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경제대공황 시기쯤 해서 깡패영화가 유행을 했습니다. 어느 시대에나 마찬가지라고 해요. 사회가 불안하고 공권력에 대한 믿음이 떨어질 때면 깡패나 도적을 미화하는 이야기가 인기를 끈다고 합니다. 오래전부터 인기있었던 의적 이야기들도 그 비슷한 예이겠죠.
그렇게 대중적으로는 인기를 끈다고 해도 식자층들까지 곱게 보지는 않았습니다. 당시 미국 평론가들에게 갱영화는 까이고 무시당했다고 합니다.

시기가 좀 지나, 바다 건너 프랑스에서 미국 깡패영화를 다른 시선으로 보는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이들은 2차대전후 프랑스 영화계의 신예로 떠오른 사람들이었는데 어려서부터 미국산 깡패영화들을 재미나게 보고 자랐던 기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미국 평론가들은 무시했던 그 영화들 속에도 어떤 미학과 가치가 있다는 걸 발견합니다. 그분들은 그런 영화들을 필름 느와라고 불렀습니다. 프랑스말로 그냥 범죄영화라는 뜻이라나봐요.
미국인들 스스로는 놓치고있던 걸 프랑스 사람들이 발견한 거라서 국제적으로도 프랑스어를 쓰게되어 필름 느와라고 하면 20세기 중기쯤에 나왔던 미국 범죄영화들 혹은 그와 비슷한 경향을 지칭하는 말이 되었습니다.

미국 범죄영화를 재평가한 이 젊은 영화인들은 스스로도 범죄영화를 만들기 시작합니다. 장 피에르 멜밀같은 프랑스 범죄영화의 거장도 등장하게 됩니다.

60,70년대에 일본에서는 아랑 드롱(또는 알랭 들롱이요... 웬지 알랭 들롱이라고 쓰면 그다지 미남같이 느껴지지가 않아요ㅎㅎ)이 절대적인 인기를 끌었습니다. 드롱은 멜빌 영화를 비롯해 범죄영화를 많이 찍었고 당연히 일본에서도 이 영화들은 히트합니다. 일본사람들은 이런 프랑스 범죄영화들을 휘르무 노와르라고 불렀다나봐요.

film noir라는 말이 본국에서는 그냥 범죄영화, 미국에서는 프랑스인들이 재정의한 미국산 범죄영화, 일본에서는 프랑스제 범죄영화... 이렇게 다른 의미로 쓰였다는 거예요. 뭐 chef라는 말도 프랑스에서는 그냥 '長'이라는 의미지만 바깥으로 나가면 요리사라는 의미가 되니까, 같은 단어가 나라마다 다르게 쓰이는 경우야 흔하죠.

80년대에 홍콩에서는 [영웅본색]이라는 영화가 나와 영화계를 평정하고 판도 자체를 바꿔버립니다. 이 [영웅본색]은 계보를 따져보자면 '수호전' 같은 고전작품에서 보이는 중국인들의 협객상을 현대에 장철이라는 사람이 무협영화로 재창조했던 걸 그 제자인 오우삼이 이어받아 다시 배경만 현대로 바꾼, 협객들의 이야기였습니다. 협객이란 공권력을 무시하고 무력을 행사하는 사람이고, 현대에는 그런 사람들을 범죄자라고 부르죠. 예 범죄영화였습니다ㅎㅎ

70,80년대 일본에선 홍콩영화라고 하면 이소룡의 쿵후영화, 허관문의 코미디 영화, 글구 그 둘이 합쳐진 성룡의 쿵후코미디 영화가 다였습니다. 근데 [영웅본색]은 그중 어디에도 속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이 영화를 수입한 일본의 영화관계자들은 홍보하기가 난감했겠죠. 그런데 오우삼의 영화에서는 어딘가 익숙한 향기가 나는 겁니다. 장 피에르 멜빌. 멜빌 또한 빼놓을 수 없는 오우삼의 영화스승이죠.
'아... 이건 홍콩에서 만든 휘루무 노와르라고 하면 되겠구나.'
87년 초쯤부터 배포되기 시작한 [사나이들의 만가](영웅본색의 일본제목) 홍보물에서 '홍콩 노와르'라는 문구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일본에서 개봉한 후 조금 지나 [영웅본색]은 한국에서도 개봉이 됩니다. 개봉당시 홍보물을 보면 출연배우 이름이 '테이 론', '레스리 챤', '쵸 윤화'...등 일본식으로 표기가 되어있습니다. 캐릭터 소개도 '호' '마크', '신' 등 일본식으로 표기되어 있고요.(정작 영화 자막에는 송자호, 소마, 아성이라고 나오면서...) 뭐 그당시는 영화홍보도 일본에서 나온 걸 베껴 쓰는 걸 당연시한 시절이었으니까... 그러니까 '홍콩 느와르'란 말도 일본에서 홍보용으로 만들어진걸 한국에서도 그대로 쓴 걸로 보입니다.

[영웅본색]의 대히트로 홍콩 영화계 전체가 [영웅본색]의 아류작 양산에 들어갑니다. 그때가 홍콩 반환 발표가 난 뒤라서 홍콩 사람들이 불안감에 빠져있던 시기이고 거기에 [영웅본색]이 불을 붙이자 깡패미화영화들이 쏟아져나왔습니다. 이렇게 숱하게 나온 아류작들도 모두 홍콩 느와르라는 이름을 붙여 홍보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때부터 혼동이 시작됩니다. 이쯤 되면 한국에도 시네필들이 조금씩 생산되기 시작하던 시기라서 필름 느와의 개념을 어느정도 알게됩니다. 그래서 '홍콩 느와르'와 '필름 느와르'가 무슨 관계인지 궁금해하게 되었고 어떻게 매치시켜 보려했지만 이게 뭐 맞는 게 별로 없는겁니다. 사실상 두 장르는 어찌어찌하다 비슷한 이름이 붙었을 뿐 아예 뿌리가 달랐으니까요. 민심이 흉흉하던 시기에 히트한 범죄자미화영화라는 공통점은 있지만요.

그리고 결국엔 그렇게 매치시켜보려던 시도가 헛일이었다는 걸 알게됩니다. 이 홍콩 느와르라는 말이 서구권에서는 전혀 쓰이지 않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되거든요. 심지어 영화를 만든 홍콩 사람들조차 홍콩 느와라는 말을 들으면 '???'라는 반응을 보였다고 해요.

그래도 한국과 일본이 홍콩 영화시장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곳이었다 보니 이 한/일 두나라에서만 사용되었던 홍콩 느와르라는 개념은 나중에는 홍콩 사람들한테도 알려진 모양입니다. 아마도 홍콩 사람들 중에도 자기네 영화들이 왜 느와르라고 불렸을지 고민해본 사람들도 나온것 같고요. 홍콩 느와르의 연장선상에 있으면서도 진짜 필름 느와의 감성도 같이 끼얹어본 영화도 나왔습니다. [무간도]. 그래서 [무간도]야 말로 진정한 홍콩 느와르 1호다...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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