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제 집에서 짐을 뺐습니다.

아니 쫓겨났다는 게 아니구요. ㅋㅋ 이사 때문에요.

포장 이사니까 대충 뭐 굵직한 버릴 것들만 좀 치우고 가면 되는 것... 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사 이틀 전에 집안 어르신께서 강림하시면서 모든 것이 달라졌습니다. 그 분께서 깔끔하게 정리하는 걸 좋아하시거든요. 덕택에 이사 전날 아침에 눈 뜨고 나서 잠들 때까지 계속 집안을 다 털어서 이것 버리고 저것 내놓고... 하다가 대충 마무리 됐다 싶으니 새벽 네 시였어요. =ㅅ= 이사는 일곱 시 반 시작. orz

그런데 다들 사정이 있어서 정작 짐 나가는 상황에는 집에 남은 게 저 밖에 없었네요. 그래서 오전 내내 집에서 짐 나가는 거 지켜보고, 오후엔 저희 집에 들어 오실 분들 만나서 뭐 얘기하고 부동산 가서 조율하고 후속 조치하고... 이러고 나니 다섯 시가 다 되어가더군요. 퇴근 시간이잖아...


여기서 더욱 슬픈 것은 정작 제가 들어가야할 집은 한창 공사중이라는 겁니다. ㅋㅋㅋ 구정 연휴까지 못 들어가요.

그래서 보름 넘게 부모님 댁에 온식구가 기생해서 살기로 했는데. 암튼 그래서 귀가를 한 후 바로 쓰러져서 푹 자다가 저녁 먹고 잠시 노닥거리다가 그냥 잠들어서 한참을 자다가 눈을 떠 보니 이 시각입니다.


그래도 한 고비 넘겨서 후련하긴 한데.

여기서 또 보름 넘게 지낼 생각을 하니 참으로 난감합니다. 내 방학... 흑흑흑.



2.

보름간 남의 집 생활 하면서 필요한 물건들 챙기는 것도 일이었죠.

뭐 그냥 숙박템만 챙기면 간단했겠지만 그 동안에도 출근일이 드문드문 있고, 공문 내려오는 것 처리도 해야 하고, 가능하면 잉여질도 평소랑 비슷하게 해야 하고. 결정적으로 이삿짐에 실려 먼길 왕복하고 또 창고에서 그 세월을 보내면서 살아남을 거란 확신이 안 드는 물건... 뭐 이렇게 챙겨야 하니까요.

근데 그렇게 열심히 챙겨 놓고 집을 옮겨와서 꺼내고 확인해보니 그 물건이란 게


 1) 데스크탑 PC + 모니터 : 워낙 거대 묵직한 GPU가 달려 있어 가만히 둬도 그게 내부에서 아래로 쳐지는 게 보이는지라...;

 2) 업무용 노트북 & 서피스 프로

 3) 엑스박스 : 아들이 이걸로 하루에 30분씩 게임을 합니다.

 4) 카메라

 5) 크롬캐스트


뭐 다 전자 제품이네요... 제가 하는 게 다 이렇죠 뭐. ㅋㅋㅋㅋㅋ

그래서 이제 이것들 다 세팅을 해 놓아야 하는데 그것도 일... 아아 내 방학.



3. 

제 아버지께선 그 시절 사람 기준 매우 스탠다드한 세계관을 갖고 계십니다.

그러니까 무조건 모 당이 선거를 이겨야 한다는 신념으로 일생을 살아온 경상도인이시죠.

고로 이 집에 오면 무조건 하루 종일 종편을 ASMR 삼아 살아야 합니다. 이래서 부모님 댁에 오기 싫은 건데 그렇다고 보름간 호텔을 갈 순 없으니. ㅋㅋ


그래서 제가 성인이 된 후론 정치 관련 얘기만 나오면 분위기가 안 명랑해졌고.

그 세월이 적립이 되며 자연스레 정치 얘기는 서로에게 금기 사항이 되었습니다만.

그래도 아버지께선 종종 꺼내시죠. 거기에 대응을 하면 나중에 어머니께 저만 혼나구요. ㅋㅋㅋ 뭐 그랬었는데.


오늘도 저녁 먹으면서 아버지께서 정치 얘길 꺼내셨는데... 거의 화기애애했습니다!

이게 다 윤총장님 덕분이죠. 아주 단단히 실망하고 배신감 느끼셨더라구요.  

아니 뭐 그래봐야 결국 선거 때는 그쪽 뽑을 거라는 건 아버지 본인도 아시고 저도 알고 가족들도 모두 다 압니다만.

그래도 오늘 같은 격렬한 분노와 짜증은 일생 처음 보는 거라 인상적이었습니다. 

박근혜도 다 당연히 해야 할 일 하는 거라며 쉴드 치셨던 아버지를 이렇게 만들다니. 총장님 당신은 도대체...


암튼 아버지의 지금 정국 분석은 간단히 요약해서 이랬습니다.


 - 민주당 : 아무 일도 안 함.

 - 국힘당 : 나쁜 일만 자꾸 함. 다들 뜯어 말리는 데도 계속 함.


ㅋㅋㅋㅋㅋㅋㅋ 



4.

하지만 이런 대화를 마친 후 아버지께선 평소대로 종편을 켜셨고.

가뜩이나 몸도 피곤하니 그 ASMR을 견디기 싫었던 저는 이걸 어떡하나... 머리를 굴리다가 크롬캐스트 생각을 했죠.

아버지. 아버지는 일생에 영화 같은 건 안 보십니까. 제게 아버지 돈 안 내고 티비로 영화를 왕창 볼 수 있는 아이템이 있는데...


사실 아버지께선 제가 자라는 동안 극장이란 곳을 가 본 적이 없는 분이거든요.

자식들 다 결혼하고 난 후에야 1년에 한 번 명절 때만 자식들이 등 떠밀어서 가는, 뭐 그런 분이신지라 별 기대는 안 했습니다만.

워낙 정치를 좋아하셔서 그런지 한참 고민 후에 "그럼 뭐 서울의 봄인가 그것도 볼 수 있나?" 라고 물으시길래.

아니 그건 너무 최신 영화고 극장에서 잘 나가서 없구요. 비슷한 영화는 어떠합니까 아버지...


그래서 크롬캐스트 연결하고, 넷플릭스를 켜놓고 '한국 영화'로 검색해서 목록을 끝까지 훑은 후에 결국 '남산의 부장들'을 픽 하셨습니다.

가끔 핸드폰 알림 와서 들여다보시는 걸 제외하곤 끝까지 열심히 잘 보시더군요.

저도 옆에서 절반은 소리만 듣고, 절반 정도만 대충 봤습니다. 소재가 저언혀 제 취향이 아니라서 아예 관심도 아는 것도 없는 영화였는데 잘 만든 느낌이긴 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선 영화가 끝나자마자 '끝났네.' 한 마디 하시고선 바로 종편을... 이 방법도 안 되겠어요. ㅠㅜ



5.

'하라 히데노리'라는 만화가가 있죠.

전성기 시절엔 주로 다루는 분야가 1. 야구 2. 젊은 성인의 연애. 이렇게 두 분야로 특화된 사람이었는데요.

한국에서도 알 사람 오타쿠 은 다 아는 작가였지만 인기로는 약간 닮은 스타일의 아다치 미츠루 정도... 에 많이 못 미쳤기 때문에 요즘엔 거의 잊혀진 듯 하구요.

돌이켜보면 이 양반 대표작들이 분명 재밌긴 했는데. 말끔하게 다듬어진 정서로 흘러가는 아다치 만화들에 비해 뭔가 현실적으로 구질구질한 느낌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자꾸 주인공이 실수나 나쁜 짓을 하는데 그게 제 3자 입장에서 별로 이해해주고 싶지 않은 거죠. 덕택에 현실적인 느낌은 강해져서 좋기도 한데 문제는 대체로 작가 본인이 거기에 감정 이입해 있어서... ㅋㅋㅋ 그래서 특히 연애물을 보면 꼭 주인공 남자는 민폐이고 그랬습니다. '겨울 이야기'도 그랬고, '내 집으로 와요'도 그랬구요.


갑자기 추억의 만화가 (혹시나 해서 검색해 보니 아직도 현역이시군요) 얘길 꺼낸 이유는 오늘 짐 다 빼고난 후의 집을 둘러보며 이 장면을 떠올려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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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집으로 와요'의 엔딩인데요. 당시에도 참 멋진 연출이라고 생각했고 지금 다시 봐도 괜찮아요. 

 직장에서 학생들 졸업식 마친 후에 빈 교실 정리할 때마다 떠올리는 장면인데 그게 오늘은 제가 당사자였네요. ㅋㅋ

 이 방 저 방에서 있었던 일들, 아이들이 지금보다 훨씬 어린 모습으로 장난치고 놀던 모습들이 떠오르구요.

 이제 낡아서 이사하는 김에 폐기물로 방출한 가구, 가전들도 그렇게 애틋해(?) 보이더라구요. 수면 부족 감성 대폭발. ㅋㅋㅋㅋ


 제 다음으로 그 집에 들어가실 분들도 그 집에서 좋은 추억 많이 만들었으면 좋겠네요.

 그동안 고마웠어요 ex) 우리집.



6.

졸립니다.

앞으로 2주를 생각하면 피곤합니다.

그래도 뭐 금방 가겠죠.

일단은 다시 자야겠습니다. 이 나이 먹고 두 시간 반 자고 생활하는 건 정말 못할 짓이에요. ㅋㅋㅋ

그럼 저는 자장가나 올려 놓고



다시 자러 갑니다. 

아함...




 + 근데 왜 전 저 만화 짤들을 예전에도 올리면서 비슷한 얘길 했었다는 생각이 자꾸 드는 걸까요.

 너무 오랜 세월동안 듀게에 너무 많은 뻘글들을 올려대다 보니 종종 이럴 때가 있는데 되게 찜찜합니다. ㅋㅋㅋ

 근데 뭐 어때요. 원래 이 나이 먹으면 했던 얘기 또 하고 또 하고 그러면서 사는 거죠. 잠이나 자겠습니다.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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