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5(소설) 장르소설

2013.04.20 12:13

Giscard 조회 수:2195

(주로) 무협소설에 대한 이야기

 

 

80년대 대학생들은 데모나 시험이 끝나면 만화가게로 가서 만화를 보고 [무협지]를 읽었습니다. 배를 채우고 뇌는 식히기 위해 군것질도 하고 컵라면도 먹고 친구를 만나면 술을 마시거나 오락실을 가거나 당구를 쳤습니다.

( 매우 전형적인 B급청춘의 데일리 라이프)

최루탄을 마시고 돌던지고 욕하고 가끔 경찰서에서 뚜들겨 맞고 나오던 날도 만화가게에 들러 배를 채우고 감정을 삭히고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 때 만화나 무협지는 킬링 타임용 소도구였지만 가끔 근사한 것들이 있었습니다. 만화로는 신일숙의 [아르미안의 네딸들]을 기억하시는지요.

불혹이 된 지금 봐도 신비할정도로 재밌습니다. 신화,역사,전설,환상이 절묘하게 섞여있고 실제의 역사와 픽션이 교묘하게 짜여져 있는 이 만화는 스토리도 좋고 그림체도 멋지고 주인공 네 딸년의 이야기가 너무나 환상적이라

( 특히 첫째의 비극적인 운명) 지금도 두근두근할 정도. 아름다운 둘째 딸의 이야기는 성경에 등장하는 페르시아의 크세르크세스 대왕의 일대기와 교묘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 상상력이 정말 놀라워요.

 

남학생들은 만화만큼(만화는 이현세와 허영만이 주류)무협지를 자주 읽었는데 이 때의 무협지는 [공장무협]이라고 해서 알바생을 시켜서 며칠만에 한 질(보통5~10권)씩 찍어내는,내용은 물론 거의 낙서수준인데다 저자는 대부분 [사마달과 그 외]. 종이질도 형편없고 세로로 쓴 글인데다 (중국무협지도 내용이 황당하지만) 황당함에서 뻔함,식상을 넘어서 [절벽의 기연]이나 [상고 선대인의 후세를 위한 비급][ 미녀와의 기행담]도 사라지고 첫장부터 ‘음화하하(장소성)’' 쿠하하핫(광소성)‘’ 크흐으윽(비탄‘같이 지문없는 대사로 시작하여 번쩍-우르릉-쾅(효과음, 검이나 장풍을 쏘는 소리)으로 도배를 하는데 스토리가 없으니 결말은 산으로 바다로 가고 최종적으로 주인공은 신으로 승천하고 악당은 악마로 진화하여 대판싸우면서 산과 바다도 쪼개지고 십만, 백만이 죽어나가는 우주계의 신마대전으로 스토리가 날라가게 되는데...

 

대체 내가 이걸 왜 읽었을까요? 단순히 글자를 좋아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사마달로 도배되는 이 세계에 [야설록]이라는 강력한 라이벌이 등장하여 [기정무협]이라는 웃기는 시리즈를 내놓습니다. 사마달은 정통무협(즉 정통낙서), 기정무협의 야설록은 [복사]작가였습니다. 그냥 베끼는거에요. 원작이 녹정기인줄 모르고 봤다가 이야!하고 감탄을 했는데 알고 보니 그게 녹정기였던 경험도 있습니다. 단순히 표절이 아니고 그냥 복사를 한 수준인데 그 시절 그에 대해 별 말이 없었던 것은 복사(표절)의 부작용이 너무나도 미미(벌레수준)하여 하는 사람이나 원작자나 보는 사람이나 아무도 관심이 없었음.

야설록은 은근히 수완이 좋아서 무협지 작가에서 출발하여 프로덕션을 차려서 만화대본을 쓰기도 하고 일간지에 연재도 하는 정도로 발전합니다.( 조승우, 수애주연의 [불꽃처럼 나비처럼]이 그가 쓴 소설이 원작입니다.)

 

90년대 마침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 [좌백] 과 [진산]이 등장합니다. 좌백은 철학전공을 한 분으로 처음에는 단순히 알바정도로 무협계에 들어왔다가 본격적인 전업작가가 되는데 좌백과 진산의 소설은 스토리의 개연성이나 세계관이 딱 잡혀 있는 제대로 된 장르소설입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좌백의 소설은 [금전표][독행표] 표사 시리즈인데 이 소설은 기존의 무협소설이 주는 성장담, 자잘한 재미, 악당과의 혈전과 무공수련, 추리, 활극이 잘 짜여져 있습니다, 웬지 읽고나면 기분이 유쾌해지는 책입니다.

좌백의 대표작이며 한국식 무협소설의 최고봉은 [혈기린외전]입니다.

1~ 3부로 짜여진 혈기린 외전은 정말 최고입니다. 재미가 극한입니다. 이 책은 복수(1부) 어드벤처(2부) 영웅담(3부)로 주제가 나뉘는데 한번 손에 잡으면 눈을 뗄 수가 없어요. 단순히 재미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생각을 많이 하게 하는 작품입니다. 무협소설이 이런 느낌을 준다는 것이 참으로 특이한.

 

 

진산은 좌백의 부인으로 무협소설뿐만 아니라 만화원작이나 로맨스 소설도 쓰는등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는데 진산의 대표작은 [사천당문]시리즈가 있습니다.

좌백의 소설이 남성적 치밀함이 있다면 진산은 여성적인 아기자기함이 있습니다. 좌백과 진산의 소설에는 장르소설에 대한 애정이 묻어 있고 한국적 감수성이 살아 있어서 그런지 해리 포터나 반지의 제왕을 읽었을 때 느낀 이질감이 없어요.

( 나는 마법보다는 무공이 좋아요. 둘 다 초능력이지만 무공이 훨씬 리얼하니까.)

 

 

요즘 네이버에도 웹소설이 웹툰처럼 등장했더군요. 이 웹소설의 수준이나 재미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뛰어나서 눈을 못 떼게하는 ( 스마트 폰으로 보다가 마침내 근시가 생겼어요)

이제는 더 이상 지하철을 기다리는 몇십분 짧은 막간이 전혀 외롭지 않은 그런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무엇을 상상하든 미래는 지금보다 더 눈이 나빠질거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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