던 것이겠지요. 왜 이학성은 한지우를 그렇게 가르치는 것일까. 그의 수학적 욕망이, 탈북자라는 사회적 입장 때문에 발휘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물론 이 부분을 영화가 조금 더 깊이 파고 들어갔다면 좋았겠지만 영화는 한발짝 멈추고 안전한 노선을 선택합니다.


어쩌면 넷플릭스의 시대라서 제가 이 영화의 따뜻함을 더 좋아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인간은 사실 악하고, 그나마 양심이 있는 악당과 진짜 악당들의 혈투만을 그리는 그 위악적인 세계관들이 지겨워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물론 이 영화가 탈북자나 사회적 배려 대상자를 아주 진지하게 다루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초인들의 세계에서 약자들이 힘을 합쳐 뭔가를 이뤄내는 이야기는 그 자체로 기분이 좋습니다. 그 과정에서 생기는 계급적 불평등과 반칙을 주시하는 것도 좋구요.


여러모로 아쉽습니다. '빨갱이', 자본주의의 모순, 부유계층의 불공정한 입시 혜택, 입시 중심의 주입식 교육을 꼬집으며 그저 순수하게 수학 실력이 향상되는 이야기로 풀고 나갔다면 조금 더 차가우면서도 진득한 이야기가 되지 않았을지요. 물론 이 모든 게 관객으로서의 사후약방문이니... 무엇보다 아쉬웠던 것은 수학적 사고를 강조하는 이 영화가, 정작 이야기를 풀어내가는 방식은 지극히 권위적이고 슈퍼스타의 한방에 모든 걸 기대한다는 점입니다. 수학적으로 인생을 증명하는 이야기였다면 참 좋았겠지만 제가 너무 많은 걸 기대했던 걸지도 모르겠네요. 그럼에도 인간적인 온정이 깔려있어서 좋았습니다. 오랜만에 최민식을 보는 것도 좋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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