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지 않을게요

2015.04.16 16:36

늘보만보 조회 수:1450

제가 살고 있는 곳에선 4월 중순 딱 이맘때 새해 축제를 성대하게 엽니다. 낡은 해의 마지막 날-아무 해도 아닌 날-새해의 첫날 이렇게 사흘을 연휴로 쉬면서 집 안팎 청소를 하고, 집에 모신 불상을 꽃물로 씻고, 가족들끼리 꽃물을 목덜미에 부어주며 축원을 하고, 집 앞에서, 거리에서 지나가는 모든 이들에게 물을 부어주며 한 해의 먼지를 떨어내고 우기를 기다리며 새해를 맞이하죠. 젊은이들은 이 물붓는 풍습을 더욱 액티브하게 발전시켜 물과 술과 음악이 짬뽕된 거대한 물축제를 만들어냈습니다. 태국 방콕 카오산, 라오스 루앙파방, 미얀마 만달레이 등이 이런 물축제로 유명한 곳들이죠.

작년에는 새해 연휴가 4월 13, 14, 15일이었습니다. 13일이 일요일이라 대체휴일로 16일까지 놀았지요. 사흘간 진을 빼며 논 터라 16일에는 늦잠을 푹 자고 친구를 만나 점심을 먹었습니다. 연휴기간에 유일하게 문을 열고 있던 제일 큰 한국식당이었는데, YTN인가 KBS World인가 뉴스가 켜져 있었고 세월호가 뒤집힌 사진을 배경으로 <안산 단원고: 학생 338명 전원 구조>라는 자막이 떠 있었던 게 기억납니다. 뭐 저런 일이 다 있나 싶었지만 다 구조했다니 다행이네 하며 마저 밥을 먹고 이리저리 또 놀다 저녁에 집에 들어왔지요. 그런데 인터넷 뉴스를 들여다보니 이게 웬걸, 아침에 다 구했다던 사람은 어디가고 161명인가로 구조인원이 줄었더군요. 막 가슴이 뛰면서 식은땀이 흘렀습니다. 이거 뭐지...

그렇게 초조와 불안과 분노가 짬뽕된 며칠이 지나고 에어포켓 같은 데 살아있지나 않을까 했던 일말의 기대마저 사라져갈 때쯤 혼자서 노란 종이배를 접기 시작했습니다. 멀리 떨어진 이 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더라고요. 그때까지 아직 못 찾은 사람이 한 130명쯤 됐을 거예요. 그 수만큼 접어서 가게 창에 붙여놓고 한 사람씩 찾을 때마다 배도 하나씩 떼내서 향과 함께 살랐습니다. 그런데 아홉 명에서 몇 달째 더이상 줄어들지를 않더군요. 결국 미안하게도 크리스마스 장식을 시작할 즈음, 아홉 개의 배를 떼서 한꺼번에 하늘로 날려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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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은 자의 슬픔'이랄까 그런 걸 뼈저리게 실감한 1년이었네요. 슬펐다가 화났다가 외면했다가 미안했다가 마음이 종잡을 수 없을 정도로 갈팡질팡하더군요. 하지만 하나 분명한 건, 지난 10여 년간 맞아온 이 곳의 새해맞이 축원의 물이 아무리 향기롭고 따뜻하더라도, 앞으로는 늘 진도 앞바다 차가운 4월의 물 한 줄기가 섞인 듯 느껴지리라는 겁니다.

잊지 않을게요. 그리고 남은 아홉 분도 올해엔 꼭 돌아오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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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이미지는 제가 직접 만든 겁니다. 필요하신 분들은 아무데나 출처표기 없이 퍼가셔도 괜찮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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