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오네요, 어제까지만 해도 벚꽃잎 날리는 모습들이 너무 아름다워서 행복했는데

이 비가 그치면 이제 일년을 기다려야 다시 벚꽃을 만날 수 있겠어요. 꽃은 지기 때문에 아름답다, 라고 누군가 말했지만

저 같은 찌질이는 지는 꽃만 보면 가슴이 미어집니다 ㅜㅜ

 

봄 비가 내리면 생각나는 장면들이 있습니다. 아주, 어릴 때의 이야기예요.

라고 쓰고 생각해보니 십년이 지난 일이네요.

그렇다고는 해도 그 때나 지금이나 저는 학생이고, 뭐가 얼마만큼 자랐는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여전히 서투르고 휘청거려서 사는 게 쉽지만은 않아요.

그래서 그 때나 지금이나 저를 잡아주고 토닥여주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서 살고 있습니다.

 

그 친구도, 그런 친구였어요. 제가 전학을 간 학교에서 처음 만난 친구의 친구였는데.

그렇게 유쾌하고 재밌는 친구는 정말 처음이었습니다. 정말 어른들이 싫어할 만한 차림새로 다니는 친구였고

저랑은 딱 보기에 잘 어울리는 친구는 아니었어요. 그렇지만 정말 좋았습니다.

그 어린 나이에 서로의 연애 얘기, 가족 얘기들을 하면서 많이 가까워졌다, 라고 저는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리고 우리는 서로 다른 학교에 갔습니다. 저는 남자만 다니는 학교에, 그 친구는 여자만 다니는 학교에 가게 됐어요.

전 사실, 우리 사회에서 남성성이라고 착각하는 폭력적인 것들을 심하게 못 견뎌하는 성격입니다.

제가 그런 문제에서 완벽하게 자유롭고, 전혀 마초스럽지 않은 그런 사람이다.

라는 건 아닌데, 그냥 저한테 가해지는 것들에 대해선 그래요. 그래서 많이 힘들었고, 그 친구와 많은 얘기를 했었어요.

많은 힘이 됐습니다. 그 친구가 저에게 무슨 얘기를 해주어서가 아니라 그냥 들어줘서요.

 

그러던 어느 날 그 친구는 저에게 커밍아웃을 했습니다. 여자가 좋다구요. 사실, 커밍아웃이라고 할 만한 것도 없었던 게 아직 어렸을 때여서 그랬는지

그 친구의 성격때문에 그랬는지. 그 친구는 아예 숨기려는 생각을 안했어요, 주변 사람들에게.

물론 이 사람 저 사람 찾아 다니며 말을 한 건 아니지만 적어도 자기와 가깝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한해서는 전혀 숨기려는 모습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예상하시겠지만 저는 그런 상황을 대처하는 데에 서툴렀어요. 여성이 여성을 좋아하는 일이 문제적 상황이다, 라고 생각했던 것 자체가

잘못이었지만 그 당시에 저는 정말로 많이 어렸어요. 정신적으로는 물론이고 그냥 절대적인 신체적 나이로도 그랬어요.

그렇다고 해서 제 성격에 그 친구에게 다그쳐 묻거나,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을 한다거나, 그런 식으로 행동하진 않았지만. 받아들이는 데에는 조금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제게 필요했던 조금의 시간이라는 게 그 친구에게는 상처가 됐었던 것 같아요.

그 전처럼 시간을 내서 만나고, 만나면 웃고 떠들고 했지만. 그 이전과 많이 달라진 공기를 서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저는 저대로 그 친구의 얘기에 흠칫거렸고, 그 친구는 그 친구대로 그런 저의 모습을 보며 많이 서운했겠죠.

그리고 봄비가 내리던 마지막 날에, 그 친구는 저에게 '미안하다' 라고 말하고 더 이상 모습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전해지는 이야기들을 통해서 그녀가 아버지와 싸우고(편부 가정이었어요), 집을 나갔다 라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게 기억나는 마지막이에요.

 

그리고 그 친구와 저와 동시에 친하던, 그 친구와 같은 학교에 다니던, 역시나 이반이었던 친구가 한 명 더 있었습니다.

원래 알던 친구가 친구 녀석이라고 할 느낌의 친구였다면, 지금 말씀 드리는 새로운 친구는 정말 하얗고 예쁘게 생긴 아이였습니다.

그 친구와 가끔 만나서 떠나버린 친구 얘기를 하고는 했습니다. 둘 모두에게 의지가 되던 친구였기 때문에 굉장히 상실감이 컸어요.

힘들었을 때에 힘이 되어주지 못했다는 것 때문에 우리는 매번 만날 때마다 마음 아픈 이야기들만을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술을 마셨어요. 술을 마시면 안 될 만한 나이였지만 그냥, 그러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처음으로 취할 만큼 술을 마시고, 역시나 취해있던 그 친구를 집에 데려다 주면서...

예뻐보이는 그 친구 얼굴이 너무 힘들었습니다. 정말 그러면 안된다는 걸 알면서도, 그 친구를 이성으로 좋아하게 됐어요.

들키고 싶지 않아서, 꾹꾹 눌러두다가 어느 날 그 친구에게 물었습니다.

너는 지금 만나는 사람이 여자라서 좋은거야, 좋아하고 보니 여자인거야.

라고. 지금 다시 써놓고 보니 참 나쁜 말이네요. 당사자에겐 그렇게 쉬운 문제가 아니었을텐데...

그 친구의 대답은 기억나지 않지만, 아무튼 저는 그 대답을 듣고 시간이 좀 지난 후에 다른 연애를 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런 마음인 채로 만난다는 게 어쩐지 죄스러워, 점차로 멀어졌던 것 같아요.

그리고 그 다음 해의 봄에, 저희 학교 친구(저는 남자 학교에 다녔습니다.)의 손을 잡고 길을 걷는 그녀를 만납니다.

반가웠지만, 그 이상으로 궁금한 것들이 너무 많았고, 그 친구는 저를 불편해하는 기색이어서. 우리는 그냥 별 말 없이 지나쳤어요.

우연처럼, 이 날도 비가 많이 왔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로 저는 성적으로 소수인 분들에 대해 다른 무신경한 사람들보다는 조금 더 신경을 쓰고 살았던 것 같아요.

너무, 미안한 기억들이어서요. 어렸으니까, 라고 그 때의 저를 위한 핑계들을 대어주지만. 마음 속의 이 빚덩어리는 줄어들지를 않습니다.

앞으로 내게 그런 이야기를 해주는 친구가 생기면, 정말. 정말. 따뜻하게 들어주고 편이 되어주고 싶다. 라는 생각을 항상 하지만

그 때 이후로 저에게 그런 이야기를 해주는 친구는 아무도 없었어요. 그렇다고, 제가 그런 분들을 찾아가서 힘이 되어주고 싶다,

라고 하는 것은 그 분들에게 어쩐지 거부감을 불러 일으킬 것 같구요... 그래서 저는 여전히 봄 비가 내릴 때마다 그 때의 부채를 생각합니다.

이 글 자체도 누군가의 눈살을 찌푸리게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조심스럽습니다. 적고 보니 매우 길기만 하고 못 쓴 글이 되어버려 더욱 그래요.

글을 적는 데에 재주가 있었다면 조금 나았을까요...여전히 이렇게 찌질하고 생각이 짧은 저를 누군가 애정을 갖고 꾸짖고 가르쳐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적은 이야기입니다.

분명, 제가 여전히 놓치고 있고 여전히 실수하고 있고 혹은 전혀 나아지지 않은 부분들이 있을거예요. 저는 그런 제가 싫습니다.

 

여러가지로, 아프기에 쉬운 날인 것 같습니다.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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