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니 모리슨의 소설 <빌러비드>를 읽었습니다. 몇 달 전에 이 소설이 새로운 번역으로 나온다는 걸 알고 도서관에 신청해 놨는데 (중복 신청으로 밀려난 후) 까맣게 잊고 있다가 엊그제 생각나서 빌려 읽었어요. 예전 번역은 (제 컨디션이 안 좋았는지) 이상하게 잘 안 읽혀서 읽다 말았는데 이번에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에서 나온 최인자 교수의 번역은 술술 잘 읽혔습니다.  


이 소설을 읽으며 헤르타 뮐러의 소설 <숨그네>가 생각났어요. <숨그네>가 고통스러웠던 경험을 아름답고 투명한 언어에 꾹꾹 눌러 담아 한없이 고요하게 흘려보내는 느낌이라면, <빌러비드>는 고통스러웠던 경험이어서 오히려 기억조차 제대로 못하는, 조금 말하고 쉬었다가 다시 조금 말하고 쉬면서 기억을 더듬어 나가는 느낌, 도대체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라서 망설이고 잠깐씩 숨을 멈추는 그런 느낌입니다. 두 소설 모두 고통의 즉각적인 생생한 묘사로 독자를 괴롭히기보다는 고통의 깊이를 바라보게 하는 듯한 소설이에요.

      

제 몸이 제 것이 아니었던 흑인 노예들의 이야기, 자기가 낳은 자식들의 얼굴조차 기억할 수 없었던 흑인 여자노예들의 이야기일 뿐만 아니라 과거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과거에 사로잡혀서 미래로 나아갈 수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 세상으로부터 문을 닫아걸고 숨어버린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고통 받았던 영혼들을 위로하기 위한 소설, 그 영혼들을 불러내 씻김굿을 하는 듯한 소설입니다. 

 

엘프리데 옐리네크의 <피아노 치는 여자>, 헤르타 뮐러의 <숨그네>와 함께 토니 모리슨의 <빌러비드>는 여성작가가 고통에 대해 쓴 가장 인상 깊은 소설로 저에게 기억될 것 같아요. 하네케 감독의 영화 The Piano Teacher(2001)를 보고 잘 이해가 안됐던 분이 계시다면 원작인 <피아노 치는 여자>를 읽으면 다 이해가 되실 겁니다. 오랜만에 독후감을 쓰고 싶은 소설을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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