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 [동경의 황혼] 보고 왔습니다

2024.01.01 16:19

Sonny 조회 수: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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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즈 야스지로의 영화를 "가족 영화"로 분류하는 것이 과연 정확한 것인지 질문해보게 됩니다. 왜냐하면 오즈 야스지로 영화 속의 가족들은 아버지가 없이는 성립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를 "아버지 영화"로 분류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고 생각합니다. 대표작으로 뽑히는 [동경 이야기]는 자식들에게서 멀어진 것을 실감하는 아버지가 마침내 오랜 반려자마저 잃으면서 며느리와 가족의 최후를 만끽하는 이야기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안녕하세요] 역시 무뚝뚝하고 엄격해보이는 아버지가 가족에 웃음을 가져다주면서 그 우스꽝스러운 마을의 일부로 마침내 합류하게 되는 이야기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다른 동급생이나 과외선생님들과의 일화들이 얽혀있지만 이 형제가 최후에 최고로 갖게 되는 추억은 아버지에게서 옵니다) 다른 대표작들도 아버지와 딸의 이야기이면서 딸을 시집보내는 아버지의 이야기에 더 가까워보입니다. 가족을 구성하는 최후의 주춧돌이자 해체되는 가족을 향하는 시선의 주인은 늘 아버지입니다.


[동경의 황혼]은 오즈 야스지로의 필모 중 가장 이색적인 작품입니다. 비록 가족의 해체나 부녀의 이별을 그리더라도 그 안에는 서로 이해하고 존중하려는 따스함이 있었습니다. 물론 이건 제가 [동경 이야기]를 제일 처음으로 봐서 갖는 선입견일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분명한 건, 다른 작품들 속에서는 종종 우스꽝스러운 장면이나 아주 비정한 일은 없을 것이라는 바운더리 자체가 작품 내에 형성이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동경의 황혼]은 온기나 웃음기가 거의 없습니다. 둘째딸로 나오는 아키코의 굳은 얼굴을 따라다니다보면 답답함만 계속 쌓여갑니다. 아버지의 애정 같은 것은 거의 확인할 수 없습니다. 딸과 아버지는 소통에 계속 실패합니다. 아버지는 딸을 이리 와보라고 한 다음 다그치고, 일단 꾸지람을 들은 딸은 모든 기대를 접은 채 그저 방황하죠.


이 영화는 아키코의 이야기이겠지만 영화의 시작과 끝은 아버지인 슈키치입니다. 맨 처음 도쿄의 풍경이 나오면 퇴근 후 골목길의 선술집을 찾는 슈키치가 등장하면서 영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거기서 그는 첫째딸 다카코의 남편이 같은 술집에 와서 늦게까지 술을 먹고 모자를 두고 갔다는 걸 알게 됩니다. 집에 돌아와보니 다카코가 와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딸이 결혼생활을 그다지 원만하게 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됩니다. 딸은 남편이 자꾸 신경질을 내고 아기까지 때렸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슈키치는 장인어른으로서 직접 사위를 만나러 가보기로 합니다. 그러나 막상 만났을 때, 그는 별다른 이야기를 하지 못합니다. 


영화는 아버지의 시선은 딸의 내면에 어디까지 닿을 수 있는지 묻습니다. 그 답은 다소 맥빠집니다. 아버지는 딸을 이해못합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성별의 차이도 있겠고 가부장제에서 책임자와 피책임자의 한계일수도 있습니다. 딸을 어여삐여기고, 딸을 시집보내기 싫어하는 그 아버지들 특유의 소유욕과는 전혀 다른 문제가 있습니다. 딸을 '출가외인'으로만 보는데서 비롯되는 문제일지도 모릅니다. 슈키치가 정말로 딸을 염려하는 마음이 있었다면 사위를 꾸짓지까지는 못해도 최소한 부탁은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손자를 자식보다 이뻐하는 건 불가능할 것 같다는 사위의 쉰소리만 듣다가 그냥 돌아옵니다. 


영화 초반 선술집에서 슈키치의 옆에 있던 남자는 슈키치에게 혹시 진주 만드는 일을 하냐고 혼자 억측을 합니다. 슈키치는 자신은 은행에서 일을 한다고 합니다. 진주는 희생의 상징입니다. 고통을 견디고 나서야 얻을 수 있는 결실이죠. 이것은 자식을 키우는 부모의 노고에 대한 은유로도 들립니다. 그러나 진주가 자식이라면, 이것이 얼마나 쉽게 상하고 훼손되는지에 대한 것도 동시에 생각해보게 됩니다. 진주는 다른 광물과 달리 사람의 손때나 습기에 굉장히 약한 보석이니까요.


슈키치는 첫째딸 다카코가 왜 괴로워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문제의 핵심인 사위에게 직접 닿습니다. 그렇지만 어떤 해결책도 내놓지 못하고 방치만 합니다. 이것은 본격적인 문제인 둘째딸 아키코와 아버지 슈키치의 갈등에 대한 예고처럼도 보입니다. 문제를 알고 맞닥트릴 수도 있는데 무기력한 아버지라면, 그 문제를 알지도 못하고 닿지도 못하는 경우 딸의 고통을 아버지는 해소해줄 수 있을까요. 난이도가 높고 훨씬 더 섬세해야하는 이 문제를 아버지는 당연히 해결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영화는 실제로 그렇게 흘러갑니다. 슈키치는 아키코가 왜 맨날 뚱한 표정을 짓고 별 이야기도 안하는지 전혀 모릅니다.


구조로만 보면 영화는 원의 테두리에서 점점 중심으로 들어가는 듯한 것처럼 보입니다. 아버지의 시선을 빌렸을 때 영화는 첫째딸의 문제까지는 알아차립니다. 왜냐하면 다카코가 자기 집을 나와서 아버지 집으로 다시 와있고 문제를 직접 말해주니까요. 아버지는 사위를 만나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둘째딸 아키코의 문제까지는 전혀 눈치를 못챕니다. 관객들도 그 이유를 알지 못합니다. 그냥 아키코는 시종일관 남자친구를 찾아 헤맵니다. 아키코가 사실 원치않은 임신을 했고 남자친구는 이를 계속 외면하고 있었다는 문제가 마침내 밝혀집니다. 이것이 영화의 가장 큰 갈등이지만 가족들은 이를 모릅니다. 


아키코가 고모에게 돈을 빌리려했거나 늦은 밤까지 다방에서 기다리다가 경찰서에 가서 조서를 쓴 것은 다 자기를 임신시킨 남자친구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슈키치는 왜 그러냐고 다정하게 묻지 않습니다. 이야기를 들어보고 딸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냥 딸이 불량해졌고 어리석은 반항을 한다고만 생각합니다. 아버지란 존재는 딸이란 존재와 소통을 하지 못합니다. 이것은 단지 성격 차이나 세대 차이가 아니라, 한 가족 내에서 아버지와 딸의 근원적인 간극이라고 영화가 말하는 것 같습니다. 


동시에 개인과 가족의 관계를 생각해보게 됩니다. 한 개인은 가족이라는 단위의 공동체 안에서 가장 외롭고 절실할 때 혈연에게 과연 충분한 이해와 지지를 받을 수 있는가. 이 영화는 아니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한 집에서 먹고 자고 같이 시간을 공유해도 결국 각자 방이 나뉘어지듯, 가족은 일시적으로만 거실 혹은 식탁에 모이는 개인들의 모임에 불과합니다. 슈키치는 아키코와 같은 공간에 거의 있지 않습니다. 딱딱한 얼굴로 어이! 하고 딸을 소환할 때만 이 두 개인은 부녀의 단위에서 잠깐 합쳐질 뿐입니다. 


이같은 거리감은 아키코와 다카코의 관계에서도 관찰됩니다. 다카코는 실질적으로 이 집의 어머니 역할을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다정하고 남을 챙길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그 역시도 아키코가 왜 경찰서에 끌려갈만큼 홀로 다방에 있었는지, 왜 갑자기 몸이 안좋다고 하는지는 전혀 모릅니다. 그리고 그는 아키코가 눈치챌때까지 어머니의 존재를 밝히지 않습니다. 이 가족들은 각자 비밀이 있고 그 비밀이 어쩔 수 없이 공유되거나 공유된 이후에도 그저 무시됩니다. 


흥미로운 것은 아키코와 어머니 기쿠코의 관계입니다. 아버지는 딸의 비밀을 모르지만, 딸은 아버지의 비밀을 알아차립니다. 어머니가 아버지의 부하직원과 눈이 맞아서 가족을 떠나 도망쳤다는 사실을 이후 알게 되죠. 비록 아키코가 슈키치를 완전히 이해한 것은 아닐지라도, 어느 정도는 아버지를 가엽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가족의 비밀조차도 결국 일방적으로 공유됩니다. 비밀을 알면서 누군가를 조금이라도 이해하게 되는 이 상호작용이 딸에게는 일어나지만 아버지에게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아버지는 딸들에게 이해받을 기회를 갖지만, 딸은 아버지에게 이해받을 기회를 갖지 못합니다. 


영화는 잔인하게도 가족들만 모르는 상황을 보여줍니다. 아키코의 남자친구와 같이 어울리던 남자들은 아키코가 왜 그렇게 발을 동동 구르며 남자친구를 찾는지 알아챕니다. 그리고 아키코를 조롱합니다. 더럽혀진 여자가 되었다면서 자기들끼리 낄낄대죠. 영화 속에서 아키코는 계속해서 외로워집니다. 그렇지만 가족들은 아무도 이걸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결국 아키코는 혼자 임신중지 수술을 받습니다. 그리고 술에 잔뜩 취해있다가 남자친구를 우연히 재회하고 따귀를 날립니다. 그렇게 자리를 떠난 아키코는 전철에 치입니다. 이 사건은 프레임 바깥에서 일어났기에 이것이 사고인지, 아니면 자살인지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아키코는 병원에서 계속 죽기 싫다고 말합니다. 다카코와 슈키치는 아키코가 나을 것이라며 격려합니다. 그렇지만 영화는 바로 점프컷을 하며 상복을 입고 있는 다카코를 보여줍니다. 다카코는 어머니를 찾아가 다 당신 탓이라며 매몰차게 한마디를 던지고 떠납니다. 어머니는 도쿄를 떠나 훗카이도로 향합니다. 기차에서 그래도 큰 딸이 자신을 찾아주길 고대하지만 다카코는 찾아가지 않습니다. 


[동경의 황혼]에서 가족은 조각조각 해체됩니다. 다카코는 다시 집으로 돌아가 남편과 함께 살아보겠다고 하고 아버지 슈키치는 아키코가 없는 집에서 혼자 남겨집니다. 영정사진 앞에서 딸을 기리는 그의 얼굴에는 그늘이 드리워져있습니다. 이 영화에서 행복해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가까이 있으면서도 비밀을 눈치조차 못챈 가족들과, 타인으로서 비밀을 비웃는 비열한 사람들만 있습니다.


이 영화는 [도쿄 이야기]가 만들어진 다음에 나왔습니다. 도쿄라는 지리적 공간을 제목에서 공유하는 이 영화는 [동경 이야기]의 느슨한 속편처럼도 보입니다. [동경 이야기]가 도쿄 바깥에서 살면서 자식들을 상경시킨 부모가 자식들의 자본주의적 응대에 당황하며 살던 곳으로 내쫓겨나는 이야기라면, [동경의 황혼]은 아버지가 도쿄에 자리잡으면서 자본주의적 응대를 딸에게 했을 경우 벌어지는 가장 최악의 사태를 보여주는 이야기일지도 모릅니다. [동경 이야기]가 아버지의 부성애와 외로움을 눈치채지 못한 야속한 자식들을 힘없이 수긍하는 이야기라면, [동경의 황혼]은 그 반대로 가부장으로서의 거리감과 자식의 외로움을 눈치채지 못해 야속한 부모를 자성하는 이야기일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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