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듀숲] 듀게 때문에 망한 이야기

2012.09.26 04:15

aerts 조회 수:3678


제목 그대로 듀게 때문에 망한 이야기, 라고 하면 조금 과장이겠지만... 

그래도 대충 듀게 때문에 촉발된 이야기 정도는 되는 것 같아요. 


몇 년 전 다니던 직장을 그만둘 때 일어난 일이에요. 

5년 가까이 몸 담고 있었던 직장이었으니 당연히 그만두는 것이 쉽진 않았죠. 

그렇다고 다른 대안이 있었던 건 아닌데, 그냥 그만뒀어요. 

살면서 그럴 때가 있잖아요. 

아무튼. 


문제는 사직서를 제출하고 난 다음에 일어납니다. 

그간 별 문제없이 지냈던 팀장이 저한테 시비를 걸기 시작했어요. 

그렇다고 장난을 치는 것 같진 않고, 사람을 굉장히 기분 나쁘게 대하더라고요. 

처음에는 내가 그만둔다고 해서 짜증이 난 건가, 뭐 이렇게 생각하고 넘어가려 했는데

지속이 되니 어느 순간 저도 짜증이 나기 시작하더라고요. 

그래서 저 역시 비슷한 태도로 대하기 시작했죠. 

덕분에 애꿎은 팀원들만 싸늘한 분위기 속에서 업무를... 


그러던 어느 날, 한 후배 직원이 저에게 메신저로 듀게 링크를 보내줬어요. 

이게 뭐지, 하고 클릭했는데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듀나무숲 성의 게시물이었죠. 

어떤 직장인이 회사를 그만두며 느낀 소회를 털어놓는 글. 

이 친구가 왜 이걸 나한테 보여주지... 라며 읽는데

어라, 상황이 저랑 비슷한 거예요.

연차랄까 직장내에서의 상황이랄까... 

뭐, 그 나이 그 연차 직장인이 느끼는 심정이란게 비슷하게 마련이고 

미련을 가지면서도 그만둘 수밖에 없는 마음 또한 비슷할 수밖에 없을 테죠. 

그런데 문제는 그 분이 회사를 그만둔 결정적인 계기는 자신의 팀장 때문이었다는 것. 

그 분은 팀장의 무능함과 기타 등등을 듀나무숲에 걸맞게 토로하고 있었죠. 


저는 후배한테 물었어요. 

잘 봤다, 그런데 왜 이걸 나한테? 

그랬더니 후배가 되묻더군요. 

어라, 이거 선배가 쓴 거 아냐? 팀장이 나한테 보여줬는데. 


네. 

듀게를 애독하던 당시 팀장은 그 글을 보았고, 

그 글이 저라고 철썩같이 믿었던 거죠. 

모든 의문이 풀리는 순간. 


저는 조금 웃었던 거 같아요. 

이런저런 복잡한 심경이었죠. 

뭐야, 이런 것 때문이었어... 라는 생각도 들고. 

뭐야, 당신 이런 사람이었어... 라는 생각도. 


그렇지만 그건 풀 수 없는 오해였습니다. 

당연히 풀 수가 없죠. 

팀장한테 가서 A가 나한테 이거 보여줬는데 이거 나 아닙니다,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A가 팀장한테 가서 O 선배한테 보여줬는데 이거 선배 아니래요, 할 수도 없고. 

사실 그때쯤에는 오해를 풀고 싶은 마음도 없었습니다. 

저는 팀장이 왜 그러는지 알았고, 그걸로 됐죠. 

물론 팀장은 여전히 저를 여러모로 불편하게 했고, 

저도 지지않고 팀장을 불편하게 했습니다. 

어차피 그만두는 마당에... (먼산) 


아직도 기억나는 여러가지 일들이 많지만 몇 가지 적자면 

제 퇴사 보름 전에 후임자가 입사하기로 했는데 그 친구가 개인사정으로 제 퇴사 다음날 입사하기로 했어요.

그럼 인수인계는 어쩌지 하고 있는데 팀장 윗선에서 저를 불러 인수인계는 해야하니 퇴사를 보름만 늦추라고 했죠. 

저야 뭐, 회사 그만둔 후 다른 일정이 있었던 게 아니어서 알겠다고 했고. 

그런데 어느날 팀장이 부르더니 인수인계를 못하게 되었으니 문서로 작성해놓고 가라더군요. 

그래서 퇴사를 늦추기로 했다니 우리 회사에서 그런 일은 있을 수가 없-_-엉, 이라며 문서 작성을 고집. 

저도 당신이 굳이 그렇게 말하신다면, 하는 심정으로 그냥 문서 작성했어요. 

싸워가면서까지 퇴사를 늦춰 직접 인수인계를 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으니까요. 


제 퇴사 일주일 전에는 팀 회식이 있었죠. 

팀장이 팀원들 한명 한명에게 손수 메일을 보냈더라고요. 

오늘 회식은 몇 시에 어디다. 

O 한테는 이야기하지 말아라. 

물론 동료들은 저한테 이야기를 했고 저는 또 웃었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 팀원들 및 유관 부서 사람들에게 메일을 보냈죠. 

업무의 과다와 플로의 불합리성과 팀장의 무능함... 에 대해. 

인신공격은 아니었고 제가 느낀 부조리를 담담하게 적었어요. 

물론 팀장은 노발대발 했지만요. 

유치한 거 아는데, 그땐 그렇게 하고 싶더라고요. 

그게 옳은 일이라는 (지금 생각하면 역시 웃음이 나오는) 생각도 들고. 

아무튼 그렇게 회사를 나왔지요. 

다시 말하지만 이게 벌써 몇년 전. 


그동안 저는 프리랜서로 이런저런 일들을 해왔고

얼마 전에는 팀장이 여전히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는 전직장과 관련된 일을 하게 되었어요. 

자세하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 회사를 거쳐야만 가능한 어떤 일이었죠. 

아, 이렇게 말하면 되겠네요. 


(그냥 하나의 예일 뿐입니다) 

저를 시나리오 작가라고 하면요. 

다행히 PD와 감독이 붙어서 일이 진행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자, 그런데 투자를 받아야 해요. 

PD가 투자사에 찾아갑니다. 

실무자가 시나리오를 너무 좋게 봤어요. 

아 좋다고, 오케이만 떨어지면 당장이라도 투자하고 진행하고 싶다고. 

실무자가 팀장에게 시나리오를 보냅니다. 

그러자 팀장이 실무자를 부릅니다. 

야, 이거 O가 쓴 시나리오잖아. 나 이거 진행 못해. 


대충 이런 상황. 


팀장은 저를 아직도 미워하고 있었고, 

덕분에 제 첫번째 프로젝트는 제대로 엿을 먹게 되었죠. 


그렇게 저는 듀게 때문에 망하게 되었습... 이 아니라. 

기분이 나빴죠. 좀 많이. 

(혹시 이 글을 보고 있다면 축하드립니다. 성공하셨어요!)


그래서 복수의 칼날을 갈...려고 했으나 

그냥 그 칼로 지금 하는 일이나 잘하려고요. 


이런저런 핑계로 그동안 너무 놀았네요. 

듀게에 이 글을 올리는 것으로 아름다운 마무리를... 

뭐랄까 '혜자존니' 같은 느낌으로... 

그리고 나안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습니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우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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