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라서, 광주이므로.

2012.12.21 20:28

bogota 조회 수:1789

 

 

 

 저는 어렸을 때 5.18을 겪었습니다.

 '국민학교' 1학년이었죠. 

 학교를 가지 않는 날들이 계속되고, 잠을 잘 땐 이불을 쌓아 올려두고 잠을 잤습니다.

 할머니는 그 때 마침 전남대 병원에 입원해 계셨습니다.

 고립된 광주는 약이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약이 떨어져서 수술을 한 할머니가 돌아가실뻔 했습니다.

 공수부대가 쏜 총알이 병원 15층, 병실에 날아들어와 할머니 병구완하며 주무시고 계시던 삼촌이 총알에 맞아 돌아가실 뻔 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그 때 생애 처음으로, 병실 천장과 벽을 뚫고 바닥에 박혀있던 총알을 보았습니다. 

 비록 찌그러졌고 작았지만, 그 쇳덩어리는 사람을 죽일 수 있었던 총알이었습니다.   

  광주는 진압됐고, 외가에서 오랜만에 뵌 외할머니는 날 끌어안고 엉엉 우셨습니다.

 옆옆집 아저씨는 총알을 맞아 돌아가셨답니다. 

 옆옆집 아저씨, 날마다 반찬 사러 가는 가게 주인 아저씨였어요.

 

 

 차별을 차별이라 여기면서도 아무 소리 하지 않고 살았습니다.

 왜냐면 그 지역에서 태어났으므로, 그렇지만 살아야 했으니까요.

 전라도 빨갱이론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면접장에서 고향이 어디냐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가슴을 쿵쿵 거리면서 내색을 하지 않았습니다.

 전라도 광주이므로, 민주당에 아는 사람 좀 있느냐는 면접관의 질문에 그저 웃었습니다.

 당시 김대중 정권 시절이었습니다.

 네, 그런 면접관도 있었습니다.

 하우스 메이트를 구하는데, 그 친구의 어머님이 내가 전라도 출신이라 안된다고 했을 때도 그냥 웃어 넘겼습니다.

 친구는 미안해 했지만, 그게 친구 잘못도 친구 어머님 잘못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친구들과 영화관에서 함께 <화려한 휴가>를 보았습니다.

 모두 다 함께 5.18을 겪었던 우리는 영화 내내 내색 않고 영화를 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마지막 장면에서 집단적으로, 눈물을 펑펑 쏟아버렸습니다.

 시민군 이요원의, "광주 시민 여러분, 시민군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광주 시민 여러분, 도와주십시오" 라는 대사가 영화관에서 울려퍼졌거든요.

 네. 아스라하게 잊혀지던 어린 날의 기억이 저 영화 대사 한 줄로 인해 한 순간에 환기되더군요.

인간의 기억 중 가장 강력한 게 후각이라지만, 청각도 못지 않은 것 같습니다.

 엉엉 울고 있는 우리들 뒤에서, 어떤 아저씨가 화를 내며 소리쳤습니다.

 "저런 전라도 빨갱이 개XX들" 

 

 

 5년 전 일입니다.

 정권이 바뀌고 동향인 친구는 바로 좌천을 당했습니다.

 그 일 앞에서도  우리는 (동향 친구들) 놀라지 않았습니다.

 워낙 차별을 많이 받아와서 차별에 둔감해진 것이 아닙니다.

 이미 마음 속에서 예상을 하고 있었던 일이 일어났을 뿐이라고 애써 진정을 시키느라,

 그래도 또 살아야 했기에, 살아낼 방법을 찾느라 애를 썼던 겁니다.

 그렇게 5년을 또 살았습니다.

 정권이 바뀐다고 새로운 세상이 온다는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가슴이 두근 거릴 일이 줄어들거라는 기대는 했습니다.

 언제 무슨 일이 터질지 몰라 미리 겁을 내는 세상이 아니라,

 길 모퉁이를 돌아도 거기에는 그저 또 다른 길이 이어질 뿐,

 가슴 오그라들 일 없는 똑같은 세상이, 예측 가능한 세상이

 펼쳐지리라는 기대를 했습니다.

 

예측 가능한 세상,

 

 무슨 일이 터질지 몰라, 불안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그저 꿈꾸었을 뿐입니다.

 꼭 정권을 잡아야만 그런 세상이 온다고 믿는 거냐고 물으실지도 모르겠습니다.

 네, 꼭 그런 건 아닙니다.

 그러나, 영혼의 불안을 잠재우기에 새로운 정권은 너무나 두렵습니다. 

 이 두려움을 이겨내려면, 앞으로 5년을 어떻게 버텨야할까 생각을 하면서

 지난 이틀을 보냈습니다.

 역사 앞에서, 5년이란 시간은 아니 10년은 짧지요.

 그 10년이 지나고, 제 인생의 황금기가 지나고 나면,

 이 세상이 조금은 변화 될까요?

그런 기대를 할 수 있다면, 아니 반드시 그럴 수 있을거라 믿기에

 저는 오늘 듀게에 용기내어 이 글을 씁니다.

 

 실패와 패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 시간들이 또 쌓여 다른 변화들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그 시간들이 너무나 느리지만, 또 너무 많은 시간들이 필요하지만

 열망하는 한 변화할 것입니다.

 열망이 식지 않으면 됩니다.

 

 오늘 이틀만에 듀게에 들어와서 많은 글들을 읽었습니다.

 이틀 사이에 올라온 많은 글들을 읽은 결론은,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더 잘 할 수 있도록 더 열심히 살아야 겠구나.. 입니다. 

 그 생각을 위한 시작은 자기 고백에서 출발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래서 이 글을 썼습니다.

 예측가능한 사회, 언젠가는 오겠지요.

 포기하지 않는다면.  

 여러분들도, 부디 힘을 내주시기를요.

  

 

  긴 글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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