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요의 추억

2012.03.20 22:06

lonegunman 조회 수:1919



듀게에 한 번도 가요를 포스팅한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사실 제 영혼의 근간은 가요에 있습니다

오히려 한 곡 한 곡 얘기하다 보면 감자처럼 줄줄이 인생이 다 엮여 올라올 것 같아 별로 언급하지 않게 돼버린 것 같아요

그래서 그냥 조각조각 내뱉어보는 사소한 얘기들.

별 내용은 없고,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쓰여졌습니다. 쓰다보니 뭔가 인생의 트리비아가 돼버린 듯

사소하지만 왠지 기억의 밑바닥에 남아 있는, 가요의 추억이 있으십니까?



1.

최초의 기억은 도시의 아이들이 부른 '텔레파시'라는 곡. 한 세대도 아니고 두서너 세대 위의 가요지만 티비에서 그들이 저 노랠 부르던 화면은 어쩐지 생생하게 기억이 납니다. 가요에 대한 최초의 기억.


2.

노영심씨가 진행하던 음악 프로가 있었습니다. 정치적으로 불공정하지만, 아무튼 어렸으니까, 지체 장애인들 특유의 얼굴을 구기며 천진하게 웃는 웃음을 짓는 사람이 화면 가득 떠올랐습니다. 빨래 널던 어머니께 '엄마, 장애인이 노래해'하니까 어머니께서 하신 말씀이 '저 사람은 장애인이 아니야. 김광석이란 가수란다'


3.

집에는 변진섭 1,2,3집, 윤상, 노래를 찾는 사람들의 lp판이 있었습니다. 어머니 취향인지 노래를 찾는 사람들이 자주 울려퍼졌습니다. 그래서 '기나긴 밤이었거든, 압제의 밤이었거든' '찢기는 가슴 안고 사라졌던 이 땅에 피울음' 뭐, 이런 가사를 흥얼거렸던 어린 시절. 그런데 노래가 좋았던 게 함정.


4.

처음으로 집에 레고가 생겼을 때, 라디오에서 흐르던 노래는 신해철의 '내 마음 깊은 곳의 너' 지금도 이 노랠 들으면 반사적으로 레고가 떠오른다는.


5.

신해철, 하니까 생각나는데 이상은씨가 5집인가 6집을 냈을 때 했던 말 '상은이가 해냈어. 남자 가수들 다 죽어야 돼'


6.

이상은, 하니까 생각나는데 처음으로 가본 지방 공연은 이상은의 아산 공연. 학생 신분임에도 아산까지 내려가는 건 엄청난 용기와 의지를 요하는 일이었지만 열렬한 팬이었기에 가능했던. '화이팅 에츠코'의 사운드 트랙을 맡은 이유로 콘서트+영화 상영으로 돼 있는 야외 공연이었는데 활동이 뜸했던 당시- 팬들의 열렬한 앵콜 요청을 사뿐히 무시하고 가버리던 뒷모습이 기억에 남아있습니다.


7.

ost, 하니까 또 생각나는데 국산 만화 라젠카의 ost를 냈던 신해철이 라디오에서 새앨범 냈다고 유세 떠냐는 항의 편지를 받는다며 키득거리면서 노래하길 '라젠카 새앨범~ (원래 가사는 라젠카 세이브 어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8.

가사 얘기 하니까 생각나는데, 유영석이 푸른 하늘 마지막 앨범을 냈을 때 군대간 아는 동생이 이번 노래 좋다며, 가사가 아름답다길래 의아했다고. 아름다운 가사가 아닌데? 그러자 군대간 동생이 노래하길 '오랜 추억 되리~ (원래 가사는 오렌지 월드 앨리스)'


9.

역시 라디오에서 유영석이 실없는 농담을 하던 중이었나 '세상 사는 시시콜콜한 얘기를 절대 실없이 늘어놓을 수 없을 것 같은 상대가 한 명 있다'며 꼽은 사람은 가수 예민. 뭔가 심오한? 순수한? 세상과 동떨어진? 때 묻지 않은? 사람이라는 이유였는데 정확한 수식은 생각나지 않네요


10.

예민이 전국 방방곡곡 분교 음악회를 돌고 일단락의 의미로 관계자와 시골 분교 아이들과 응원하던 팬들 등을 초청하여 서울에서 열었던 공연. 분교 아이들이 무대에 올라 함께 공연을 하기도 하고 청중들에게 악기를 나눠주어 합주도 했던 시간. 옆에 앉았던 한 스님이 당신이 받은 악기를 공연 끝나고 제게 주셨는데 그때의 그 빨간 마라카스가 지금도 제 방에 있습니다.


11.

공연,하니까 생각나는데 무슨 공개 방송이었나를 보고 나오다 방송국 안에서 길을 잃었습니다. 지나가는 차를 세워 길을 묻는데 차창이 내려지자 나온 얼굴은 이적. 패닉 초창기 때였던 듯.


12.

카니발 앨범이 나왔던 겨울. 호빵을 전자렌지에 넣어놓고 방에서 씨디를 틀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거위의 꿈을 들으며 울고 있었던 기억. 씨디 한 장을 통째로 듣는 동안 전자렌지에서 까맣게 탄 호빵 연기가 온 집안을 다 채우고 있는지도 몰랐던. 집 태워 먹을 뻔 했다고 얼마나 혼이 났던지


13.

같은 겨울, 이적의 별밤 공개 방송. 거기서 H.O.T. 실물을 처음 봤습니다. 입장하는데 큰 어려움이 없었던 걸로 봐선 아직 아이돌 팬클럽의 폭발력이나 조직력이 갖춰지지 않은 시기였음을 짐작할 수 있죠. 중요한 건 그게 아니고, 클로징으로 김동률이 와서 이적과 함께 카니발의 거위의 꿈을 불렀는데, 관중 대다수가 안 듣고 그냥 나갔던 굴욕적인 기억. 무려 이적이고 무려 김동률이고 또 다른 곡도 아닌 무려 '거위의 꿈'인데, 요즘 같아선 상상할 수 없는 일이겠죠.


14.

가요 프로에서 H.O.T.의 '전사의 후예'를 처음 보고 받았던 충격. 뭔가 굉장한 것이 나왔다는 무시무시한 직감. 그러나 밴드 음악을 좋아하는 취향과 아이돌을 좋아하는 취향은 양립불가능하다는 분위기가 지금보다 훨씬 팽배했던 당시, 취향을 공유하던 친구들로부터 본격적으로 이단 취급을 받기 시작했지요. 에쵸티를 좋아한다는 걸 부끄러워 하길 바라는, 더 나아가 대신 부끄러워해주는 분위기. 그때 그 아이들은 어느 하늘 아래서 소시를, 빅뱅을 사랑하고 있을런지.


15.

처음 내 돈으로 샀던 음반은 삐삐밴드 1집. 나중에 언니네 이발관 1집을 사러갔더니 '삐삐밴드 사갔던 학생이지?' 황신혜 밴드 1집을 사러갔더니 '언니네 이발관 사갔던 학생이지?' 하던 레코드 가게 털보 아저씨. 왜 기억하고 계신 거예요. 어쩐지 인디 밴드의 척박한 현실을 확인했던 기억.


16.

회고가 유행이 되면서 자격이 있나 의심스러운 뮤지션까지도 원로 혹은 전설로 회고되는 분위기 속에서, 가장 과소평가 되고 있는 팀은 동물원이라고 생각합니다. 주로 '널 사랑하겠어'같은 말랑말랑한 발라드로 회고되지만, 사실 엄청난 스펙트럼과 실험 정신을 가지고 있는 팀이라고요!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멤버는 유준열. 언젠가 공개 리허설이라고, 콘서트 전에 콘서트 레파토리를 리허설 형식으로 좀 느슨하게 공개하는 공연이 있었는데 인터미션에서 진행된 인터뷰. 동물원의 작업 방식에 대한 질문이었는데 유준열 왈 '특별히 고정된 방식이 있는 건 아니지만 개인적으론 일상 언어의 뉘앙스를 멜로디에 그대로 담으려 노력한다'던. 무릎을 쳤었죠, 유준열의 노래들은 정말이지 그랬으니까. 그런 의미로 링크는 동물원 노래. 라고 해놓고 선곡은 '주말 보내기'





토요일 오후 정신없이 바쁘던 일과가 끝나면

나는 넥타이를 풀고 집으로 돌아가다가

슈퍼마켓에 들러 소주 두 병과 라면을 산 후에

머리가 아프지 않을 가벼운 책도 한 권쯤 사야지


토요일 저녁 낮잠에서 깨어난 무거운 머리로

주말의 명화가 시작하기까지 기다리고 있다가

이미 오래 전에 봤던 영화가 시작될 때면

빈 술병들을 남겨 둔 채 잠에 들겠지


일요일 아침 나는 교회에는 잘 가지 않으니까

한지붕 세가족이나 뭐 그런 티비를 보다가

문득 깨달은 듯 어지러진 방을 치운 후에

그간 밀려 있던 빨래들과 씨름을 해야지


일요일 오후 왠지 누군가를 만나고 싶어지면

수첩 속에 낯선 이름을 읽어 내려가다가

이내 포기하고 재미없는 책장을 넘기면

너의 모습이 떠오르고


일요일 밤 그냥 그렇게 한 주말이 끝나면

라디오에선 말이 많은 DJ의 멈추지 않는 얘기

난 또 잠을 이루지 못해 한참을 뒤척이다가

나를 꾸짖는 듯한 자명종 소리에 깨어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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