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난 잡담 두번째

2024.01.10 16:14

돌도끼 조회 수:92

1936년, 어머니의 병세가 더 이상 호전될 가망이 없다는 소식을 듣고 절망한 로버트 E 하워드는 권총으로 자기 머리를 쏴버립니다. 겨우 30세라는 터무니없이 젊은 나이에.

당시 하워드는 대중잡지에 단편 소설들을 발표해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중이었습니다. 평생 책의 인세라는 걸 받아본 적이 없었다는 것 같고... 대부분의 작품을 잡지 투고라는 형태로 발표했던 터라, '작가'로서 대접받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살고있는 마을에서 유일하게 각종 공과금을 밀리지 않고 꼬박꼬박 내고 있었다고 하고, 잡지에 투고한 고료만으로 생활에 어려움은 없었다고 하니 그만큼 작품이 인기가 있었단 말이겠죠.

하워드가 쓴 마지막 소설도 사후에 잡지에 발표되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펄프잡지도 사양길을 타게되고 차츰 사람들 기억속에서 사라져갔습니다.
하워드의 유산은 아버지에게 상속되었고, 하워드의 아버지가 사망한 후에는 하워드 가족과는 아무 상관없는 이런저런 사람들을 거쳐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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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워드가 죽고 나서 한참이 지난 1950년, 놈프레스라는 출판사에서 하워드의 작품들 중에서도 유일하게 장편 분량(잡지에는 연재 형태로 발표)이었던 소설 '용의 시간'을 '정복자 코난'이란 이름으로 출간합니다.(이 책은 일본에서 70년대에 '정복왕 코난'이란 이름으로 출간되었다가 '모험왕 코난'으로 제목이 바뀌어 한국에도 그 제목으로 나옵니다).
'정복자 코난'이 제법 팔리자 놈프레스는 코난 소설들을 더 내기로 하고, 유명 SF/환타지 소설 작가인 L 스프레이그 드캠프롤 편집자로 고용합니다. 이때 드캠프는 단순히 편집일만 한게 아니라 몇몇 작품은 고쳐쓰기도 했다고 합니다. 드캠프 본인의 의사였는지 회사에서 시켜서한 건지는 모르겠습니다. 어쨌거나 처음에는 고용된 신분으로 시작한 일이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는 드캠프가 코난을 콘트롤하는 권리를 쥐게됩니다.
드캠프는 코난 팬이 쓴 팬픽을 코난 사가에 편입시킨 것(이것도 처음엔 회사에서 시켜서 한 거라고...)을 시작으로 본인 및 동료작가인 린 카터가 쓴 코난 패스티시 소설들을 발표해 코난 사가를 계속 확장시켰습니다.

놈프레스의 코난 소설들은 생각보다 잘 안팔렸다고 합니다.
60년대에 드캠프는 랜서북스를 통해 코난 소설들을 재간했고, 이때는 인기가 폭발해 밀리언셀러가 됩니다.


코난이 재발견되고 인기를 얻어가는 과정이 드캠프의 관리하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드캠프는 코난 팬들에게는 절대적인 존재가 됩니다. 말하자면, 하워드가 이미 승천한 코난교의 창조주라면 드캠프는 현세의 교주쯤 되는 위치였다고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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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렌 로드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한국전쟁에 참전하고 돌아온 로드는 어느날 (40년대에 출판된) 하워드의 첫 단편집을 접하고는 하워드에 빠져들게 됩니다. 이렇게 대단한 작가가 어떻게 이렇게 무명일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던 로드는 세계 최초의 하워드 연구자가 됩니다. 로드는 미국 전역을 돌아다니며 하워드와 관련된 자료를 닥치는대로 수집했고 그렇게 10년 이상 발품을 판 끝에 하워드가 쓴 각종 원고들의 원본을 입수하게 됩니다. 그중에는 세상에 전혀 알려져있지 않았던 것들도 많았습니다.
로드는 하워드의 유산을 물려받은 사람들의 권리 대행을 맡아서는 몇십년간 노력해 하워드의 거의 모든 작품(편지등도 포함)이 출판되도록 만들어 코난 뿐 아닌 작가 로버트 E 하워드의 위상을 높이는 데 기여합니다.

랜서북스 코난 소설의 히트와 더불어 드캠프와 로드는 솔로몬 케인, 정복자 컬 등 하워드의 다른 작품들도 같이 출간했고 코난 뿐 아닌 하워드 붐을 이끌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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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캠프와 글렌 로드의 사이는 처음엔 나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하워드 유산의 권리 대행 역할도 드캠프가 추천해서 로드가 맡게 된 거라고 해요(코난의 권리만 드캠프가 행사한다는 조건으로...)
그러다가 코난이 돈을 쓸어담게 되자 로열티 지급문제로 사이가 벌어져 고소전이 벌어졌답니다.
소설의 출간과 관련해서도 양측은 대립했다고 합니다. 놈프레스 이후 나왔던 코난 소설들은 전부 드캠프 관리하에 나온 드캠프 편집판이었으니, 로드는 원본을 보고싶어하는 팬들을 위해 '편집'으로 좀 많이 변형되었다 싶은 몇몇 작품을 하워드의 텍스트 그대로 출간하려 했다는 겁니다. 드캠프가 한 편집은 단순하게 문장부호나 어휘같은 걸 고친 진짜 편집 수준에 가까운 것에서 부터(하지만 문장부호 하나 바꾼 걸로 의미가 달라질 수도 있죠) 심하면 작품의 상당부분을 새로 써버린 것까지 있었다고 합니다.

이 시기쯤에 코난을 영화로 만들겠다는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제작자 에드워드 프레스먼이 아놀드 슈워제네거를 주인공으로 찜하고는 영화로 만들어보겠다고 사전작업에 들어갔는데, 원작의 권리를 가진 사람들이 다투고 있는 바람에 라이센스를 못 얻어 착수하지도 못하고 시간만 보내게 되었다고...

1977년 합의가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아마도 우리끼리 싸우느니 합의보고 영화 로열티 및 부가수익을 챙기는게 좋겠다고 생각한 듯...(77년은 스타워즈가 나왔던 해죠) 그렇게 해서 코난 일부 작품이 처음으로 하워드의 원본 텍스트로 출간되었고, 코난의 영화 계획도 정식으로 발표가 됩니다. 코난 영화는 그 후로도 이런 저런 제작 난항이 이어져서 80년대가 되어서야 촬영에 들어갈 수 있었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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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난 월드의 통제권은 여전히 드캠프가 쥐고있었습니다. 소수의 열혈팬들이나 원본에 관심을 가지지 대다수의 사람들은 드캠프 버전으로 코난을 접했으니까요. 드캠프는 그 후로도 오랫동안 일인자로서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세상에 알려진 코난 월드 최고의 권위자였으니 만화(마블), 영화, 기타 패스티시 작품들도 드캠프에게 조언을 구하는 일이 많았고 어지간한 작품들은 드캠프가 짠 코난사가의 레이아웃에 맞춰졌다고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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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말부터 미국에는 2차 하워드 붐이 불었습니다.
이 붐을 타고 새로운 코난 만화(다크 호스), 영화, 게임 등이 만들어지게 되었는데 이때는 하워드의 원본을 존중하자는 움직임이 두드러졌다고 합니다.
2000년 이후 나온 영화나 만화 등의 작품들은 드캠프가 추가하거나 변형시킨 부분들은 점점 배제하는 방향으로 가게되는 것 같습니다.

잊혀져가고 있던 코난이 재발굴되어 불멸의 존재로 떠오르게 되기까지의 과정에서 드캠프의 공로가 있었던 건 부인하지 못하겠죠. 히로익 환타지라는 장르명도 드캠프카 코난을 지칭하며 만든 거라고 합니다. 그치만 드캠프가 했던 개작을 지금의 열혈 하워드 팬들은 코난의 캐릭터나 하워드의 세계관을 심각하게 훼손한 거라고 보고 있고, 거기다 본인이 창작하지도 않은 작품의 통제권을 쥐기 위해 한 개작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어서, 한때 코난교 최고의 권위자였던 드캠프의 평가는 곤두박질치게 되었습니다.

90년대 전까지 코난이라고 하면 보통 놈프레스 출간본을 원전으로 쳤고, 일본을 비롯해 다른 언어 번역판들도 대개 이걸 원본으로 삼았었습니다. 60년대에 랜서북스 이후로 추가된 작품들은 순수 패스티시였으니 논외지만 놈프레스 버전은 관련된 사정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비외른 뉘베리의 팬픽을 제외한 나머지는) 그냥 하워드가 쓴걸로만 알고있었으니까요.
2000년대 이후 출간되는 코난 전집은 드캠프를 빼고 하워드의 원전 텍스트만으로 나오고 있는 것 같습니다.(대신 분량이 확 줄었죠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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