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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스러운 한국 포스터로 사진을 걸어놓으니 좀 없어보이긴 합니다. 그럼에도 직관적으로 얻을 수 있는 정보는, 이 영화가 무려 <노매드랜드>와 경쟁을 했다는 사실이죠. 저는 <노매드랜드>가 그 해 가장 압도적인 작품이었다고 개인적으로 기억하고 있는데, 그런 영화와 최우수작품상을 놓고 겨뤘을 정도라면 이 영화 역시 만만치 않은 아름다움과 의미가 숨겨져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같은 종류의 영화는 아니라서 프레임 가득 차는 자연환경이나 대단히 현실적인 사람들이 나오는 건 아니었지만요.


영화는 검은 숲에서 시작합니다. 이 숲이 어떤 지역인지는 구체적으로 정보가 나오진 않습니다. 그러나 영화에서 대략적인 힌트를 줍니다. 주인공 제니아가 어딜 갈 때마다 사람들은 그가 어디 출신인지를 상기시킵니다. 국경 통과를 위한 사무소에 제니아가 방문했을 때 검사관은 그가 "프리피야트" 출신이라는 것을 짚습니다. 그리고 한번 더 확실하게 말합니다. 당신은 체르노빌 출신이군요. 이 께림칙한 지명이 반복적으로 호명이 될 때 관객들은 자연스레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를 떠올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영화는 제니아가 체르노빌 사고와 떨어질 수 없는 인물이라는 것을 반복적으로 암시합니다.


제니아의 직업은 안마사입니다. 그는 안마용 조립식 침대를 손수 메고 다니면서 단골처럼 보이는 고객들에게 마사지를 해줍니다. 마사지를 원하는 고객들은 다양합니다. 40대 중반의 알콜중독자 여성도 있고, 그 또래로 보이는 중년남성 암환자도 있습니다. 그보다 나이가 더 들어보이는 흰머리 여성 고객도 있고 불독들을 키우는 여성고객도 있습니다. 이들이 안마를 받는 장면은 어딘지 우스꽝스러워보이면서도 현대인의 피로와 노이로제를 총제적으로 종합한 인상이 듭니다. 시종일관 자신의 상황을 밝히고 떠들어대는 이 고객들을 군소리 없이 다루는 제니아는 어딘지 신비해보이기도 하죠.


제가 위화감을 느낀 장면은 제니아가 첫 고객을 만나서 안마를 성공적으로 끝마쳤을 때였습니다. 제니아에게는 초능력 비슷한 최면술 능력이 있습니다. 그가 안마사로서 인기가 있는 이유는 그의 손아귀 능력이 아니라 고객을 한 순간에 잠에 빠지게 하는 그 초능력에 있는 것처럼도 보입니다. 제니아가 주문 비슷한 말을 하고 고객을 잠재웠다가 깨우면 고객들은 예외없이 너무나 상쾌해합니다. 안마라는 건 원래 몸의 피로와 독소를 빼내는 과정이고 고객들은 그 개운함을 즐깁니다. 그런데 첫번째 고객이 대단히 만족스러워하면서, 바로 와인을 따라서 마십니다. 방금 전 안마로 몸의 독을 빼냈는데 또 알코올이라는 독을 몸에 들이붓는거죠. 이것은 두번째 암환자 고객도 마찬가지입니다. 안마가 끝나자마자 호들갑을 떨고 시원해하면서, 그는 곧바로 담배를 핍니다. 


제니아의 고객들은 그의 안마를 받는 것 치고는 어쩐지 건강해보이지는 않습니다. 뭔가 나아진다거나 차도가 있어야할텐데 그들은 그들만의 해로운 패턴에 갇혀있고 제니아에게 안마를 받을 때만 일시적으로 해방감을 느끼는 것처럼 보입니다. 여기서 두가지 의심을 품게 됩니다. 제니아의 안마가 무력할만큼 중독적인 세상과 현대문명의 유독함을 가리킨다거나, 아니면 제니아가 사람들을 낫게 하는 게 아니라 병들게 한다거나. 여기서 영화는 첫번째 의문을 상기시킵니다. 제니아는, 체르노빌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입니다. 영화에서는 체르노빌 사건과 그를 연관시키기 위해 사건의 발생연도와 제니아의 유년시절 연도를 확실하게 교집합으로 묶어서 대사를 던집니다. 제니아의 안마는 독을 가진 사람이 타인의 독을 풀려고 하는 역설을 품게 됩니다. 혹은 타인의 독을 풀려고 하면서 자신의 독을 뿌리는 위험한 역설로 뒤집어서 볼 수도 있겠지요. 


여기서 또 이상한 점은 그의 고객들이 그가 어디 출신인지를 다 안다는 겁니다. 만약 제니아가 체르노빌 출신인지를 모른다면 이 영화는 평이한 스릴러가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고객들이 알면서도 그에게 몸을 맡긴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조금 더 복잡해집니다. 체르노빌 출신을 아주 개의치 않는 고객인 것들도 아닙니다. 상대적으로 유복해보이는 단지에서 살고 있는 고객들은 대놓고 제니아의 출신지를 차별하는 말을 하다가 제니아에게 사과를 하기도 하니까요. 여기서 다른 의미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찜찜해하면서도 제니아를 찾을만큼, 체르노빌 사건에 무감각해지고 딱히 경각심을 갖지 않는다는 거죠.


그리고 영화는 "눈"의 의미를 보여줍니다. 제니아의 어머니가 회상 속에 등장해 "하늘에서 흩날리는 재를, 너는 눈이 내린다고 믿었지"라는 말을 합니다. 이 영화의 제목은 그래서 중의적인 의미를 띄게 됩니다. 일단 영화 속에서 첫번째 고객의 막내 딸은 더 이상 눈이 내리지 않는다며 크리스마스가, 산타클로스가 오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동시에 이것은 체르노빌 사건의 재가 더 이상은 흩날라지 않는 안전하고 무감각한 현재의 세계를 뜻할 수도 있습니다. 첫눈이 사라졌다는 제목은 체르노빌 원전 사고에 대한 기억과 교훈을 모두 잊어버린 안이한 현대 사회를 은유하는 문구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 영화 속 세계는 지금 두 종류의 위기를 한꺼번에 겪고 있습니다. 기우위기로 인해 겨울의 눈을 잃어버린 세계, 그리고 아직 끝나거나 해결된 것이 아님에도 원전 사고의 재가 흩날리던 기억을 잊은 세계.


이런 의미를 곱씹어본다면 마지막에 제니아가 마술쇼 중 사라져버리는 의미를 새로 찾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는 상자 안에서 튀어나와 인사를 해야했지만 파트너가 당혹스러워할 정도로 아예 존재자체가 없어져버립니다. 그리고 아이들은 그 마술쇼로 그를 기억하며 그를 그림으로 그리고 기억합니다. 그리고 영화 속에서 마침내 눈이 내립니다. 이것은 늘 히어로가 되고 싶어했던 제니아가 자신의 몸을 던져 이뤄낸 작은 기적이자, 세계에서 가장 악몽같던 눈인 체르노빌의 잿가루가 아닌 정말 순수하고 축복이 담긴 눈을 그대로 재현한 그만의 세계치유, 자연적인 안마일지도 모릅니다. 


영화는 아기자기한 동화같습니다. 영화 속에 보이는 마을과 사람들은 뭔가 나사가 빠진 채로 움직이는 동화 속 인물들 같고 그들은 제니아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들입니다. 제니아는 이들의 이야기를 다 듣고 그가 늘 외우는 주문처럼 고통과 병을 사라지게 해주려는 현대의 마법사입니다. 그러나 그 마법은 체르노빌이라는 가장 끔찍한 역사적 사건에서 비롯된 것이며 우리는 그 기적조차 세계의 불행에서 찾아내야 합니다. 어딘지 행복하고 붕 떠보이는 이 이야기를 따라가면 거기에는 모든 상상을 제한하는 압도적인 현실만이 있습니다. 이 영화의 대단함은 그 현실의 무게를 최대한 덜어내면서 얼굴에 근심이 어리게 만드는 그 사건을 알쏭달쏭한 우화처럼 그려낸 그 창조력에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 정성일 평론가의 평을 듣고 재구성한 평입니다. 당연히 생략한 부분이 많고 중간 중간에는 제가 느낀 것들을 적었습니다. 평론가는 이 영화를 이해하기 위해 타르코프스키의 영화 세편, <희생>, <스토커>, <거울>을 레퍼런스로 언급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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