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니 도대체 수지-한가인의 인생은 왜 저 모양인가요. 어려서 어머니 잃고 제주도에서 동네 학원 다니며 죽어라 공부해서 연대 음대 들어갔더니 촌놈이라고 왕따 당하고. 짝사랑하던 선배는 양아치에 큰 맘 먹고(?) 좋아했던 녀석은 난데 없이 '꺼져줄래?'라면서 떠나 버리고. 그나마 시집 잘 가서 인생 피나 했더니 금방 이혼에 혹시나 해서 찾아간 첫사랑은 강제 고백 시켜놓고 결국 결혼한다고 떠나 버리고. 나름대로 '어른의 해피엔딩'스럽게 끝나긴 하지만 그 인생 역정이 너무... orz


- 가족 중에 '봄날은 간다'를 아주 싫어하는 분이 계신데, 말인즉 등장 인물들이나 벌어지는 사건들이 너무나도 현실적이어서 꼭 동물의 왕국 같은 자연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 같아서 그렇답니다. '수컷이 구애의 노래를 부릅니다. 교미를 하고 있군요.' 라는 나레이션이 나올 것 같았다고. -_-;; 근데 저는 엉뚱하게 이 영화를 보면서 좀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히 이제훈-엄태웅 캐릭터가 그래요. 따지고보면 찌질하다고 욕을 많이 먹는 것 같긴 한데... 그냥 뭐 그 당시 기준으로 평범한 숫기 없는 대학생 캐릭터를 과장 없이 보여준다는 느낌이었어요. 사랑에 빠지는 것도 짝사랑을 하면서 하는 행동도 오해-_-후의 찌질한 반응도 모두 그냥 전형적이면서 현실적이었죠. 특별히 찌질한 놈이란 생각은 전혀 안 들었습니다. 물론 그게 잘 한 짓이라는 얘긴 또 절대로 아니지만...;;


- 친구 캐릭터도 마찬가지. 어쩌다 남자애들끼리 모인 술자리에서 누군가의 연애 상담 분위기가 조성되면 꼭 그런 식의 말도 안 되는 조언을 불변의 자연의 법칙이라도 되는 양 자신있게 떠들어대는 놈이 한 두 놈씩은 있었죠. 게다가 그 와중에 정말 그런 얘길 진지하게 듣고 그대로 실행에 옮기는 녀석도 가끔 있었고. 물론 그 결과는(...)


- 사실 전 웹상의 반응을 보고 '본격 90년대 추억팔이 영화' 같은 걸 생각하고 보러갔었는데. 생각만큼 열심히 팔진 않더라구요. 기껏해야 삐삐, CDP, 전람회와 015B, 마로니에 노래 정도. 그나마 영화 속에 나온 노래는 모두 96년 이전 곡들이었죠. 등장 인물들의 옷차림은 꽤 신경을 쓰긴 했는데 (특히 선배와 친구는 머리 모양부터 옷차림까지 거의 완벽하더군요 ㅋ) 수지 의상이 좀 걸렸습니다. 홀로 80년대 삘의 의상이었는데...; 뭐 '오래된 첫사랑의 이미지'를 보여주는 게 수지 캐릭터의 역할이었으니 그냥 그러려니 하구요.

 제게 이 영화에서 시대 재현이 가장 잘 되었다 싶었던 건 의상이나 소품들보다는 등장 인물들의 사고 방식, 행동 방식 같은 부분들이었습니다. 정말 그 당시 대학생들 같았어요. 그래서 그런지 옛날 생각도 많이 나고 전람회 노래도 땡기고 그러네요.


- 그리고 또 한 가지. 96년의 서울 대학생들의 학교 생활이나 연애 생활치곤 너무도 순수(?)하단 느낌이 들기도 했어요. 하지만 애초에 이제훈과 수지가 만나서 데이트할 일이라곤 건축학개론 수업 과제 하러 다니는 것 밖에 없었으니 또 그냥 납득 합니다.


- 정말 영화 제목 잘 지었죠. 둘이 만나게 되는 계기가 '건축학 개론' 수업이고 수업 과제를 통해 연애 감정을 싹 틔우고 수업 종강과 함께 헤어지잖아요. 게다가 다 하지 못 하고 남겨둔 감정을 건축을 통해 해소하고 끝내는 영화니까. 시나리오도 영리하게 잘 짜여졌다는 느낌이고 제목도 맘에 듭니다. '불신지옥'으로 인한 기대치가 있었는데 그걸 충분히 충족시키고도 남는 작품이었어요.


- 배우들도 만족스러웠습니다. 네 명의 주연들 모두 본인 역할에 잘 어울리든 소화를 잘 하든 어쨌든 훌륭했구요. 선배, 친구도 훌륭했고... 특히 한가인은 '해를 품은 달'에서 까인 게 안타까울 정도로 와방 예쁘고 연기도 무난하더군요. 사실 한가인의 미모에 대한 칭송들을 볼 때 살짝 공감 못 하고 있었는데, 이젠 납득하기로 했습니다. -_-;; 역할을 잘 만난 덕을 감안하더라도 수지도 괜찮았구요. JYP 소속 가수가 영화에 나온 건 '뜨거운 것이 좋아'의 소희와 이 작품의 수지 밖에 못 봤는데 둘 다 작품이 괜찮아요. 시나리오 잘 보는 직원이 있는 건가... 라고 생각하다 보니 애초에 영화에 출연한 경우가 별로 없네요;

 그리고 감독이 연기 지도를 잘 한 것 같단 느낌도 조금. 이제훈-엄태웅도 그렇지만 외모상 전혀 비슷해 보이지 않는 수지-한가인이 대충 같은 인물처럼 느껴지더라구요.


- 근데 찾아 보니 수지와 이제훈이 열 살 차이네요. 옴마야;;;


- 감정을 그리 쥐어짜내는 영화는 아니어서 눈물이 나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그나마 가장 슬펐던 장면은 한가인이 '니가 내 첫사랑이었으니까!'라고 외치는 장면이었습니다. 맨 처음에도 적었지만 이 분 인생이 너무 암울해서 그 상황에 몰입이 확 되는 것이; 엄태웅이야 예전에도 자기 오해 때문에 삽질했던 거고 (첫 눈 올 때 만나자며 장소까지 정해주는 얘기 들었음 알아서 눈치를 챘어야지 인간아...;) 현재도 상황이 딱히 나빠 보이지 않아서 슬플만한 부분은 없었는데. 자기가 옛날에 부숴 놓은 문짝 꾹 꾹 누르면서 우는 장면은 그래도 좋았습니다. 뭔가 영화 제목과 잘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고(...)


- 은근히 가난(...)을 강조하는 영화였다는 생각도 조금. 이제훈이 사는 동네를 굳이 그 쪽으로 설정했다든가. 수지가 무려 음대생(?)임에도 불구하고 도시 출신 동기들에게 무시를 당한다는 설정이라든가... 재수 없는 부잣집 선배 캐릭터나 그 캐릭터의 대사들도 그렇고. 전작에 의한 선입견 때문인지 감독이 아무 생각 없이 그렇게 설정을 짰을 것 같진 않아요.


- 한가인이 살 집은 참 예쁘고 좋더라구요. 특히 그 윗층이 바깥 환경과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부분이 좋았습니다. 다만 겨울철 난방비 때문에 부담 좀 되겠다는 생각...;;


- 마지막 장면의 CDP야 뭐. 알아서 수리하고 배터리 새 걸로 넣어 보냈으려니 합니다. ^^;


- 엄태웅 여자 친구('내 마음이 들리니'의 그 분이더군요)가 한가인에게 결혼 사실을 털어놓는 장면을 보고 가족분께서 '여우 같다'며 감탄하시길래 '갑자기 어떤 싱글 학부모가 나와 동창이라며 찾아와서 친한척 하는데 얼굴이 한가인이야. 어떡할래?' 라고 물어봤습니다. 바로 납득하더군요. 당연하죠 뭐 한가인인데.


- 역시 가족분과 대화 중에 이견이 있었던 부분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1) 엄태웅과 한가인이 첫 대면하는 장면에서, 전 정말로 엄태웅이 잠시 알아보지 못 한 거라고 생각했습니다만 가족분께선 일부러 못 알아보는 척을 한 걸 거라고. 글쎄 뭐 일부러였을 수도 있겠지만 전 그냥 못 알아본 게 맞다고 생각해요. 첫사랑이라곤 하지만 딱 3개월간 얼굴 봤던 사이고 둘이 무슨 사진을 남기지도 않은 것 같구요. 그리고 16년이 흘렀으니까.

 2) 과연 그 날 밤 수지와 그 강남 선배 사이엔 무슨 일이 있었는가(...) 전 결국 별 일은 없었을 거라는 쪽이고 가족분께선 그럴리 없다(...)는 쪽. 전혀 중요한 부분이 아니라는 건 알지만 어떻게들 생각하십니까!?


-  ...라는 뻘 질문을 던지며 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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