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드라마 같은 데 보면 임신부가 한밤중에 "XX먹고 싶어"라며 남편을 내보내는 장면이 있잖아요.

그런데 그 음식의 선정 기준이, 직접 임신을 해서 보니 신기한 데가 있습니다. 입맛이 추억을 찾아가더라고요.

임신 전에는 기억도 못 하던,어느 순간 어떤 상황에서 먹었던 어떤 음식이 주로 먹고 싶어지는 거예요.

무턱대고 단지 '맛있을 것 같아서' 간절해지는 음식보다는 추억과 연결된 음식이 갑자기 간절해지는 경우가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오늘 밤은 '로스구이햄' 도시락 반찬이 먹고 싶네요.

지금도 수퍼마켓 가면 팔지 모르겠는데, 백x햄에서 나왔던 것 같아요. 네모지고 크지 않은 모양에, 한가운데 '로스구이햄'이라고 쓰여 있었죠.

저희 엄마는 그걸 종종 도시락 반찬으로 싸주셨는데, 사각으로 썰어서 팬에 얇게 볶아서 담아주셨어요.

칼집 낸 소시지와 함께 제가 가장 좋아하는 반찬이었죠. 지금 생각해보면 몸에는 그닥 좋지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오늘 밤에 갑자기 그 반찬이 떠오르면서, 그와 함께 어떤 에피소드들이 떠올랐습니다.

바로 어린 날, '우리 엄마가 흉 잡히는 걸 참을 수 없었던 기억' 이에요.

저는 지금도 그렇지만 예전에는 더더욱 불효녀였고, 엄마한테 사근사근하지 않았으며 매번 투정만 부리곤 했습니다.

하지만 이 세가지 기억에서만큼은 '울 엄마는 그러치 아나!'를 외치면서 지켜드리고 싶었던 심청이 효심이 발동하곤 했어요.

(발동은 했는데 적극적으로 대처하지는 못했네요...)

 

 

1. 초등학교 3학년 때 도시락 반찬 사건.

앞서 말했듯 저희 엄마는 제가 소시지나 햄 반찬을 무척 좋아하는 걸 아셨기에 종종 그 반찬을 이용해서 도시락을 싸주셨어요.

제 기억에 오히려 어린 저는 엄마가 좀더 소시지 반찬을 자주 싸주셨으면 했지만,

소시지가 몸에 좋지 않은 것을 비롯한 여러 이유로 제가 바랬던 것보다 자주 싸주시진 않으셨어요.

 

그러던 어느 날 도시락 반찬을 여는데 소시지 반찬이 있길래 기분이 좋아서 포크로 푹 찍으려고 하는데

옆의 짝꿍 남자아이가 제 반찬을 흘긋 보더니 자기 옆의 다른 남자아이랑 "쟤네 엄마는 맨날 소시지만 싸줘 ㅋㅋㅋㅋ"하고 비웃는 거였습니다.

 

저는 뭐라고 대꾸도 못하고 잠자코 도시락을 먹었는데,

속으로 화가 나고 그 짝꿍 녀석이 싫어졌어요.

울 엄마가 뭘 맨날 소시지만 싸줘!!울 엄마 내가 싫어하는 김치랑 야채반찬 싸줄 때가 더 많은데!

소시지는 내가 먹고싶어하는 거라고! 니가 내가 소시지를 싸오든 뭘 싸오든 뭔 상관이야!울엄마 오히려 소시지반찬 싸주는거 싫어해!

....라고 생각했지만, 그냥 '생각만' 했지요.

 

그 짝꿍 녀석, 눈은 똥그랗고 입은 다람쥐같은 게 롯데월드 마스코트같이 생겨서 은근히 잘 봐주고 있었는데(?)

그 이후로 아오안 되었어요.

 

이와 비슷한 자매품 에피소드.

중 2때 지금까지 만나는 베프를 비롯한 많은 친구들과 함께 도시락을 먹었는데,

그 베프 친구가 때로 말을 거르지 않고 눈치없이 할 때가 있어요(예나 지금이나;;).

그런데 그 때 저희 엄마가 가장 많이 싸주시던 반찬은 참치통조림과 김치였거든요.

그리고 사실 엄마는 평소의 요리에는 담음새에 신경을 많이 쓰는 편이 아니셔서

칸막이도 제대로 안 하고 참치와 김치를 담아주시다 보니...그게 섞여서 점심 무렵쯤 되면 이상한 맛의 반찬이 되곤 했습니다.

어느날 그 같은 반찬을 보고 제 베프가 깔깔깔깔 웃으면서 "그거 말구유 같아!!!"라고 천진난만하게 소리쳤어요.

 

...이런 거 기억하는 제가 속좁은가요?

그래도 친구가 먹는 반찬보고 말구유라닛.

 

 

2. 초등학교 1학년 스승의 날, 하루 동안 엄마 교사를 모시기로 했어요.

자원을 받았는데, 저는 울 엄마 의사는 고려하지도 않고 저요 저요 손을 들었어요.

그래서 결국 저희 엄마가 나오시기로 하셨죠.

 

저희 엄마는 그때만 해도 곱슬곱슬한 긴 머리를 땋아다니고 청멜빵 원피스를 즐겨입으시곤 했어요(어떤 스타일이셨는지 감이 확-)

남들 앞에서 큰 소리로 무언가를 말한다거나 하는 일이 상상이 안 되는 스타일.

그런데도 꼬맹이 딸이 엄마가 일일 교사로 나가줘야 한다고, 이미 반 아이들 다 안다고 징징거리니까

더듬더듬 준비를 시작하셨어요.

 

아마 그때 기억으로, 스승의 날 엄마 교사분들이  1교시 정도를 맡아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야 하는 것 같았는데

엄마는 옛날이야기 하기를 준비하기로 하셨어요.

동화 두 편이었는데, 하나는 '하멜른의 피리부는 사나이' 였고, 또 하나는...기억이 안 나네요. 전래동화였는데.

견우직녀였나, 해님달님이었나...

아무튼 전래동화를 먼저 구연하고, 그다음에 '하멜른의 피리부는 사나이'를 하기로 하셨어요.

지금 생각해보면,나름 두 편 다 미스터리 구조(?)를 가진 동화였는데 말이에요...

아직도 기억이 납니다. 그때 저희 집에 친하게 드나들던 동네 언니들 앞에서, 동화 속 이런저런 동작을 취하고 목소리를 바꿔가며

구연을 하면서 "이거 괜찮니?" 하고 묻고 묻던 엄마의 모습.

 

 

아무튼, 스승의 날이 되었습니다.

엄마가 처음 들어왔을 때만 해도 반응이 괜찮았어요.

엄마는 먼저 정해진 대로 전래동화 이야기를 먼저 시작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하멜른의 피리부는 사나이'를 이어가셨어요.

그렇게 긴 시간이 걸리는 이야기들도 아니었는데...

엄마가 '하멜른'의 첫번째 클라이막스인,  피리부는 사나이가 피리를 불자 피리 소리에 홀린 하멜른 마을의 쥐들.

"쥐들이 이렇게 사나이를 좇아가기 시작했어요" 라면서 수백마리 쥐들이 뛰어 달려가는 동작을  열심히 재현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어느 녀석이

"에-재미 없어요!! 귀신 얘기 해주세요!"
라고 소리친 것을 필두로

"맞아요 재미 없어요! 에- 귀신 얘기 해주세요!!! 귀신 얘기!!!"

아이들이 일제히 함성을 질렀습니다.

 

반이 온통 아이들의 함성으로 가득차자

새댁 티를 아직도 덜 벗은 소심한 울 엄마는 어쩔 줄을 몰랐고,

곧이어 담임 선생님이 들어와 위엄 돋게 아이들을 꾸짖고 진정시키셨어요.

그리고는 놀라셨겠다고, 죄송하다고 엄마를 위로하셨어요. 그러면서 덧붙이시길, "애들이 귀신 얘기 같은 걸 그렇게 좋아하더라고요."

 

저는 그때 확실히 알았습니다. 어린아이들은 그 어린 나이에도, 귀신 이야기 같은 자극적인 이야기에 환장한다는 걸(...)

 

 

어린 맘에도 엄마가 불쌍했어요.

지금 생각해보니까 더 불쌍해요. 재주도 없는 일을, 어린 딸이 부탁한다고 스승의 날 며칠 전부터 맹연습에 연습을 거듭했던 기억은 또렷하거든요.

 

참고로 그때도 제 짝꿍은 남자아이였는데,

그 아이만 유일하게 그 때 저희 엄마에게 야유를 보내지 않고(?) 입을 다물고 있었어요.

그 후로, 그 아이가 더욱 좋아졌더랬죠. (1번 에피소드와는 반대의 결과랄까...)

 

 

3.초등 고학년 때, 예능 사교육으로 저는 미술강습을 받았습니다.

동네 친구 두 명과 함께,직접 집으로 방문하는 미술 선생님에게서

일주일에 두 번 정도 뎃생, 수채화, 디자인(10여년전 미술 전공해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일상의 물건을 본떠 '편화'라는 것을 하고

포스터칼라로 색을 칠하는 장르(...)였지요)을 돌아가며 배웠습니다.

 

다른 학원은 여러 이유로 중도에 그만두는 일이 잦았는데

이 미술강습만큼은 꽤 오래 받았던 것 같습니다.

중학교 들어가기 직전까지 했으니까요.

 

그 무렵쯤, 나름 '고난이도'의 편화를 가르쳐준다고

선생님이 여러 가지 물건을 편화한 책을 사오라고 하셨어요.

그런데 그 책의 이름이 다른 책과 헷갈리기 쉬웠나 봅니다.

저희 엄마가 손수 그 책을 사다주시고, 덜렁거리는 딸 책 잃어먹지 말라고 내지에 제 이름까지

매직으로 써주셨는데,

알고보니 그 책이 아니라 비슷한 이름의 다른 책을 사와야 하는 거였어요.

게다가 그 책이나 엄마가 사오신 책이나 둘다 나름 값나가는 책이었거든요.

잘못 사온 책을 들고 울상이 된 저를 보고 선생님이 혀를 쯧쯧 차시면서 "그러게 너희 어머니는 왜 네 이름부터 먼저 책에다 쓰셔서는..."하고 중얼거리셨어요.

저에게 내내 별로 호의적이지 않았던(둘이 더 친했어요 ㅠㅠ) 미술강습의 두 친구들도 그에 동조했고요.

 

그때 속으로 욱, 했던 것 같아요.

우리 엄마가 그러려고 한 것도 아닌데! 책도 일부러 사와주셨는데, 왜 이런 말을 들어야 하지!

 

결국 저 혼자 새 책을 사야 했지요.

 

그때 보고 본을 떴던 편화 책은 어디론가 사라졌지만,

엄마가 미리 제 이름부터 써주신 잘못 사온 편화 책은 지금도 제 방 책꽂이에 꽂혀 있어요.

어쩌다 보니 지금까지 가지고 있네요. 딱히 엄마에 대한 의리(?)로 가져다닌 것도 아닌데.

 

 

 

갑자기 로스구이햄의 추억에서 생각이 튀었네요.

로스구이햄->'엄마 지못미'가 되어버렸군요.

그나저나, 수퍼마켓에 가면 아직도 기억속 '로스구이햄' 이 있을까요? 지금 찾기는 무리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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