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의 형식으로 쓰다가보니 문어체인 것인데 양해 부탁드려요.)

나는 지금 술에 취하지 않았다. 술은 단 한 방울도 마시지 않았다. 이런 말을 하는 까닭은 이런 글은 보통 술에 취한 사람이 올린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이 글을 올릴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아무래도 이 특별한 순간에 대해 기록을 해놓는 것은 적어도 나에게 의미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글을 남기기로 했다.

나는 어제 어쩌다가 보니 극장에서 세 편의 영화를 봤다. 내가 본 세 편의 영화는 루퍼드 굴드의 <주디>, 그레타 거윅의 <작은 아씨들>, 봉준호의 <기생충> 흑백판이다. 시국이 시국인만큼 주변 사람들에게도 비난을 받아 마땅한 행동을 한 지도 모르겠다. 각각의 영화로부터 큰 감동을 받았지만 각각의 영화에 대한 글을 개별적으로 올릴지언정 이 글에서는 세 편의 영화에 대한 감상은 전혀 쓰지 않을 생각이다. 나는 어제 단순히 영화를 보고 감동을 받는 이상의 경험을 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지금 내 마음 상태가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 

지금까지 나는 내 기준으로 매우 훌륭한 영화를 볼 경우 스스로 '이상 흥분' 상태라고 정의를 내린 바 있는 증상에 의해 밤을 꼴딱 샌 적이 여러 번 있었다. 그런데 지금의 상태는 그것과도 좀 다른 것 같다. 어제는 뭔가 내가 영화와 완전히 합일(?)이 되는 경험을 하지 않았나 싶다. 내가 왜 이렇게까지 말을 하냐면 어제의 내 상태는 최근의 나의 상태에 비추어 보더라도 좀 신기했기 때문이다. 최근에 나는 잠이 부족할 경우에 이전보다 피곤함을 많이 느껴서 확실히 나이가 들었음을 실감하고 있었다. 그리고 보통 약 처방을 받으면 7일이면 정상으로 회복되었던 위와 장의 상태가 최근 들어서 스스로 심각하다는 걱정이 들 정도로 좋지 않았다. 그런데 어제는 너무 신기한 일이 벌어졌던 것이다. 

분명히 잠을 4시간 정도밖에 자지 않았는데 저절로 눈이 떠졌다. 최근 들어 처음 있는 일이었는데 일찍 일어났기 때문에 오전에 <주디>를 볼 수 있었다. 아침을 간단히 먹고 영화를 봤다. 잠이 부족한 상태로 영화를 보면 보통 졸리기 때문에 비타민 음료도 준비해갔으나 영화를 보는 동안 정신이 너무 멀쩡해서 음료를 마실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이어서 <작은 아씨들>을 보기 전에 초콜렛을 하나 먹었다. 그리고 어쩌다가 보니 저녁에 <기생충> 흑백판을 볼 때까지 물 한 모금도 마시지를 않았다. 정리를 하자면 최근의 내 몸 상태를 고려한다면 한 끼 식사에 4시간의 잠만으로 세 편의 영화를 멀쩡하게 볼 수 있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런데 어제 세 편의 영화들을 보는 동안 신기하게도 전혀 피로감을 느끼지 않는 가운데 초집중 상태로 영화를 봤고 최근에 그렇게 말썽이었던 위와 장이 전혀 아프지 않았다. 스스로도 놀라울 정도로 정신이 맑고 멀쩡했기 때문에 보통 졸음을 쫓기 위해서 영화를 보는 도중에 자주 마시던 커피도 마실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완벽주의 성향이 있어서 영화를 보다가 대사를 놓쳤다거나 줄거리를 제대로 이해를 못했다거나 잠깐 딴 생각을 해서 장면을 놓쳤을 경우에 스스로 용납이 되지 않았다. 그것 때문에 항상 영화를 보고 나면 조금이라도 아쉬움과 후회, 미련이 남았다. 그런데 어제는 뭔가 완벽한 관람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객관적으로 봤을 때 내가 평소에 영화를 보고 난 이후 항상 미련이 남는 상황들이 어제는 발생하지 않았다기보다는 뭔가 그걸 초월해서 영화에 대한 만족감을 얻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내가 영화와 대면해서 뭔가를 느꼈다는 경험 자체가 중요하지 구체적으로 영화가 이런 점에서 훌륭하다거나 이런 점에서 아쉽다거나 하는 것들은 전혀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새삼스럽지만 어제 영화를 보면서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할 때는 역시 영화를 볼 때라는 것을 실감했고 그 행복감이 지금만큼 충만하게 찾아온 적이 없었던 것 같다. 97년부터 영화에 본격적으로 빠져서 살아온 이래 내 기억으로는 지금 글을 쓰고 있는 이런 순간은 없었다. 그래서 지금 이 느낌을 영원히 기억하기 위해 굳이 별 내용이 없는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나는 자고 일어나면 분명히 지금 이 감정 상태는 사라지고 어쩌면 내 감정은 지금과는 정반대로 곤두박질 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나는 영화로 인한 충만함으로 가득 차 있다. 어느 누구에게도 결코 이 충만함을 뺏기고 싶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평소와는 다르게 여전히 전혀 피곤하지 않고 전혀 졸리지도 않고 너무나 멀쩡한 정신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도무지 형언하기가 힘든 지금의 이 상태는 아마도 마약에 취한 것과도 유사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물론 나는 마약을 한 적도 없고 따라서 내가 마약에 취한 느낌을 알 리는 없다.) 

언어로 표현할 방법이 없는데 굳이 억지로 적어보자면 지금 이 순간만큼은 내가 영화이고 영화가 곧 나인 상태라고나 할까. 그래서 버스터 키튼의 <셜록 주니어>에서 유체가 이탈해서 키튼 자신이 영사기 옆에서 자고 있는 키튼을 보고 있는 장면을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항상 나는 영화를 짝사랑해왔다고만 생각했었는데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영화가 나에게 잠시 마음을 열어줬다는 생각마저 든다고나 할까. 어떤 이상한 논리에 의해 잠시나마 우주의 기운이 나에게 몰려와서 나와 영화의 합일 상태를 이루어낸 것은 아닐까 하는 기분도 든다. 내가 이런 기적 같고 신비한 느낌마저 드는 체험을 난생 처음으로 하면서 결국 이렇게 글까지 쓰고 있는 것을 보면 아마도 다른 사람들 중에도 이런 순간을 경험하는 사람은 많지는 않을 듯싶다. 그런데 영화를 본 이래 처음으로 이런 신기한 경험을 하고 보니 그동안 영화와 함께 했던 시간들이 잠시나마 몽땅 보상받는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든다. 적어도 잠시나마 영화로 인해 이런 충만한 감정 상태를 경험했다는 것만으로도 지금까지 영화와 함께 살아온 내 삶의 시간들을 결코 후회하지 않을 수 있을 것 같다.

코로나로 인해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극장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는 시점에서 나에게 이런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는 것이 너무나 아이러니하게 느껴진다. 나도 내가 왜 지금 이런 감정 상태에 잠시나마 도달해있는지에 대해 이유를 모르겠다.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하지만 이것만은 분명하다. 나에게 이건 정말 기적이며 지금 이 순간은 너무 행복하다.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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