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저녁이 있는 삶

 

작년 7월 여름 즈음이었을 거에요. 회사에서 정시 퇴근을 하고 회사 근처에 있는 영화관에서 홍상수 감독의 '다른 나라에서'를 본 날이요. 영화가 짧은 덕분에 영화를 보고 나왔는데도 아직 날이 밝았어요. 내친 김에 저는 예약도서가 도착했으니 찾으러 오라는 문자를 받은 게 생각나서 동네 도서관에 갔어요. 예약도서야 이미 내가 찜해 놓은 책이니 다른 신간 들어온 건 뭐가 있나 궁금해서 한참 동안이나 서가 이곳 저곳을 기웃거렸어요. 대충 도서관 문 닫을 시간이 가까워져서야 저는 책을 찾고 집으로 걸어왔어요. 걸으면서 어쩐지 부자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행복했죠. 정시에 퇴근해서 영화도 보고 도서관에도 가고. 아! 이런 게 '저녁이 있는 삶'이지 라는 생각을 했어요. 그 때가 아마 민주당 경선에서 손학규가 '저녁이 있는 삶'이라는 문구를 내세웠을 때였고 반응도 참 좋았던 걸로 기억해요.

 

그렇게 뿌듯해하면서 걷다가 저는 금방 꿈에서 깼어요. 제가 이렇게 저녁이 있는 삶을 누릴 수 있는 건 제가 비정규직이기 때문이라는 현실을 바로 봤기 때문이에요. 물론 똑같은 비정규직이라도 야근은 물론이고 철야까지 저녁이 다 뭐야, 주말까지 없는 고된 노동에 시달리는 분들도 많겠죠. 또 한편으론 정규직이어도 얼마든지 정시 퇴근을 하고 늘상 여유로운 사람도 있을테고요. 어찌되었든 상대적으로 책임이 덜한 직위와 적은 임금을 받기에 이렇게 여유로울 수 있다는 생각을 했어요. 이전 회사에 계속 다녔으면 연봉은 훨씬 더 많이 받았겠지만 한 달의 2/3 정도는 야근에 택시타고 출퇴근을 했을지도 몰라요. 자신감이 바닥난 상태에서 스트레스도 꽤 많이 받았을 거고요. 전 돈을 좀 덜 벌더라도 마음 편하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겠다는 생각으로 이직을 했거든요. 그래서 비록 비정규직이지만 마음에 들었어요. 아주 장기적으로는 하고 싶은 일을 위한 변곡점이 될 수도 있는 일이기도 했거든요.

 

 

2. 선물 

 

작년 추석 때 고향집에 내려갔을 때였어요. 엄마 화장대 위에서 낯선 벨벳 포장의 케이스를 발견했어요. 처음 보는 건데 이건 뭐지? 궁금해하면서 뚜껑을 열고서야 저는 그게 제가 몇 해 전에 엄마에게 선물한 스와로브스키 세트라는 걸 알았어요. 목걸이랑 귀걸이 세트였는데 세일 했을 때 구매해서 아주 비싸지는 않았을 거에요. 엄마는 그 세트를 특별한 날 외출하실 때만 하셨어요. 누구 결혼식이라거나 일가 친척들 다 모이는 명절날이라거나.  보는 사람마다 예쁘다고 엄마한테 잘 어울린다고 칭찬해서 엄마가 무척 좋아하셨죠. 제가 봐도 엄마한테 잘 어울리는 걸로 골랐기 때문에 엄마가 그렇게 칭찬을 듣고 와서 제게 이야기를 전하면 저도 참 뿌듯했어요. 그런 생각에 젖어서 혹여 어디 보석이 빠진 데는 없는지 찬찬히 보고 있는데 엄마가 밖에서 전화하시는 게 들렸어요. "아휴, 옷만 좋은 거 입으면 뭐해, 옷 좋은 거 입으면 가방도 그에 어울리는 걸 들어야 하고. 그런게 우리한테 어울리기나 해? 그리고 솔직히 그 집 형편이 지금 그런 걸 입을 때야?" 엄마가 전에 살던 동네 아줌마랑 통화를 하시는 것 같은데 다른 누군가를 흉을 보는 것 같았어요. 전화를 끊으신 뒤에 제가 거실에 나가서 무슨 일이냐고 물었어요. 엄마는 제가 속상할까봐 얘기를 안 하시겠다는 걸 괜찮으니까 뭐냐고 재차 물어봤어요. 예전 살던 동네에 저랑 동갑인 친구가 한 명 있는데 그 아이가 자기 엄마에게 백만원이 넘는 겨울 코트를 한 벌 사드렸다는 이야기를 하시더군요. 엄마는 바쁘셔서 그 동네 왕래를 안 한지 좀 된 터라 모르고 있었는데 전화로 그 동네에 살고 계시는 다른 아주머니가 그 자랑을 엄마에게 전한거죠.

 

엄마가 그 이야기를 하시면서 괜히 제 눈치를 보는 게 슬펐어요. 제가 속상할까봐 일부러 말씀을 안 하겠다고 하신 것도, 엄마는 그런 비싼 선물 필요없다고 괜찮다고 덧붙여 말씀하시는 것도, 무엇보다도 "아, 걔 효녀네"하면서 짐짓 괜찮은 척 했지만 실은 저도 속이 상했다는 것, 그리고 제가 이렇게 의연한 척 했지만 제가 속상해하는 걸 엄마는 다 알거라는 게 슬펐어요. 조금 전까지 안방에서 반짝반짝 빛을 내던 목걸이랑 귀걸이가 한순간에 빛을 잃는 느낌마저 들었죠. 친구가 잘 돼서 자기 엄마에게 좋은 옷 한 벌 해드린 게 뭐가 그리 대수냐, 게다가 겨울 코트 백만원이면 비싼 것도 아니다, 라고 하실 분도 있겠지만 제 솔직한 마음은 그랬어요. 그 회사 계속 다녔더라면 전화를 끊은 엄마에게 당장 옷 입으시라고 나도 가서 한 벌 사드리겠다고 큰소리 뻥뻥 칠 수 있었을텐데 제가 엄마에게 한 말은 고작 "내가 왜 속이 상해, 난 괜찮은데?" 였어요. 제가 빈말이라도 잘 하는 성격이었으면 지금은 아니지만 나중에라도 좋은 옷 사드리겠다고 말씀드렸을텐데, 전 그 순간에도 냉정하게 생각했어요. 아마 몇 년 동안은 내 앞가림하기도 바쁠테고, 이제 그 전처럼 돈을 잘 버는 일을 하기는 어려울거라고요.

 

명절이나 생신 때가 되면 가끔씩 후회가 돼요. 돈 잘 벌 때, 더 좋은 선물 많이  해드릴 걸 하고요. 두 분이 등산 다니시는 걸 좋아해서 소소하게 각종 등산용품을 사드리는 경우가 많았었고, 엄마한테는 악세사리, 아빠한테는 지갑 밸트 세트를 해 드린 게 거의 제일 비싼 선물이었던 것 같은데 하다못해 일본 온천여행이라도 보내드릴 걸 하고요. 그러면서 또 무슨 선물을 해드렸었나 자꾸 생각하는 거죠. 앞으로 해 드릴 수 있는 것 보다 이미 해드린 걸 생각하고 있으면 한없이 작아지는 기분이 들었어요.

 

 

3. 동생 걱정

 

지금 살고 있는 집의 계약 만료일이 작년 말이었어요. 저는 저대로 몹시 신경이 쓰였고 엄마도 걱정이 되시는지 가을부터 전화를 수시로 하셔서 집주인한테서 연락이 없냐고 물으셨죠. 추석에 집에 갔을 때도 제 집문제 때문에 계속 걱정을 하셨고요. 지금은 전세로 살고 있어서 부담이 덜한데 만약 전세보증금을 올리거나 월세를 달라고 하면 어쩌냐는 것이었죠. 그나마 조금이라도 저축을 할 수 있는 건 집이 전세이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걸 저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가을부터 겨울까지,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오면 덜컹 가슴부터 내려앉는 일이 많았어요. 

 

저는 오빠가 제 집 계약일은 모르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어느 날, 오빠가 엄마에게 제 집의 계약기간이 곧 끝날 때가 되지 않았냐며 제가 괜찮은지 엄마에게 묻더래요. 회사 그만 두고 모아놓은 돈도 없을텐데 어쩌냐고요. 엄마가 그 이야기를 하면서 오빠도 걱정하더라라고 하시는데 참...할 말이 없었어요. 제가 예전에 여기에 바람직한 시누이상은 어떤 거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어요. 그 때 몇 분 께서 정신적으로 경제적으로 독립한 시누이면 그걸로 충분하다는 말씀을 하셔서 그 때도 뜨끔했었는데 그 말이 번뜩 생각났거든요. 다 큰 줄 알았는데 여전히 나는 부모님에게, 오빠에게 걱정거리이구나. 나 하고 싶은 대로, 나름 열심히 살고 있지만 여전히 가족들은 물가에 내놓은 아이보듯 나를 보는구나 싶었어요. 이렇게 걱정 끼치면서 살고 싶은 건 아니었는데 하는 생각도 했고요. 이건 제가 혼자 독립한다고 될 문제가 아니라 가족들도 저를 독립적으로 봐 줘야 하는 것이지만 부모님이나 오빠는 분명 제가 위태롭고 때때로 안쓰러워 보이긴 할 거에요.

 

  

4. 처분을 기다리는 심정

 

집 계약은 집주인의 별다른 연락이 없는 바, 자연스럽게 갱신이 된 것 같은데 이제 제 직업의 계약기간 만료일이 곧 다가옵니다. 복직할 사람이 있고 저는 잠시 그 틈을 메우기 위한 계약직이었기 때문에 아마 더 일하기 어려울 거예요. 더 일을 하게 되더라도 복직하는 사람이 다시 업무가 손에 익을 때 까지 몇 개월 더 연장하는 정도일 거고요. 게다가 회사 내부 사정이 안 좋아서 긴축재정을 하고 있는 상황이라 더더욱 이런 생각이 들어요.

 

애초에 계약직인 걸 알고 이력서를 넣고 면접을 봤고 회사를 다니고 있지만 어쨌든 틈틈이 참 불안했어요. 내가 더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이면 나중에 정규직으로 바뀔 수 있을까 하는 헛된 희망, 내가 열심히 하는 것 보다는 미래의 그 어느 때의 상황이 더 중요한 변수가 될 거라는 좌절감, 임시직이라서 맡는 일의 한계와 그에 따른 정체감 등등 불안하고 복잡했죠. 제 진로의 변곡점이 될 수도 있는 기회라고 한없이 좋게 생각하다가도 이따금 이런 복합적인 감정들이 밀물처럼 밀려오면 어찌할 바를 모르고 그대로 우울에 빠져버렸어요.

 

누군가 제게 비정규직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저는 처분을 기다리는 사람,이라고 답할 것 같아요. 제 태도나 제 의사를 고려해준다면 고마운 것이지만 그건 말 그대로 고마워해야 하는 것일 뿐 당연한 것은 아니겠죠. 계약 만료일이 정말 코앞이라 담당자가 솔직하게 이야기를 해줬으면 좋겠는데, 회사가 어수선하고 저도 아직 일이 바빠서 말을 꺼내 볼 엄두를 못 내고 있어요. 일단 단념을 하고 오늘 퇴근하고서는 구직사이트를 몇 군데 둘러봤는데 마음이 참 갑갑해요. 하고 싶은 일을 한다는 기쁨과 저녁이 있는 여유로운 생활도 좋았지만 사실 삶에는 저녁 말고도 더 많은 게 있다는 걸 알게 된 것 같아요. 내 한 몸 뉘일 집, 부모님, 형제자매 그리고 여지껏 산 날 보다 훨씬 더 많이 남아있을 제 미래까지. 그래서 이번엔 좀 더 독하게 마음 먹고 안정적인 일자리를 구해야 할 지, 아니면 조금 더 도전해봐도 되는 건지 갈팡질팡 헤매고 있습니다. 

 

사는 게 참 재미있으면서 문득문득 무서워요. 이런 게 나이를 먹는다는 증거겠죠.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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