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강원도에서 일을 보고 돌아오는 저녁길,  서울 진입로에 차들이 죽 늘어서 있었습니다.  두 개 차선이 하나로 통일되었는데, 어느 아주머니 운전자가 앞차를 가볍게 들이받았나봐요. 피해차 운전자가 나와 사납게 외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여자가 왜 이 시간에 차를 몰고 나와서 도로 막고 사고까지 일으키냐?"
그러자 그 아주머니가 이렇게 맞받아치더군요. " 일단 미안하다. 내가 부담해야 할 경비는 얼마든지 청구해라. 11월이지만 날씨가 참 좋지? 이런 날 그집 여자는 놀러나 다니는 모양인데 난 일하러 나왔다가 너무 피곤해서 실수했다."
저는 혼자 이렇게 중얼거렸을 뿐이죠. '다친 사람이 없으면 된 거지. 원래 피곤한데다 지루하기까지 하면 실수가 잘 발생하는 법이에요. 토닥토닥~'

도로가 마냥 지체되는 건 참 지루한 일이죠. 그럴 때, 한가한 것과는 다른 시간의 지루함 속에서 저는 "더 지루한 것을 제공해보지 그래, 더 지루한 거 없어?" 라고 외쳤던 아티스트들의 (특히 보들레르) 마음을 이해할 것 같더라고요. 
언젠가 앤디 워홀의 영화가 호암아트홀에 걸렸을 때, 한없는 지루함 속에서 문득 '무시간성이 이런 것이구나' 하는 느낌에 사로잡혔던 경험이 있습니다.  그 감각이 여태도 생생해요. '무시간성'은 역사에서 문득 벗어나는 현상이며 불교에서 말하는 '방하착'과 흡사한 체험을 낳는다는 것이라는 걸 깨달았죠.  하지만 놓아버리는 것, 탁 놓아버린다는 건 힘든 일이에요.

다리를 건너올 때 커다란 하얀 새 두 마리가 강물 속에 서 있는 것을 봤습니다. 그들은 강물 속에서 순식간에 늙어버린 것처럼 보였어요.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폭삭 무너져 내릴 것처럼 급격한 자연사의 과정에 있는 것만 같았습니다. 저의 환상은 시간적인 것이었고, '내가 좀 현실에서 비껴나 있는 거구나' 싶었습니다. 피로 탓이었겠죠.
누구나 헤라클레이투스의 강물에 발을 담그고 있지만, 그 사실을 실감하며 사는 이들은 드문 법입니다. '존재'라는 말 속에 온축되어 있는 것은 바로 그 강물로 인해 발이 시린 자들의 '각성적 현재'가 아니겠습니까. 

가령,  발이 시려서 갑자기 강물에서 발을 뺀 이가 있다고 해봐요. 그리고 햇빛 아래에서 발을 말렸다고 해봐요. 발을 말렸다는 것은 '무시간성'의 차원으로 접어들었다는 뜻이라고 해봐요. 시간의 물기를 말려도 그 흔적은 남습니다. 
강물 속에 있을 때 발은 아우라를 풍기고, 강물 밖에서 발을 말리면 흔적이 남는 것이죠. 얼룩은 희미하고 자욱은 뒤틀려 있습니다. 어쩌면 그런 대가로 발을 강물에서 쑥 빼서 시간과 시간 사이로 걸음을 옮겨놓을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강물에서 탈출하는 다른 방법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간밤엔 침대에 누워 모험 없이 경험이 쌓일 수는 없다는 생각만 만지작거렸습니다. 유럽어인 '아방튀르 adventure' 는 모험을 이렇게 정의하고 있지요. '모험은 영웅이 접하는 자의적인 숙명이 아니라 그가 자신의 힘으로 찾아낸 놀라운 운명을 통해서 그에게만 규정되는 위험한 자격시험이다.'

잠자리에서 좀더 지루한 것이 필요해 오랜만에 이길수 시인의 시집을 뒤적였습니다. '​마방진 magic square'을 구현한 이런 시-  가로세로 읽기- 의 매력은 제가 품고 있는 수학에 대한 애정을 반감시켜주는데 있답니다. -_-

꽃 이 피 고 나 비 가 날 아 가 지
이 파 리 로 만 든 악 기 다 시 금
피 리 리 불 어 보 고 는 그 리 도
고 로 불 고 이 이 운 나 일 까 바
나 만 어 이 하 든 하 는 지 울 라
비 든 보 이 든 지 오 내 울 음 보
가 악 고 운 하 오 라 마 음 이 면
날 기 는 나 는 내 마 음 이 난 날
아 다 그 일 지 울 음 이 난 다 아
가 시 리 까 울 음 이 난 다 는 가
지 금 도 바 라 보 면 날 아 가 지

                                         - 이길수 <11X11 마방진>

덧: 제목은 한가함과 지루함의 차이를 잘 설명해 놓은 책, 고쿠분 고이치로의 <인간은 언제부터 지루해했을까>를 차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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