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라캉이 맘에 안 들기 시작했습니다. 제 생각과 라캉의 생각이 다른 부분이 하나씩 눈에 띄는데다가 그게 사유의 기반을 이루는 치명적인 부분이란 게 그 이유입니다. 하지만 좋아하는데다 내 생각과 꼭 같은 사람의 글을 읽기와 싫어하는데다 내 생각과 전혀 다른 사람의 글을 읽기 양쪽 모두 흥미진진하고 즐거운 일이기 때문에 계속 읽어나갈 거에요. 거기다 라캉에게도 맘에 드는 부분이 있는데 글을 읽는 것과 글의 내용을 일치 - 즉 독행일치 - 시킨다면 라캉은 제게 '오독에 대한 면죄부'를 주기 때문입니다. 철학을 읽다 보면 나와 내가 읽고 있는 철학을 일치시켜서 내가 그 철학을 완전히 이해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힐 때가 많은데, 라캉은 그런 것이 없다고 합니다. 그것은 삐딱하게 봄으로써 보이는 헛 것이며, 그것을 보는 사람이 그것을 있다고 생각하면 있는 것인데다가 그게 삶에 영향을 끼치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저는 계속 무식하게 - 라캉이 원하는대로 - 라캉을 읽어나가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라캉의 욕망의 회로도를 어디서 이해하지 않는 한 삐딱하게 보기의 뒷장을 읽을 수 없어서 그 책을 읽는 것은 미루고 How to read 라캉을 읽어요. How to read 라캉의 첫 장은 '알맹이가 없는 텅 빈 제스처'(알맹이가 없다는 말과 텅 빈이라는 말이 중복인 것 같지만 지나갑시다)란 제목입니다. 저는 '대타자'란 말이 지칭하는 바가 너무 넓은데다가 그 범위가 시시각각 변해가서 자기 마음대로 갖다 붙이는 것에 대해 맘에 안 들기 때문에 대타자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은 대충 지나갑시다, 어차피 이 장에서는 대타자가 중요한 것도 아니니까. (언젠가 대타자를 위한 장이 나오면 전 대타자를 조각내버릴 겁니다..) 아쉬우니까 대타자의 적용에 대해서 하나만 까자면 1장에서 대타자는 상징적 차원에서 작용(p.19)한다고 말해놓고 그 후에 랜드로버 소유와 레비 스트로스의 음식의 3항 <> 그리고 지젝 자신의 배설의 3항을 대타자로 설명하려 합니다. 저는 지젝을 제레드 다이아몬드의 책으로 때려주고 싶다는 생각이 욱하고 올라왔습니다. 자기가 상징계에서 작용한다고 바로 같은 장에서 말해놓고 실재계와 상상계에 적용하는 이 바보는 누굽니까? 적어도 정신분석을 문화에 적용하려면 문화의 형성에 영향을 주는 상징, 상상, 실재를 분리한 다음에 해야 되는 거 아닙니까? 라캉은 오독하는 것이 잘못되지 않았다고, 그리고 거기서 의미를 뽑아내는 것이 유의미하다고 말했으니 감정을 진정시키며 지젝을 용서하고 지나갑시다.


지젝을 깠더니 좀 안정이 되는군요. 1장에서의 핵심 명제를 하나로 추리면 "인간의 발화에 내재하는 언표 내용과 언표 행위 사이에서의 해소 불가능한 간격"입니다. 말은 무지 복잡하고 어렵게 써놨는데 촘촘히 살펴보면 별로 어려운 이야기도 아닙니다. 소쉬르의 언어학 강의만 잘 들으면 이런 이야기는 이해하기 쉬워요. 사람들이 간단하게 이해하고 있는 대화 도식을 그려보면 이렇습니다.

간단하죠. A란 사람이 B란 사람에게 C를 말하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이게 전부일까요? 우리는 끊임없이 서로와 대화하고 살고 있으니 다들 이렇게 서로에게 언어의 의미를 주거나 받으며 살고 있는 것 아닌가요? 이 정도로 의사 소통에 대한 이야기의 설명이 끝날 수도 있지만, 이는 겉으로 드러난 부분이고 소통이 가능하기 위해 선행되어야 할 준비물을 보지 않으면 언어를 통한 의사 소통에서 무언가를 빼먹는게 됩니다.


선 아래는 우리가 별로 신경 쓰지 않고 지나가는 부분 - 묵시적으로 동의하는 부분 - 인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준비물'입니다. 우리는 서로의 C가 정말 C인지 확인하지 않아요. 그냥 C라고 믿는 것뿐이고 우리의 대화는 이미 저 두 개의 = 부분을 내재하고 있습니다. 서로가 말이 통할 때 누군가 그에 대해서 "그래, 나는 C'와 C, 그리고 C''가 같다고 생각해"라고 말하진 않지만, 묵시적으로 동의한다고 생각하죠. 이런 묵시적 동의는 실제 C'와 C''이 다를 때 서로가 다투게 되는 요인이 되기도 합니다. 연애하거나 우정을 쌓거나, 일하거나 어쨌거나 언어로 이루어진 소통을 하게 되면 이러한 오해는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A가 C를 C'로 이해하게 하는 것과 B가 C를 C''로 이해하게 하는 것을 저는 개개인의 '인식회로'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정체성'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대화로 그것을 유추할 수는 있지만 일치시킬 수는 없어요. 뇌를 이어붙이지 않는다면 말이죠.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알맹이가 없는 텅 빈 제스처'는 뭘까요? 위의 도식을 가져다가 그려보면 이러한 형태가 됩니다.

라캉과 지젝은 사고 실험을 해본 거죠. (저는 라캉의 욕망의 회로를 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습니다만) 언어-의식 회로를 그려보고 나니 무언가를 전하고 있으니까, 그 전하는 것을 빼버리는 겁니다. 그렇다면 무언가 나타나지 않을까? 란 생각을 했는데 아뿔싸! 화살표가 나타나게 된 겁니다. 우리는 C만 전달하는 게 아니라 "-->"도 함께 전달하고 있었어요. 아래도 보시면 텅텅 비었죠. 그런데 이게 아무것도 전달하지 않느냐? 하면 그게 아니란 말입니다. 이걸로도 충분히 A와 B는 의미를 주고 받습니다. 내용이 없는데도 말이에요! 그러고 나서 우리는 화살표의 형태에 집중하게 됩니다. 1장의 뒷부분은 그 화살표가 어떻게 생겼는가에 대해, 그리고 그 화살표의 생김새가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어요. 하나는 화살표가 너무 진해서 신경 쓰이는 이야기고, 다른 하나는 화살표가 너무 옅어서 신경 쓰이는 이야기지요. 화살표는 중립이 아니에요! 처음으로 돌아가서 "인간의 발화에 내재하는 언표 내용과 언표 행위 사이에서의 해소 불가능한 간격"이란 것은 "화살표는 중립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C를 화살표 없이 전할 수 없으므로 우리는 C를 온전히 말하지 못합니다." 정도가 되겠네요. 아차, 저 텅 빈 화살표에 대한 한국적인 예시 하나를 떠올렸는데 그건 바로 어른들한테 돈 받을 때 하는 '아니에요, 주실 필요 없어요.'라고 아이들이 말하는 언어 제스처입니다. 그야말로 이 언어의 내용은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에게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내용이지만 그 화살표가 '겸양'을 뜻하는 것이죠. 이런 것을 '텅 빈 제스처'라고 정의하고 있어요.


저는 그렇다고 해도 지젝처럼 C를 전달한다는 언어의 외면적 기능에 대해서 아예 무시 할 수는 없어요. C를 전달하기도 하는걸요. 그게 오해라거나 잘못이라거나 할 수도 있고 인간이 결코 상대를 이해할 수 없을 거라는 악몽을 꾸게 하기만, 언어는 C를 전달합니다. 화살표가 전달하는 의미도 있지만 C가 전달하는 의미도 놓치면 안 돼요. 오늘은 여기까지 읽었네요.


그리고….  다른 책들을 추천해주신 분들께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며, 그 추천 받은 책의 목록을 정리해봤습니다. 저는 제가 오독하는 것에 대해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어차피 오독이 아닌 독해에 다다르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지금 읽는 책들은 다 읽고 다음 책들을 읽겠지만요. 추천해주신 것에 대해 다시 한 번 감사 드려요.


나지오, <자크라캉의 이론에 대한 다섯 편의 강의>, <위대한 7인의 정신분석가> 등
맹정현, <리비돌로지> -- autechre님
숀 호머, <라캉 읽기>
브루스 핑크, <라캉의 주체>, <에크리 읽기> 등 -- 만약에님
김석, <무의식에로의 초대>
다리안 리더, <라캉>  --이끼님


P.S. 화살표의 의미를 전달한다는 것에 대해 이해하기 위한 도식 하나 더.


관련 글 - 무식하게 라캉 읽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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