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벽을 따라 걷기

2019.03.26 05:38

어디로갈까 조회 수:785

1. 일어난 지 세 시간 만에 벌써 피곤합니다. 어젠 제가 감당할 수 없는 범위의 문제인데 책임은 져야 하는 일에 종일 휘둘렸던 하루였어요.
터덜터덜 언덕을 걸어내려가는 마음을 스톱시키기 위해 좀전에 집안 전체를 걸레질하고, 커피 내리는 일을 땀이 나도록 공들여 했습니다. 무력감이 자기모멸감으로 이어지는 걸 방지하기 위해서였어요.

사소한 노동을 향한 강박적 행위는 안정을 되돌려줬으나 공허하군요. 불가에선 <空虛>를 깨달으라고 하던데 그것과는 다른 문제인 거죠. 
'세계의 심연’이라고 말하면 터무니없이 거창한 말이지만, 그런 심연 속에서 지리멸렬하게 아우성치는 '나'에 대해 생각해보고 있습니다. "티끌아, 나는 얼마나 작으냐!"고 탄식하는 싯구에서의 그 <우리>로서의 '나'.

2. 객관적으로 평가하자면, 제가 하는 일의 70%는 이미 확립되어 세상에 알려진 지식 및 정보를 활용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런 일이란 당연히 사람을 지치게 만드는 법이죠.
하이데거는 "생각의 길이 끊어질 때, 비로소 생각이 시작된다."고 했는데,  길이 아닌 듯 앞이 막막해지는 순간- 그 때가 비로소 사고가 실존의 형식이 되는 순간이라는 뜻일까요.  근데 요즘 업무에서 제가 받는 압력이란 막막하지도 못한 피로 뿐이에요.

몇년 전까지만 해도, 저는 한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삶의 형식을 꿈꿨습니다. 밥을 버는 일도 그런 꿈꾸기와 닮았으면 좋겠어요. 노동이 삶이자 '치료'이면 얼마나 좋을까요. 왜냐하면 우린 모두 어느 만큼씩은 아프고, 맺혀 있고, 굳어 있는 존재들이니까요.

3. 누군가는 말하죠. "삶이란 그저 그런 것"이라고. 
그러나 그렇지 않다는 걸 알아요. 가장 소중한 것이 이미 삶 속에 들어 있다는 것을.
책더미를 뒤적이며 사멸한 가치나 그리워하고, 머릿속에다 삐뚠 글씨로 수신자 없는 편지나 쓰고, 이 새벽에 이런저런 음반이나 걸어놓고, 그러다 무엇에 목숨 한번 거는 일 없이 늙고 죽는다 해도, 가장 소중한 게 이미 삶 속에 들어 있다는 걸 알아요.

아직 가보지 않은 세계, 제가 모르는 낯선 언어를 사용하는 나라들이 제 안에 삽니다. 눈을 감고 두 팔을 펼쳐 그들의 말을 끌어 안으면, 오래 시달렸던 것들을 한순간에 긍정할 수 있는 용기가 생기기도 합니다. (과연?)

누군가는 말하죠. "삶은 아름답다"고. 그러나 그 말은 진술이 아니라 표현입니다.
검증할 참조항을 외부에서 찾을 이유도 없고, 들어야 할 타인이란 대상이 필요한 것도 아니에요. 삶은 아름답다고 여기는 그 자체가 한 외로운 실존의 형식이에요.

그러니 중얼거려봅니다. 캄캄한 밤에 홀로 뒤척이는 파도처럼, 대륙과 대양 위를 지나가는 구름처럼. '그저 그런 삶이 아름답다'고. 나에 닿는 모든 것이 내 죽음을 완성할 테니 '이런 삶이 아름답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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