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년 말에 나온 거였군요. 하긴 올해가 며칠 되지도 않았으니. 27분여의 에피소드 열 개로 이루어진 애니메이션 시리즈입니다. 스포일러는 마지막에 흰 글자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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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격이 '내향' 그 자체인 40대 싱글 여성이 지구의 종말을 맞는 이야기! 라고 하니 흥미가 땡겨서 봤습니다만.)



 - 케플러라고 이름 붙인 소행성이 갑자기 짜잔~ 하고 나타났습니다. 요놈이 지구와 충돌해서 인류를 깔끔하게 멸망시키기까지 남은 시간은 대략 반년. 사람들은 당연히 하던 일을 때려 치우고 난리가 났겠죠. 뭐 이런 이야기에 나오는 다양한 부류들이 다 나오긴 합니다만 이 이야기에 따르면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미래 생각 않고, 남들 눈치 때려 치우고 본인들이 하고픈 일들에 전념한다고 해요. 맨날 술 먹고 파티를 하거나, 온세상을 여행 다니거나... 하는 식이죠. 물론 식료품점 같은 곳엔 무장 경찰과 군대가 상주하는 걸 보면 험한 짓들도 많이 했겠지만 작품에 많이 나오진 않아요.


 암튼 우리의 주인공은 당연히 캐롤. 40대 초반의 싱글 여성입니다. 부모랑은 따로 살고 언니는 온세상을 돌아다니며 일생 못했던 모험들을 하고 있는데... 이 분은 성격이 원래 그래서 아마도 종말 선고 전에도 그러고 살고 있었던 듯 하구요. 반면에 캐롤은 그런 게 성향에 안 맞는 사람입니다. 아주 내향적이고 조용하며 이런 상황에서도 딱히 하고픈 일 같은 게 없어요. 그냥 직장이나 계속 다니며 살던 인생 계속 살고 싶은데 이런 사람이 극히 드물어서 회사에 출근도 못하게 되고. 은행에 대출 갚은 것도 끝나 버려서 영 할 일이 없네요. 이것 자체도 속이 상하는데 또 살면서 마주치는 주변 사람들이 '너는 뭐 할 거야 캐롤?' 이라고 묻는 게 더 스트레스입니다. 아니 난 딱히 그런 거 없다니깐? ...이라고 생각하지만 소심해서 그 때마다 대충 아무 말이나 둘러대구요.


 암튼 이런 ISTP(...) 끝판왕 캐롤이 종말을 맞아, 그리고 종말을 맞은 사람들을 맞아 남은 생을 어떻게 살아야할지 번뇌하는 내용의 시리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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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분이 바로 '케플러'님 되시겠습니다. '감자별' 비슷한 설정이네... 했지만 생각해보니 감자별 설정은 '멜랑콜리아'에서 가져온 거였죠)



 - 애니메이션인데... 그림체가 뭔가 조석, '마음의 소리' 스럽습니다. ㅋㅋㅋ 그리고 흔한 설정이지만 그래도 좀 흥미로워 보이잖아요. 과연 이 미쳐 돌아가는 세상에서 극단적 내향인 캐롤씨가 어떻게 살기로 결심할지. 그리고 이야기의 끝은 어떻게 맺어질지가 궁금했구요. 게다가 30분 정도 밖에 안 되는 에피소드 몇 개로 끝이니까 금방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시작했습니다만. 엄... 그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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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우리의 주인공 캐롤씨. 종말이든 뭐든 난 모르겠고 그냥 나는 살던대로 계속 살게 해주면 안 되나요? 라는 성격입니다.)



 - 일단 상당히 조용한 시리즈입니다. 이야기가 주인공 성격마냥 되게 정적이에요. 물론 막나가는 주변 사람들 모습이 계속 나오고 그걸로 웃기기도 하고, 사건을 만들기도 하지만 음... 그냥 시리즈 성격이 되게 착합니다. 이런 이야기에 필수적으로 따라오는 폭력적인 사건들이 거의 없어요. 아예 없진 않지만 거의 없습니다. 그리고 코미디 면에서도 아주 얌전해요. 많이 시도하긴 하는데 그게 다 뭔가 삼가 말하기 느낌이랄까... 종말을 맞은 사람들이 이 정도 정신머리면 대체 '보 잭 홀스맨'의 인간들은 뭐하는 놈들이었단 말인가. 이런 생각도 들고 그랬네요.


 그리고 더불어서 이런 분위기에 맞게 이야기 전개도 느립니다(...) 별다른 큰 일 없이 3화 정도를 흘려 보내는데, 그게 또 정적이고 얌전하기까지 하니 초반에 집중해서 보는 게 좀 힘들었어요. 그래서 원래 어제 점심 때쯤엔 다 보겠지... 하고 시작했던 걸 자정까지 보고 있었네요.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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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확정된 종말 앞에 미쳐 돌아가는 세상!! 모습을 보여주긴 하지만 그냥 이 정도입니다. 누드로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많고 주변 눈치 안 보고 자기 하고픈 일들 맘껏 하는 것.)



 - 그래도 4화 이후부턴 괜찮습니다. 그때쯤부터 캐롤에게 큰 변화가 하나 생기고, 그게 나름 꽤 흥미롭거든요. 흥미롭고 부조리하면서 무슨 미스테리 같은 게 숨겨져 있을 것 같고. 또 이 때쯤부터 캐롤에게 함께 할 캐릭터들이 생기기 시작하거든요. 그러니 이들과 상호작용으로 개그를 하든 드라마를 그리든 하는 일이 많아지고요. 그리고 이 캐릭터들이 꽤 좋아요. 나름 정이 가면서 현실적인 느낌도 충분하고. 또 이들과 이런 저런 일을 겪으면서 주인공이 조금씩 성장해나가는 모습도 보기 좋구요. 그래서 후반부와 마무리에 꽤 기대를 하며 즐겁게 보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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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니까 이런 분들인데요. 그림체 덕에 별로 안 매력적으로 보이지만 직접 보면 현실적으로 귀엽고 괜찮습니다.)



 - 그 '마무리'가 문제였네요.

 그 문제란 글 제목에 이미 적은 바와 같습니다. 갑자기 이게 몹시 양키스럽게 건전한 방향으로 흘러가요. 이걸 뭐라 해야 하나... 뭔가 히피스러운 인생 깨달음 이야기랄까요?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자세히 말은 안 하겠습니다만. 왜 있잖아요 그, 인생의 진리를 깨달으려 노력하는 매우 건전한 미국인 캐릭터가 건전한 영화, 드라마들에서 보여주는 전형적인 패턴이랄까. 그런 게 한참 동안 펼쳐지는데 심지어 그 동안엔 캐롤이 만들어 놓은 믿음직한 친구들조차 사라지고 캐롤 혼자 이러고 저러고 하는데... 제가 개인적으로 이런 전개를 아주 지극히 혐오합니다. ㅋㅋㅋㅋㅋ 그래서 막 화가 나더라구요. 내가 이 꼴을 보기 위해 여기다 다섯 시간을 투자하고 있단 말인가... 그래서 혹시라도 이러다가 주인공이 '내가 뭔 뻘짓을 하고 있는 거지!?'라는 깨달음이라도 얻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하며 봤지만 그런 건 없었구요. 그렇게 8, 9화를 버티고 마지막 화에 들어가니 이미 세상 모든 기대는 사라진 상태...


 그리고나서 주어진 마무리는 뭐. 8, 9화의 그 충격과 공포에 비하면 아주 준수했습니다만. 좀 건전한 메시지와 감동을 위해 무리한다는 기분이 들어서 역시 아쉬웠네요. 아마 8, 9화가 그 꼴이 아니었음 그래도 훈훈하게 잘 보고 마무리했을 텐데. 그 임팩트가 제겐 너무 감당 불가였던 것...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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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극중에서 '애플비'라는 패밀리 레스토랑이 계속 언급되는데... 왠지 실제로 있는 프랜차이즈일 것 같아 찾아보니 역시나 그랬습니다. ㅋㅋ)



 - 그래서 더 길게 적기도 싫고. 마무리하자면 이렇습니다.

 사상이 건전하신 분들이라면 보셔도 됩니다. ㅋㅋㅋ 특히 '평범한 일상과 관계의 소중함' 같은 메시지를 좋아하는 분들이라면 한 번 보실만 할 수도 있어요. 게다가 이게 무려 썩은 토마토 100%를 자랑하는 시리즈거든요. 평가 수가 13개 밖에 안 되긴 하지만 어쨌든 대호평이죠. 유저 점수도 88%니까 이걸 보고 '나는 실망했다!!!'를 외치는 제가 소수자... 인 거겠습니다만.

 아무튼 제가 원했던 작품은 전혀 아니었어요. 그래도 초반에 캐롤 캐릭터를 그려내는 모습을 보며 살짝 기대를 가졌는데, 그걸 이런 식으로 끌고 가서 끝을 낼 줄은 상상도 못했죠. 게다가 주인공 캐릭터의 성장도 그렇게 설득력 있게 그려내지 못했다는 느낌이라... 걍 쏘맥님 말씀대로 '베어'나 볼 걸 내가 왜 그랬을꼬... 라고 반성하며 뻘글을 마무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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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안해요 캐롤. 당신은 좋은 사람이지만 제게는 버거웠습니...)




 + 중간에 여러 번 등장하는 승용차의 번호판이 [ CL - 2NE1 ] 입니다. 어느새 케이팝이 양키들의 무의식을 점령하기 시작했군요...



 ++ 사실 넷플릭스 앱에서 뭘 잘못 보고는 이게 에피소드 일곱개짜리 시리즈인 줄 알고 봤어요. 그러니 7편이 끝날 때도 당황하고, 끝난 후 '다음 에피소드 재생'이 뜰 때도 당황하고... ㅋㅋㅋ 정신 좀 차리고 살아야겠네요.



 +++ 종말 때문에 사람들이 죄다 직장을 때려 치우고 놀러 다니기 바쁘고 전국의 마트, 편의점이 다 텅텅 비어서 아무나 들어가서 아무 거나 집어 먹어도 되는 상황인데도 항공사들은 정상적으로 운행을 하고 다들 자기 차에 기름은 잘 채우고 다닙니다. 뭐 그냥 이야기 편의를 위해 일부러 신경을 안 쓴 거겠죠(...)



 ++++ 스포일러 구간입니다.


 그래서 대혼란 속을 정처 없이 방황하던 캐롤은 어느 날 지하철에서 수상한 포스를 지닌 여성을 발견하고, 아무 생각 없이 그 여성의 뒤를 따라가다가 버려진 고층 빌딩 고층에 존재하는 매우 수상하기 그지 없는 사무실을 발견합니다. 거기엔 수십명의 사람들이 앉아서 죽어라고 서류 업무를 하고 있어요.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 회사의 정체도 모르겠고 아무 것도 모르겠지만 암튼 신기하겠죠. 그리고 캐롤은 이게 본인이 원했던 일이라는 걸 깨닫습니다. 뭐가 됐든 평범하게, 예전과 같은 일상적이고 규칙적인 생활을 하는 거요. 그래서 그 회사에 덜컥 취업을 하죠.

 

 그런데 그 회사 사람들은 정말 한 마디도 나누지 않고 일만 합니다. 뭐 다들 캐롤처럼 종말 난리 부르스를 피해 예전에 존재했던 일상을 느끼고 싶어서 들어와 앉아 있는 사람들일 텐데. 그냥 그거 하나만으로 만족하고 다른 쪽으론 마음의 여유가 없는지... (사실은 그냥 캐롤 캐릭터에게 할 일을 주기 위한 편의적 설정 같습니다만. ㅋㅋ) 그렇게 삭막하게 일만 하거든요.


 근데 그러다 캐롤이 곤경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걸 슬쩍 도와주는 직원이 나타나고. 캐롤은 신이 나서 그 쪽에 호감을 표하지만 그 쪽에서 싸늘하게 거부를 하네요. 그래서 우리 주인공님은 다시 우울해지지만 때마침 벌어진 야근 이벤트(?) 덕에 결국 그 직원 포함 친구를 둘이나 만드는 데 성공합니다. 그러고나선 동료 직원의 죽음도 겪고, 무슨무슨 일들이 벌어지고 하면서 캐롤은 이 삭막한 분위기를 바꾸겠다는 결심을 해요. 그래서 인사과 서류를 맘대로 가져가서(...) 사람들 이름을 다 암기한 후에 하나하나 이름을 불러주고. 사무용품 밖에 없던 자기 자리에 개인 애장품도 장식해 놓고. 등등의 노력을 하며 서서히 이 정체불명 사무실 사람들의 분위기와 회사 문화를 바꿔 놓게 되죠. 그런데... 그렇게해서 대충 살만해지고 나니 딴 생각이 들었는지. 갑자기 난데 없이 '완벽한 파도를 만나겠어!'라며 서핑 여행을 떠납니다. ㅋㅋㅋ


 아니 이게 초반에 암시가 있긴 했어요. 주변 사람들이 "넌 멸망 전까지 뭐 할 건데?"라고 물어봤을 때 엉겁결에 '서핑을 배울 거야'라고 답을 하고 그것 때문에 더 곤란해지는 장면이 있었거든요. 중간에 ENFP 언니가 나타나서 캐롤을 끌고 다니며 심경의 변화를 일으키는 전개도 있었구요. 하지만 갑자기 숙련된 서퍼처럼 파도를 타며 전세계를 돌면서 '완벽한 파도란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하고 명상을 하고 깨달음을 얻기 위해 숲속 신비로운 사부를 만나 향정신성 약품도 드링킹하고 그러면서 꾼 꿈 속에서 환상적인 메시지도 얻고... 이러고 있으니 제가 짜증이 안 나겠습니까. ㅋㅋㅋ


 암튼 그 과정을 거쳐 캐롤이 얻는 깨달음은 이겁니다. 사실 완벽한 파도는 늘 내 곁에 있었다. 그동안 내가 탔던 파도 하나하나는 다 다른 의미로 내게 완벽한 파도였다. 난 그것도 모르고 괜히 세상을 떠돌았구나. 이런 바아보!!! ㅠㅜ 그러고선 이제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죠.


 마지막 에피소드는 갑자기 화자가 바뀝니다. 회사의 인사팀장쯤 되는 사람이 '전문적, 프로페셔널해야 할 우리 사무실 분위기를 괴상하게 망쳐버린 범인을 색출하라'는 미션을 받고 직원들을 감시, 관찰하면서 주절주절 떠드는데요. 대충 결론은 이거에요. 이 모든 건 사람들 사이에 '관계'를 만들어내려 노력한 저 캐롤 때문이고. 난 그걸 알아내기 위해 이들과 어울리다가 나 또한 물들어 버렸다. 캐롤 짱. 캐롤 만만세... ㅋㅋㅋㅋ

 그래서 캐롤이 퇴근 후 사무실 직원들과 즐겁고 행복하게 어울리는 모습 위로 점점 더 가까워지는 소행성 케플러의 모습을 보여주며 바로 끝입니다. 해피엔딩. 세상이 내일 멸망하더라도 니들은 사과 나무를 심든 뭘 하든 암튼 일상을 소중히 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잘 해주라는 거죠. 네 알겠습니다. 끝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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