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인과 이야기를 하다 이런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이번 대선 결과 역시 인구수가 많은 수도권과 경상도가 판도를 가름하고 있다. 그런데 지역감정 및 경상도의 새누리당 지지 편중은 어떻게 시작했던 걸까. 


그런데 이 때 나온 말이 있습니다. 박정희가 '예정대로' 부산과 마산에서 발포를 했더라면 지금쯤 경상도와 전라도의 입장은 뒤바뀌어 있지 않겠느냐 란 거지요. 역사에 가정은 없다 하지만, 늘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상상은 끊이지 않는 법. 혹시 모르는 분이 있을지도 몰라 이야기해드리자면, 사실 현대사를 돌아보면 경상도야 말로 민주화 항쟁의 굵직한 사건이 일어나곤 했지요.  


1946년 미군정 시대의 일입니다. 일본이 물러났다고는 하나 예전 친일경찰들은 여전히 활개를 치며 무진한 횡포를 부렸습니다. 마침내 빡친 사람들이 대구에서 들고 일어난 게 10.1 항쟁입니다. 사람들이 시위를 벌이자 미군은 경찰 우익단체들을 동원해서 진압했고, 이 과정에서 160여명의 사람들이 총 맞아 죽고 끔찍하게 고문당했고, 이건 이후 6. 25때 보도연맹 학살로까지 이어집니다.

그리고 이승만 정권의 종지부를 찍은 4. 19의 계기는 마산에서 벌어졌지요. 3. 15 부정선거의 여파로 시위가 빈발하던 때, 여기 시위에 참가했던 15세의 학생 김주열의 시체가 참혹한 모습으로 마산 앞바다에 떠올랐고 이게 부산일보에서 보도된 것이 시작이었습니다.


그리고 가장 최근의 일로 들 수 있는 것은 부마민주항쟁입니다. 1979년 10월 16일, 그러니까 박정희가 죽기 직전이자 유신이 서슬 퍼랬을 무렵. 부산대학교를 중심으로 민주화항쟁이 일어납니다. 유신철폐를 외치며 격렬하게 시위를 벌이자 유신 정부는 계엄령을 내렸으며, 군부대가 출동해서 부산, 마산, 창원에서 많은 사람들이 체포당하고 한 60명 정도가 재판에 회부되었지요. 그런데 당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부산과 마산의 상황을 살펴보니 이게 뭐 좌빨이 뒤에 있고 음모가 있고 그런 게 아니었습니다. 근로자나 시민들이 합세하고 시위하는 사람들을 집에 숨겨주며 주먹밥을 건네주는 등 전부 한 덩어리가 되어 항쟁하고 있어서 심상치 않다고 생각해 박정희에게 보고했다고 했지요.


그런데 이 때 차지철이 "300만 죽인 캄보디아처럼 우리도 100만명에서 200만명 쯤 죽이면 될 거다."라는 발언을 했고 여기에 박정희가 수긍하는 걸 보고 이건 정말 아니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엿새 뒤 궁정동에서 총을 쐈다고 진술했지요.

본디 김재규는 박정희의 숭배자이자 측근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를 암살했는가, 그는 진술에서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를 위해서라고 말했습니다. 


"박대통령은 국민이 희생되더라도 멈출 사람이 아니다. 그걸 알기 때문에 내가 유신의 지주이면서도 원천을 부순 것이다."


김재규라는 사람에게의 평가는 엇갈리기에 더 자세히 이야기는 하지 않겠습니다. 그게 어디까지나 김재규 본인만의 진술이라 믿을 수 없다는 분들도 있겠지만. 다음 결과는 아시겠지요. 하나회를 주도하던 전두환의 신군부가 재빨리 정권을 탈취하고 새로운 독재를 시작했으며, 그리고 7개월 뒤 광주민주화운동이 벌어집니다. 


어떻게 보면 부산과 광주의 운명이 몇달 차이로 갈린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경상도가 언제나 친정부적인 건 아니었어요. 제가 어린 시절 살았던 마산은 툭하면 시위가 벌어지는 곳이었습니다. 철없이 "시위한다!" 하고 구경갔던 어린애가 최루탄 냄새를 맡고 캑캑 거리며 울고 있을 때 얼굴에 수건을 두르고 "종철이를 살려내라!" 하고 목이 터져라 외치던 젊은 아저씨들이 있었습니다. 그 분들은 지금의 5, 60대가 되어 있겠지요. 그런데 그러던 사람들이 지금은 왜 그렇게 되었냐, 하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아직 그만큼 살아보지 못한 걸.


사실 역사를 돌아보면 죽는 순간까지 절개를 꼿꼿이 지키는 사람은 무지 적습니다. 대부분은 잘 나가다가 한 발 삐끗 하고 타락의 구렁텅이로 우당탕탕 렛츠 고 입니다. 민주화 운동하다가 온갖 고문당했던 사람이 "나 도지사다!" 하며 전화받는 소방관들을 전근시키는 꼰대짓을 하고 좌빨 소리를 입에 달더니 박정희 동상을 세워야 한다고 하고 있으며, 박종철 고문사건의 조사를 목숨걸고 했다(고도 하)는 검사가 보온병 들고 좌파좌파하고 있으니까요. 두 분 모두 경상도 출신이네요(영천, 부산).


그런데 그 분들은 그런 지역감정을 활용해야 하는 정치가라서 그렇다 치지요. 일상에서 내 주변에서 지역에게 편견을 드러내는 분들을 가끔 만나곤 하는데 이 분들은 결코 지독한 악인들은 아닙니다. 제가 너무도 좋아하고 따르던 분이 있으셨는데, 우연한 경우에 전라도 사람은 믿을 수 없다는 끔찍한 악의를 표출할 때 믿을 수 없었습니다. 또 전라도 출신이라 부모님이 결혼에 반대한다는 어이없는 일도 들어봤고요. 정년퇴임하던 분의 수기를 읽던 차, 너무 가난해서 가출해서 서울로 올라왔더니 전라도 출신이라 사람들이 일을 안 시켜주더라... 하는 글귀를 읽고 저 나름으론 충격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편견을 말하는 분들도 알게 모르게 많은 전라도 친구를 가지고 있을 거란 말이죠. 당연히 조상 중에도 전라도 사람이 있겠고. 

물론 굳이 이 사실을 지적해서 싸워댈 필욘 없습니다. 오늘 읽은 아가사 크리스티의 소설에서도 노인 분들에게 잘못을 지적하지 말고 네네 하고 넘어가라는 교훈을 설파하고 있더군요. 고대 그리스 시대 이후로 언제나 젊은 것들은 글러먹고 노인들은 꼴통인 법이니까요.


이 자리를 빌어 굳이 경상도 역사를 탈탈 털어본 이유는, 미래에 희망을 걸기 때문입니다. 

지역감정이 어떻고 하는 지금의 이 현실이 통탄스럽지만, 어서 빨리 이 편견이 시대 너머로 묻혀버리고 마침내 사라지기를 바라 마지 않습니다. 그게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한때 인종차별이 극심했던, 그래서 전쟁까지 벌였던, 또 사회운동까지 벌어지게 했던 미국은 지금 인종차별자라는 발언 자체가 대단히 부끄러운 일이 되었습니다. 실제로 그런 발언 입에 담았다가 정치적으로 큰 이슈가 되어 까이다 못해 사회적 매장까지 당하는 판국이죠. 우리나라도 그런 변화가 당연히 있습니다. 여성차별이나 기타등등, 불과 몇년 전만 해도 당연했던 편견들이 이제 속으로는 어떻든 공식적으로는 밀가루가 되도록 까이지 않습니까.

그러니 전라도가 불쌍한 것도 아니고, 경상도가 이상한 것도 아니고, 그냥 그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유치하고 촌스럽고 쪽팔리게 여기는 세상이 어서 오기를 바랍니다. 




끝으로 저는 제가 살았던 경상도를 무척 좋아하고, 내 많은 친구들과 사랑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가보고 싶은 곳도 많고요. 무엇보다도 그곳 사람들의 호탕한 성깔을 아주 사랑합니다. 당연히... 박정희를 숭배하는 사람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DJUNA 2023.04.01 25286
공지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엔시블 2019.12.31 43830
공지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DJUNA 2013.01.31 352336
61407 5분만 여자친구가 되어 주세요 [23] 화려한해리포터™ 2012.12.23 4685
61406 호빗, 개봉영화예고편, 죽음에 대한 자각 [12] Lain 2012.12.23 1676
61405 미래창조과학부...2 [1] 닥호 2012.12.23 1586
61404 레미제라블 짧은 후기 푸른새벽 2012.12.23 1561
61403 드디어 커피점 오픈 일자를 잡았습니다. - 개업선물로 뭐가 좋을까요? [31] 무비스타 2012.12.23 4147
61402 언제 폭발할까요? [18] 사팍 2012.12.23 3906
61401 호남 차별 기원에 대해서 추가로.. [8] amenic 2012.12.23 1459
61400 소수의 생존 전략. [39] 잔인한오후 2012.12.23 3660
61399 동전지갑 쓰시는 분들은 어떻게 활용하시나요? [8] 방은따숩고 2012.12.23 1923
61398 서산돼지님 글에 대해 간단히 [9] 겨자 2012.12.23 2480
» [역사 바낭] 민주화와 경상도의 과거, 미래 [20] LH 2012.12.23 2926
61396 어제 <무자식 상팔자>에서 사소하지만 좋았던 부분.. [6] WILLIS 2012.12.23 2433
61395 스마트폰이 가장 사람과 가까운 [3] 가끔영화 2012.12.23 1699
61394 엇! 손하큐, 정신줄 놓는 소리를? [2] Warlord 2012.12.23 2824
61393 타워링 dvd가 이번에 처음 출시되는거였군요 [3] 감자쥬스 2012.12.23 927
61392 대선을 잊기 위한 분노의 영화질(주먹왕 랄프, 호빗, 레미제라블) [16] hermit 2012.12.23 2664
61391 고양이를 기릅니다. [16] 잔인한오후 2012.12.23 3308
61390 [듀나in] 마음에 드는 집을 구했는데...어떻게 붙들어 놓을 수 있을까요? [3] kct100 2012.12.23 2007
61389 [시국좌담회] 송년회 장소와 시간입니다. 좌담회에 오신 적이 없으셔도 상관 없습니다. [6] nishi 2012.12.23 1646
61388 박정희 비판서들 아직까지는 출시되고 있네요. [12] amenic 2012.12.23 2396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