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레히트를 다시 읽었습니다. 저에게 책읽기 가장 좋은 장소는 하늘에 떠 있는 비행기 안이에요. 읽다가 이해하기 힘들거나 재미없다고 해서 책을 탁 덮고 산책을 나가거나 딴눈을 팔 수 없는 환경이라 어떻게든 끝장을 보게 되거든요. 그래서 보통은 지상에서 읽어내기 힘든 책들을 싸갑니다만, 이번 출장 땐 오래 전에 읽었던 '브레히트 희곡선집'을 선택했습니다. 
조국으로 야기된 대소란을 지켜보는 동안 그냥 브레히트의 드라마들이 보여준 세계가 몇주 째 내내 머릿속에 떠올라 있었거든요. 

그가 <사천의 善人 Der gute Mensch von Sezuan> >이나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 Mutter Courage und ihre Kinder> 등의 드라마를 통해 드러낸 세계는, 인격적으로 분열되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세상이었습니다. 또한 그가 보여준 건 이 세상에서 자신과 타인에게 동시에 선할 수는 없으며, 모순을 통해서만 생존해갈 수 있다는 가파른 삶의 원리들이었어요. 오로지 선하기만 한 삶이어서 파멸에 다다른 '셴테'(사천의 선인)와, 자신의 소중한 사랑을 위해서 타인을 속인 <억척 어멈...>을 보면 그렇습니다.
            
그런 삶의 방식을 강요하는 세계는 분명 그릇된 세계입니다. 이번에 다시 읽으면서 제가  문득 떠올린 것은 "그릇된 가운데서는 아무것도 옳지 않다."는 어느 철학자의 말이었습니다.  형식논리로서 이 문장은 틀리지 않아요. 그릇되었다는 전제에는 옳을 수 없다는 결론까지 내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 안의 누군가가 빙긋 웃으며 반문하더군요. "그릇된 세계에서가 아니라면 대체 어디에서 옳을 수 있을까?"

저는 사회적 조건과 환경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브레히트의 세계관에 동의하지만, 그의 경제적 결정론에는 회의적인 편이었습니다. 그보다는 역사를 힘의 구조 안에서의 자율적인 순환 과정으로 보고, 인간 자체를 변화시키려 한 뒤렌마트의 작업에 더 마음이 기울었더랬어요.
그래서 브레히트의 작품이나 '그릇된 가운데서는 아무것도 옳지 않다' 같은 명제를 대할 때면, 그릇된 것과 겹치지 않고 반대편에서 살아가는/싸워가는, 어떤 올바른 힘 같은 것을 생각해보곤 했죠. 이를테면 무명인 채 고요함 속에서 선한 삶을 믿고 사는 사람들과, 그들의 작지만 의미심장한 삶의 가능성들 같은 것. 제 생각 속에서 그릇된 것과 옳은 것은 서로 밀고 밀리는 긴장의 풍경으로 형식화될 뿐이었던 거죠.

그러나 "그릇되지 않다면, 어떻게 옳을 수 있겠는가?"라는 이번 기내 독서가 던진 새롭고 대담한 자문이 마음에 듭니다. 형식미와 현실적 의미 모두를 획득한 사고가 가질 만한 의문이며 갈등과 선택 이상의 어떤 것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에요.
그런 사고 속에서, 그릇된 것과 옳은 것은 역동적으로 새로운 현실을 향해 움직여갈 수 있을 테죠. 의미론적으로는 서로를 배척하지만, 존재론적으로는 서로를 긍정하는 이 아이러니에 대해, 이 새벽에 잠시 골똘해져 기록해둡니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DJUNA 2023.04.01 25394
공지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엔시블 2019.12.31 43946
공지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DJUNA 2013.01.31 352543
125435 블로씨는 이제 좀 두고.. [12] therefore 2010.06.12 3746
125434 스밀라의雪에대한감각™ 님 보세요. [49] 오애 2010.06.12 4833
125433 토요일 점심은 뭐 드셔요? [10] 걍태공 2010.06.12 3316
125432 축구 안 좋아하시는 분들은 오늘 뭐하시나요? [13] wadi 2010.06.12 3858
125431 심리전은 북한이 한수 위인 듯 [4] 가끔영화 2010.06.12 3686
125430 수준떨어지게... [2] 늦달 2010.06.12 3275
125429 유령 작가와 방자전, 작가 이름 혼동하기. (스포일러 재중) [5] keira 2010.06.12 2968
125428 6월에 전시가 많기도 많군요. 전시 정보들 모음. [7] mithrandir 2010.06.12 4243
125427 한겨레가 왜 어려운지 알거 같아요. [47] soboo 2010.06.12 7696
125426 웹툰 하나 아주 강하게 추천합니다. [20] RoyBatty 2010.06.12 8553
125425 오늘 있었던 일.. [5] Apfel 2010.06.12 2657
125424 어떤 사람을 좋아하고 싫어하는 일이 노력한다고 될까요? [15] 비네트 2010.06.12 4039
125423 다음주 주말에 부모님 모시고 갈 만한 데 추천 부탁드려요 [2] pit_a_pat 2010.06.12 2869
125422 시베리아의 이발사를 봤어요. 요가. 핀란드식 케잌. [3] therefore 2010.06.12 3679
125421 클럽에 왜 가나요? [9] 주근깨 2010.06.12 4849
125420 이익에 따라 거짓말을 하거나 시치미를 떼는 사회. 고인돌 2010.06.12 2792
125419 축구 보면서 먹으려고 치킨을 시켰거든요. [6] 서리* 2010.06.12 5127
125418 대한민국 vs 그리스 B조예선 첫경기 불판 깝니다. [123] 01410 2010.06.12 6999
125417 드디어 시작입니다. [1] 푸른새벽 2010.06.12 2420
125416 월드컵에 관심없었는데.. [4] 진성 2010.06.12 4226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