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스박스 잡담

2023.12.29 18:25

돌도끼 조회 수:110


도스박스는 도스를 에뮬레이트해주는 프로그램입니다. 말은 도스 에뮬레이터지만 단순히 운영체제 도스만이 아니라 도스가 현역이던 시절의 컴퓨팅환경 전체를 다 재현해내는  물건입니다.

안그래도 IBM PC 환경은 다른 기종들처럼 한 회사에서 통일성있게 물건을 만드는 게 아니라 중구난방인 걸로 유명한데 거기다 10년이 넘는 도스의 군림기간 동안, 그러니까 PC란게 생겨난 거의 초창기부터 워크스테이션급으로 성장할때까지의 발전과정 전체를 다 커버하고 있습니다. 설령 실제로 도스 컴퓨터를 써봤던 사람이라도 사는 지역에 따라서는 몰랐던 것들, 예를 들어 한국에서만 산 사람에게는 생소한 CGA 컴포지트 컬러라거나, 이름은 들어봤을 지언정 실제로 소리를 들어본 적은 없는 탠디 사운드. 일찌감치 망해서 아는 사람도 별로 없는 CMS 사운드 카드 등등도 구현이 되어있고, 공식버전이 아닌 방계쪽으로 가면 생전 듣도보도 못한 레어한 장비들도 지원합니다. 도스박스 하나면 당시에는 꿈도 못꾸던 온갖 걸 다 때려박은 부르조아 시스템을 가상으로 구현해낼 수도 있죠.

심지어, 하드웨어 아키텍처는 전혀 다르지만 같은 도스를 OS로 사용했다는 걸 빌미로 일본산 갈라파고스 기종인 PC-9801까지 덤으로 에뮬레이트 해주는 버전도 있습니다.(오히려 얘가 사용편의성이나 일부 재현도에서는 98 전용 에뮬을 능가하는데다 98 에뮬레이터에는 없는 화면비율 보정 기능이 있습니다.(98에뮬들은 실제 98에서 나오는 화면과는 다른 찌그러진 화면으로만 실행됨))
이런 다양한 기능을 구현해내면서도 크기는 30메가도 안되고(본가쪽은 10메가도 안됨) 램도 겨우 백메가 정도 밖에 안먹습니다. 실행속도는 요즘에는 어지간한 똥컴에서도 도스가 현역이던 시절 존재하던 최상위기종급은 됩니다. 간단히 줄여 말하면 가볍습니다. 요새 엥간한 프로그램들의 용량이나 요구사항이 염치를 모르고 올라가기만 하는 추세에 무척 바람직하죠. 제가 보기에 도스박스는 에뮬레이터의 왕이라고 부르기에 손색이 없는 것 같습니다.

저한테 있어서 도스박스 최고의 장점은 쓰기 쉽다는 거였어요. 도스박스를 어렵다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많고, 도스박스에서 자동으로 게임을 실행시켜주는 런처 프로그램도 성행하고 있죠. 윈도우 95가 도스를 몰아낸지도 30년 가까이 되어가는 지금 상황에서 실제 도스를 안써본 사람들이 무척 많아졌고, 도스라는 운영체제 자체가 모르는 사람에겐 한없이 어려운 물건이긴 하죠.


근데 에뮬레이터란게 원래 생태가 그렇더군요. 실물을 써본 사람들, 실물에 대해 잘 알고있다는 전제를 깔고 나와요. 그 써클 바깥에 있는 사람들한테는 한없이 불친절합니다. 생전 게임기하고는 인연을 쌓지 않고 살아온 저같은 사람은 각종 게임기 에뮬들도 쓰기가 어렵습니다. 무슨 설정할 게 그렇게 많은지...
다른 컴퓨터 에뮬레이터는 이런저런 기본 파일들을 구해야한다든가 운영체제를 깔아야한다든가 하는 사전 밑작업이 있어야지만 쓸 수있는게 많고 그 과정이 좀(모르는 사람에겐 한없이) 복잡한데 도스박스는 그 자체가 운영체제를 에뮬레이트하고 있는 거니까 그냥 도스박스를 설치하고 실행만 시키면 디폴트 상태에서도 어지간한 것들은 바로 돌아갑니다.(공식지원은 아닌 장비들(미디라거나 부두라거나)에 한해서 부가적인 파일이나 설정이 필요하긴 합니다)

물론 프로그램에 따라서 설정을 따로 잡아줘야 하는 경우도 많긴 하지만 그건 에뮬레이터 실행의 문제가 아니라 원래 도스의 생리가 그런거니까... 그 이후는 도스 시절을 얼마나 잘 기억하고있느냐에 따라 결정되겠고... 꼭 컴퓨터에 도사가 아니었다 해도 게임실행과 관련된 부분만큼은 빠삭했던 사람이라면 도스박스는 생각보다 쓰기 쉬운 물건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 도스보다 도스박스가 훨씬 더 쓰기가 쉽습니다.
예를 들면, 도스로 게임좀 해보신 분이면 기본 메모리를 1바이트라도 더 확보하려고 온갖 난리를 떨었던 기억이 있으실텐데 도스박스는 실제 도스에서는 TSR 띄워야 했던 기능들(마우스등의 각종 드라이버)이 패시브로 다 잡혀있고, 언제나 600KB 이상의 메모리가 확보되어 있어서 특별히 까다로운 소수 몇몇을 빼면 메모리관리를 따로 할 필요가 없습니다.
독자적인 메모리 관리자 때문에 돌리기 까다로운 걸로 악명높았던 울티마 7같은 것도 디폴트 상태에서 실행만 시키면 바로 뜹니다. 실제 386에서는 실행시키고 나서 하드를 한 5분쯤 긁어댄 다음에야 뜨던(다소 과장된 표현) 울티마 7의 시작화면이 도스박스에서는 거의 바로 떠버립니다.


하드웨어 설정을 바꾸는 건 config 파일에 적혀있는 글자들을 수정하는 걸로 바꿀 수 있습니다. 이 config 파일 안에 워낙에 설명이 (영어로) 장황하게 나와있어서 매뉴얼 같은 거 따로 안챙겨도 이거만 죽 훑어봐도 어지간한 기능은 다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건 이상하게 잘 안알려져있는 것 같은데... 이 설정들 중 대다수를 도스박스 실행도중에 바로 바꿀수 있습니다. 도스 프롬프트상에서 명령어를 쳐넣거나 bat 파일안에 써넣거나 해서, EMS, UMB 등을 끄거나 켜거나 할 수 있고, 실기에서는 전원 끄고 본체 뚜껑 따서 해야했던 것들-딥스위치 설정이나 옵션카드 설치 같은 것도 프롬프트상에서 바로 바꿀 수 있습니다. 실제 컴퓨터였다면 전원 켜서 동작하고있는 상태에서 각종 사운드 카드를 끼웠다뺐다할 수 있는 거죠.

이렇게 게임실행배치파일 안에 적절한 옵션 조절 명령어를 넣는 것만으로 어지간한 설정이 바로 컨트롤 되고 설정이 너무 달라서 재부팅(재실행)이 필요한 경우에는 해당 프로그램에 맞춘 다른 설정으로 자동 리부트하도록 하는것도 가능합니다. 몇가지 하드웨어 설정을 준비해놓고 필요할 때 적당한걸 골라 리부트해가면서 쓰면 걍 배치파일만으로 전부 컨트롤 가능하죠. 배치파일만 손볼 줄 안다면 10여년에 걸친 도스 피시의 발전과정을 마음대로 바꿔가며 재현할 수 있습니다. 뭐... 배치파일 만드는 것도 안해본 사람한테는 한없이 어려운 일이겠습니다만...

글구 그시기 아이비엠 게임들이 수없이 많은 옵션 하드웨어에 맞춰 만들어낸 변종들. 내장 스피커부터 시작해 온갖 사운드카드들, 허큘리스에서 SVGA까지의 온갖 그래픽 옵션에 맞춰져 나온 다른 게임 모드들을 배치 명령어만으로 전부 다 돌려가며 해볼 수 있습니다. 이게 도스박스의 최고의 메리트라고 생각해요. 해봤던 게임이라고 해도 당시에는 몰랐던 다른 모습을 볼 수 있죠.


물론 도스박스라고 완벽할 수는 없으니까 지금까지도 제대로 실행이 안되는 것들이 몇몇 있고 일부 부정확한 부분들이 있습니다. 그래도 거의 대부분의 프로그램은 원만하게 돌아가니까, 그 완성도에 업계도 주목해서 이미 꽤 오래전부터 레트로 게임을 판매하는 업자들은 도스박스에 게임을 담아서 팔고있죠. 다만 그런데서 파는 게임들은 범용성이 우선일테니 최상은 아닌 상태로 맞춰져 있을 가능성이 있는데 그런건 알아서 손봐야됩니다.


도스박스로 어지간한건 다 된다 싶으니 사람들이 눈독을 들이게된 게 있죠. 윈도우 95. 윈도우 95도, 일단 도스가 부팅된 다음에 그 위에서 돌아가는 꽤 덩치가 큰 프로그램이니까요. 그래서 도스박스에다 윈도우 95를 깔아보겠다고 용쓰는 사람들이 꽤 있었고 개발자들도 거기 동조해 그방향으로 개발을 진행해서, 최신 버전들은 윈도우 98 정도는 문제없이 깔리고 돌아갑니다.  대충 보면 대략 NT계열 윈도우가 나오기 전의 시기까지 나왔던 윈도우 9x 전용 게임들은 도스박스상에서 최상옵으로 해도 문제없이 잘 돌아가는 것 같습니다. 진짜 9x에서 돌리는 거니까 무슨 구구절절 복잡하고 귀찮은 모드설정이니 패치니 하는 거 하나도 안해도 됩니다.

다만 윈도우까는 절차나 필요한 설정을 맞추는 건 좀 까다롭습니다. 위에서 말한 다른 에뮬레이터들 단점이 적용되는 거죠ㅎㅎ






제가 게임을 싫어하진 않지만 최신게임이란 걸 안해본지 20년이 넘었습니다. 나날이 게임의 하드웨어 요구사양이 높아지고 신작게임을 사려면 컴퓨터도 새로 사야하는 게 당연시되게되자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다싶어서 포기했거든요. 그래서 제 머리속은 아직도 도스가 현역이던 시절에 멈춰있어요. 제가 맨날 수십년된 게임이야기들 밖엔 안하는 이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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