룸 룸

2024.01.12 13:40

돌도끼 조회 수:185

제목을 두번 반복해서 쓴 건 제목이 한 글자면 나중에라도 뭔가 불합리한 일이 생길것 같아서...(모 포커선수와는 관련 없습니다)



브라이언 모리어티는 컴퓨터를 처음 장만한 후 한동안 인포컴의 어드벤처 게임에 빠져있었습니다. 이렇게 훌륭한 게임을 만든 사람/회사를 동경하게 되었던 모리어티는 훗날 인포컴에 입사했고, 거기서 몇편의 명작 개발에 참여했습니다.

인포컴은 그래픽 어드벤처가 대세가 된 이후로도 꿋꿋이 순수 텍스트 어드벤처(그림이 전혀 혹은 거의 안나오는 게임)를 고집했던 몇 안되는 회사들중 하나입니다. 시에라가 그래픽 어드벤처를 창시하기 이전부터 인포컴은 어드벤처 장르를 대표하는 회사였기 땜에 텍스트 어드벤처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죠. 하지만 80년대 말쯤 되면 결국은 버티기 어려운 상황에 몰리게 됩니다.

회사 사정이 팍팍해지면서 사내 분위기가 예전과 같지 않음을 느끼고 있던 모리어티에게 게임 개발자 모임에서 만난 루카스필름 게임스의 디자이너가 접근했고, 꼬임("우리 회사에 가면 쉬는 시간에 스타워즈 영화 촬영에 썼던 진짜 모형을 갖고 놀 수 있어요~~")에 넘어간 모리어티는 88년 루카스로 이적했습니다.(인포컴은 그 후에 액티비전 자회사가 되어서 그래픽 어드벤처를 개발하게 됩니다.)
인포컴에서 텍스트 위주의 게임만 만들었던 모리어티는 루카스의 최신 게임엔진 SCUMM을 접하게 되고, 처음으로 그래픽 어드벤처를 만들게됩니다.

이왕 새 회사에 온 거 전에 안해본 걸 해봐야겠다 생각중이던 모리아티는 어느날 잡지를 보다가 우연히 보게된 'LOOM'이라는 단어의 어감에 꽃입니다. 'loom'이 직조기계이니 거기서 직조공들의 모임을 떠올리고, 그밖에도 어감이 비슷한 'doom'이라든가 'gloom'이든가 하는 단어들을 계속 떠올려 연쇄적으로 연상되는 것들을 늘여갔습니다.
놀랍게도 게임 '룸'의 세계는 이렇게 'loom'이라는 단어 하나에서 시작했다고 합니다.

80년대에는 컴퓨터 게임 시장이 그렇게 크지 않았고 컴퓨터 게임 회사들도 매니아계층을 메인 타겟으로 게임을 만들게 되다보니 게임이 점점 더 어려워지고 복잡해지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모리어티는 인포컴 시절에 고객들에게서 받았던 피드백을 떠올렸는데, 인포컴의 수많은 걸작들을 제치고 듣보잡에 가까운 게임이 의외로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았았다는 거, 사람들은 명작이라고 소문난 게임 보다는 끝까지 갈수 있었던 게임을 더 선호한다는 거였습니다. 인포컴 게임은 어려운 걸로도 유명했거든요.

모리어티는 그때까지 만들었던 복잡하고 어려운것 보다는 더 심플하고 쉬운 게임을 만들어보기로 합니다. 어드벤처가 어려워서 시도하지 못하고 있던 사람들도 가벼운 마음으로 접근할 수 있도록.

SCUMM의 포인트앤클릭 체제는 당시로서는 가장 심플하고 쉬운 인터페이스였지만 모리아티는 그보다도 더 단순한 인터페이스를 구상합니다.
룸의 세계관이 단어의 어감에서 시작했던 것에 걸맞게 게임의 진행은 소리-음계로 하게됩니다. 처음엔 딱 네개의 음계만 사용하려 했다는데, 게임이 점점 구체적으로 다듬어지는 동안에 그걸로는 모자라다 싶었던지 점점 늘이다가 결국엔 7음을 다 사용하게 되고, 게임 시작할 때는 네개의 음계만 쓰다가 점점 레벨업해서 사용할수 있는 음을 하나씩 늘여가는 방식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세계 최초로?, 음악을 인터페이스로 쓰는 게임이 탄생했습니다. 너무 유니크했던지 아직도 두번째는 없는 것 같지만요ㅎㅎ

게임의 그래픽은 마크 페라리(게임의 박스아트도 담당)를 필두로 루카스의 미술팀들이 16색 EGA 화면에서 최상의 결과를 뽑아낼 수 있도록 단순하게 선과 면 위주로 구성된 배경을 만들어냅니다. 심플함의 미학이죠. 나중에 거기다 그라뎨션을 집어넣은 256 컬러 버전도 나오지만 그게 오히려 보기 싫다는 의견도 있어요(저도 동의합니다.)

음악은 조지 생어가 맡았고, 게임용으로 음악을 새로 만들기 보다는 차이코프스키 백조의 호수에서 발췌한 음악들을 편곡해서 썼습니다. 이게 게임에 찰떡같이 들어맞아서 마치 게임을 위해 만들어진 음악들 같았죠. 클래식에 딱히 관심이 없는 사람은 백조의 호수라고 해도 그 유명한 간판 멜로디 말고는 잘 모르니까, 룸의 음악이 오리지날 게임음악인 줄 아는 사람도 꽤 있었습니다.

90년에 출시된 룸은 상당한 호평과 함께 흥행에도 성공합니다.

게임의 볼륨이 작다 내지는 너무 짧다는 걸 단점으로 든 사람들도 있었지만, 사실은 이 게임의 볼륨이나 스토리는 그때까지의 다른 어드벤처 게임들에 비해 그렇게 부족하지는 않았어요.
대체로 어드벤처 게임이란 게 같은 장소 몇군데를 계속 뺑뺑이 돌리면서 반복적인 일을 시키거나 미로에서 사람 헤매게 만들거나 악랄한 난이도의 퍼즐로 시간을 끌어 부족한 볼륨을 감추는 게 상투적 수법이었지만 룸은 쉬워서 컨텐츠를 소진하는 속도가 좀 빨랐던 거죠.

쉽기 때문에 이 게임을 좋아한 사람들도 아주 많았습니다. 당시 어드벤처 하면 소수의 하드코어 팬들을 뺀 나머지에겐 '공략집 없이는 할 수 없는 게임'이었거든요. 공략집/힌트 판매가 어드벤처 제작사들에게는 무시할수 없는 수입원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룸은 공략없이 자력으로만 깼다는 사람들이 많고, 꽤 많은 사람들에게 공략/힌트 안보고 끝까지 간 유일한 어드벤처 게임이었기도 했습니다. 그런 게임은 평생 기억에 남을 수밖에 없잖아요. 모리어티의 전략이 성공한 거죠.

무척 아름다운 게임이었다는 것도 기억에 남을 요소였죠. 단순하지만 아름다웠던 그래픽에 미스테리어스하면서 매력적이었던 스토리, 차이코프스키 음악이야 두말할 것도 없고, 그리고 엔딩도 아름다웠어요.

모리어티는 게임에 등장했던 조연들이 각각 주연으로 나오는 두편의 속편을 구상했었지만(삼부작은 국룰이니까요), 루카스가 명성에 비해서는 굉장히 작은 회사라서요. 당시에 루카스는 원숭이섬, 인디아나 존스 속편 만드느라 바빠 일손이 부족했고, 곧이어서 스필버그가 참여하는 대작, 디그 프로젝트를 모리어티가 맡으면서 아무도 룸 속편 만드는데 신경을 못썼습니다. 디그도 출시되기까지 몇년간을 개발지옥에서 굴렀던 프로젝트라서, 몇번의 제작 리셋을 겪다보니 모리아티는 디그 프로젝트에서도 빠지고 얼마후 루카스를 퇴사합니다. 그래서 결국 룸 속편들은 구상만 한 단계에서 끝났습니다.




일본 후지츠에서 FM 타운스 컴퓨터를 만들면서 (업계 1위이던) NEC에 비하면 딸리는 소프트웨어 풀을 메꾸려고 적극적으로 해외 게임의 영입을 시도했어요. 그래서 루카스도 FM 타운스용 게임을 여럿 만들게 되었는데, FM 타운스는 세계 최초로 CD롬을 표준장비로 장착한 컴퓨터였습니다. 하드도 플로피도, 심지어 키보드도 없어도 CD와 패드만 있으면 컴퓨터를 돌릴 수 있는 특이한 물건이었죠. 그래서 FM 타운스 컨버전은 미쿸 게임 업체들에게 CD라는 매체를 어떻게 쓸지 연구해보는 훌륭한 연습장이 되었습니다. 아직 미국 컴퓨터에 CD가 보급되기 몇년 전에요.

룸도 FM 타운스 버전으로 나왔습니다. 그래픽이 256 컬러로 업그레이드 되고(그치만 앞서 말했듯이 EGA 16컬러 맞춤으로 짜여진 그림이라 이게 꼭 좋은쪽의 변화라고는 생각 안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음악이 CD 오디오로 대체되고, 음향효과도 많이 추가되었습니다.(오리지날 버전은 음악 외의 사운드는 거의 안나오는 무성영화에 가까운 게임...)
그래서 지금도 이 버전이 최고다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다수죠.

글고서는 타운스로 연습한 걸 바탕으로 IBM CD 버전도 선보이게 되는데, 여기서 루카스는 다시 새로운 시도를 합니다. 루카스 어드벤처 최초의 풀음성지원! 그치만, 당시는 아직 사블이 널리 보급되기 전이었고, 사블의 가능성을 간과한 루카스는 무리수를 둡니다. 게임의 모든 사운드(음악+효과음+대사)를 전부 CD 오디오로 집어넣은 거예요.
아무리 CD가 당시에 꿈의 대용량 매체였다지만, 오디오 CD로 쓴다면 그냥 한시간짜리예요. 그 안에 어드벤처 게임 한편의 모든 소리를 다 넣을 수 있을...택이 없잖아요.
그래서, 게임의 그래픽, 이벤트, 컷신등이 대거 축약/삭제되고 대사는 짧게 다시 썼습니다.(대사 새로 쓰는 일을 오슨 스캇 카드가 했다고...) 그렇게 CD 한장에 꾸역꾸역 집어넣다보니 게임이 다이제스트판이 되어버렸습니다. 사운드카드를 써서 PCM 데이터를 줄였다거나, CD 장수를 늘였더라면(그건 당시로서는 무리였겠지만...) 다이제스트판이 되는 화는 면했을 수도 있겠죠.

이 CD 버전은 모리어티 본인이 훗날 ABOMINABLE이라고 표현한 물건입니다.


근데...  CD롬 버전에 들어간 음성연기가 꽤 괜찮거든요. 그시기 게임들은 나왔던 당시에는 걍 컴터에서 사람 목소리가 나온다고 와~ㅇ 신기하다 이러고 좋아라고 했다가 나~중에 다시 해보면 발연기 때문에 게임의 이미지가 엉망이 되는 경우가 꽤 많은데 룸을 비롯해 루카스의 음성연기는 지금 들어도 게임 분위기를 망칠만한 건 없죠. 글고 오리지날 버전에 포함되어 있던 오디오 드라마와도 연결성이 있으니... 이 CD 롬 버전은 안해보기엔 또 서운한 면이 있습니다.
그니까 뭐... CD롬 버전만 해보고 "나 룸 해봤다" 하긴 좀 민망한 일이지만... 게임을 제대로 해보려면 일단 오리지날 버전으로 해본 다음에 다른 매체로 각색된 버전이라 생각하고 CD롬 버전을 다시 해보는 것도...ㅎㅎ




-scummvm에서 재미난 짓을 벌였는데, 룸의 음악이 원래 백조의 호수에서 가져온 거니까 아예 백조의 호수 클래식 음반을 BGM용으로 쓸 수 있도록 만들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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