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스 - 인공두뇌 오리온 탈환

2024.01.11 14:00

돌도끼 조회 수:101


1984년 스튜디오 잔도라가 제작하고 에닉스에서 판매한 어드벤처 게임입니다.

21세기말, 미국이 핵무기 관리 AI 오리온을 완성시켰습니다.
작동시켰더니 얘가 지키라는 지구는 안지키고 무차별 공격을 합니다.
그렇게 세상은 대충 망했고, 간신히 지하로 피해 살아남은 한줌의 사람들은 한세월 지나서야 지상으로 돌아옵니다.

뭐.. 이렇게 시작하는 포스트아포칼립스물입니다. 자스는 주인공의 이름.


일본하면 아니메, 망가의 나라이고, 컴퓨터 게임도 아니메스러운 그림을 추구하는 걸로 유명하죠. 근데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닌 것 같아요. 적어도 84년까지는...

80년대 초의 컴퓨터 게임 업체들은 대개 구멍가게 수준이었고 아티스트 보다는 컴퓨터 너드들이 게임을 만들었으니까, 썩 좋은 그림이 나올 환경이 아니었어요. 그때 일본 컴퓨터 게임계는 한창 어드벤처 게임이 유행해 여러 히트작이 나오고 있었는데, 그 그래픽 수준은... 빈말로라도 '좋다'라고 하긴 어려웠습니다.
그때도 인기 애니메이션 타이틀을 등에 업고 나온 캐릭터 게임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사람 눈에 보기에 좋은 그림 보다는 기계가 그리기 쉬운 그림 쪽에 무게가 가 있던 때라서, 그시기 아니메 특유의 선의 느낌이나 음영처리 같은건 살리지 못하고 FLAT했습니다.
여기에 반기를 들고 나선 집단이 있었으니, 스튜디오 잔도라였습니다.

왜 컴퓨터 게임에는 애니메이션 같은 그림이 나오지 못하나...라는 물음에서 시작해, 잔도라는 오타쿠들이 환장하는 요소들... SF와 메카, 미소녀를 버무린 게임을 만들어 내놓습니다.

'자스'는 제품이 출시되기 전에 이미 유명했다고 해요. 에닉스가 낸 출시예정작 광고에 실려있던 한장의 스샷. 그걸 본 사람들이 눈돌아갔어요. 그당시 컴퓨터 게임에서는 보기 드물었던 환상종이 나와있었거든요. 미소녀.
그것도 이전에 본적 없는 퀄리티, 마치 아니메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모습. 광고를 본 사람들은 긴가민가 하면서도(광고용 스샷에 뽀샵장난질 쳐서 사기치는 일이 많았어서) 희망을 품고 제품이 나오는 날을 기다렸습니다.
드디어, 출시된 제품을 사서 컴터로 돌려보니 진짜로, 광고에서 봤던 그 소녀, 미리카의 얼굴이 모니터를 가득 채웁니다. 게임 시작하자마자 바로 나와요. 이제부터 미리카와 함께 신나는 모험을... 이런 꿈에 부풀어 게임을 진행했는데.......

한참 지나고 나니 뭔가 이상하단 걸 알게됩니다. 미리카가 안나오는 거예요. 일말의 기대를 품고 계속 진행해 엔딩까지 보고난 뒤에야 속았다는 걸 깨닫게 되죠. 미리카는 걍, 오프닝에서 주인공한테 '도와주세요'라는 말 한마디 하고는 사라지는 '지나가는 소녀 1'. 이거 뭐 단역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엑스트라 수준의 단역이었던 겁니다.
분노해봐야 이미 늦었죠ㅎㅎ

'자스'는 당시 치고는 나쁘지 않은 SF 스토리에 나쁘지 않은 구성을 가진 어드벤처였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고전 명작 SF 어드벤처로 기억됩니다. 하지만, 미리카 쇼크가 워낙에 임팩트가 커서, 이 사기극은 지금까지도 '자스'를 대표하는 에피소드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자스'라고 하면 미리카부터 떠올린다는...


여주인공이 물론 있습니다. 이름이.... 에이 저도 기억 안나요ㅎㅎ 걍 '자스'하면 닥치고 미리카ㅂ니다. 일개 엑스트라가 주인공들을 다 제치고 게임을 대표하는 얼굴이 되었다는 (아마도) 세상에도 희귀한 사례... 여주인공은 명색이 여주인공인데도 존재감이 없어서... 얘가 제대로 활약했다면 미리카가 저렇게 혼자 튈 수는 없었겠죠.


근데 잔도라가 당초에 기획했던 건 출시된 버전보다 훨~씬 더 장대한 이야기였다는가 봐요. 제작 도중 용량과 타협하느라 왕~창 축소되었다네요. 어쩌면 원래 미리카는 좀 더 비중있는 역이었을지도...


미리카가 그렇게 화제가 될 수 있었던 건 그만큼 그래픽 퀄리티가 뛰어났기 때문이죠. 당시의 다른 게임들과 나란히 스샷을 늘어놨을 때 얘 혼자서만 오파츠처럼 보이는...
'자스'의 다른 그림들이 전부다 미리카 면상샷 수준이었던 건 아닙니다. 얘 얼굴 그리는데 유독 힘을 팍팍 줬어요. 그래도 전반적인 그래픽 퀄리티 및 디자인 수준이 당시의 다른 게임들보다 월등히 높았습니다. 그렇게 '자스'는 컴퓨터 게임중에선 보기드물게 애니메이션급의 그림을 보여준 게임으로 유명해졌고 사람들 기억에 남았습니다.

아니메 그림의 느낌을 당시 일본 컴퓨터의 그렇게 높지는 않은 표현력(640x200, 고정된 8색)안에서 재현하기 위해 도트를 세심하게 조절하고 패턴을 이용해 음영처리를 표현하는등, 이른바 일본 컴퓨터 게임의 도트 노가다의 시작도 이 게임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전까지는 단순히 선과 선을 연결하고 뺑끼칠하는, '계산해서' 그림을 그리는 방식이 주류였죠.

이 기세를 이어 에닉스는 계속해서 그래픽이 쩔어주는 어드벤처 게임들을 내보냈고, 그래픽으로는 천하제일이라는 신뢰와 함께 게이머들의 절대적 지지를 받게됩니다. 8 비트 시절 일본에서 가장 많은 어드벤처 게임을 만들었던 회사라고도 하고.

다른 회사들이라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으니 다들 도트 노가다..그림 표현에 열정적이 되었고 얼마 안지나서 어드벤처 뿐 아니라 일본 컴퓨터 게임의 그림 수준이 단기간에 확 올라가게 된 것 같습니다.


에닉스는 초기에는 게임 제작사라기 보다는 퍼블리셔에 가까웠고, 미국에서 결성된 세계최초의 게임 퍼블리싱 전문업체라고 하는 EA를 모방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때는 대부분의 제작사들이 영세하거나 개인이 게임을 만드는 일이 많았어서 EA는 자기들이 직접 게임을 만들지는 않으면서, 영세한 제작자들을 영입해서 판매를 맡아주는 회사로 시작했고, 게임 제작자들을 록스타처럼 대우해 게임 패키지에 사진과 함께 소개글을 올려 체면을 세워주고 있었습니다.
미국에 비하면 풀이 작았던 일본 회사들은 게임 컨테스트를 개최해서 게임을 수집해 입상작을 제품화했고 에닉스도 EA를 흉내내 패키지에 제작자들 사진과 소개를 실었습니다. '자스' 게임 패키지에도 스튜디오 잔도라의 멤버들 사진과 소개가 있습니다. 글구 잡지 광고같은 데서는 아니메 제작의 프로가 참여해서 만들었다고 구라를 쳤습니다ㅎㅎ

실제로 스튜디오 잔도라는 회사도 아니고, 고딩들이 모여 결성한 동아리였습니다. 에닉스 컨테스트에서 자작 게임 출품해 입상한 애가 동네 친구들 모아서 팀을 결성해 게임을 만든 거였습니다. 얘들중 대부분은 컴퓨터 초짜들이었고, 아예 처음 만져보는 애들도 다수 있었다고... 그런 애들이 기계어 배워가면서 그래픽 툴도 직접 만들고 어떻게 하면 그래픽을 효과적으로 표현할지 연구해가면서 만들었다네요.
'자스' 이후 잔도라 멤버중 일부는 계속 에닉스에서 게임을 만들었고, 일부는 진짜로 프로 애니메이터가 되어서 건담 시리즈 같은 유명작에 참여하기도 했다는듯 합니다.(결과적으로 에닉스가 거짓말은 하지 않은게 되었다는...ㅎㅎ)





FM 7 버전 플레이 영상. 프롤로그를 건너뛰려면 3분 50초쯤부터.




걍 참고로, '자스'와 같은 해에 나온 대히트 어드벤처 '샐러드 나라의 토마토 공주' 플레이 영상.
그 시기에 일본에서 어드벤처 게임 그래픽이 이정도만 되도 나쁘지 않은 편이었습니다.




또 참고로, '자스'나온 다음 해에 미국에서 나온 '트란실바니아 2' 플레이 영상.
그니까 저 시기에 국제적으로도 어드벤처 그래픽이 저정도면 나쁘지 않은 편이었다고요ㅎㅎ




FM-7용으로 처음 나오고 기타 이런저런 컴퓨터로 이식되었습니다.
기종마다 사소한 그래픽 디테일 차이나 그림 그리는 속도 차이같은 게 있습니다.
당대의 다른 일본 컴퓨터들에 비하면 그래픽 성능이 추레하기 그지없는 MSX(1)에서도 MSX 치고는 놀라운 그림을 보여줍니다.

이 MSX판은 한국어 버전이 패키지로 제작되어서 국내 대형 매장에서 당당히 팔리기도 했습니다.(물론 원작자들과 상의없이 무단으로 만든 거) 메시지는 한글로 나오고, 원래 명령어 입력을 일본어로 하는 게임인데 한국어로 명령어를 치도록 개조할 기술까지는 없었던지 영어로 입력하도록 바뀌어있었습니다. 근데 일본어를 야매로 영어로 치환한 거라서 제대로된 영어는 아니었던 듯... 저는 친구가 산 걸 빌려서 했었죠ㅎㅎ





-'자스'에서 지~자스'지저스' '윙맨' 시리즈 등으로 이어지면서 에닉스는 그래픽과 연출면에서 어드벤처 게임을 컴퓨터로 보는 만화영화 수준으로까지 끌어올렸더랬습니다. 8비트 어드벤처 마지막 작품인 '지저스2'는 게임의 스토리 완성도는 차치하더라도 그래픽/사운드의 연출에선 이게 과연 8비트 컴퓨터가 맞나 싶을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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