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낭] 기울어진 운동장

2017.03.17 10:59

오빈 조회 수:1812


최근 대선 후보들이 질세라 여성 정책 공약을 내놓고 있어서 그런지 커뮤니티 게시판이나 트위터를 보면 스트레스 받을 만한 글들이 마구 올라오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랑 멱살 잡고 싸울 수는 없는데, 그렇다고 안보기에는 너무 많다 보니 스트레스가 되네요. 


예전에 어느 토론 프로에서 어느 패널 (아마도 유시민?)이 '우리나라가 민주화가 된 것은 미국 덕분이다. 미국에 의해 들어온 교육제도에 의해서 '민주주의'라는 것을 배웠는데,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니 일당 독재하고, 군인 독재하고 그러거든. 그러니까 학교에서 배운 것과 다른 현실에 대해 중고등학생들이 들고 일어난거지..' 라는 말을 했어요. 어느정도 웃자고 하는 말이지만, 어느정도는 맞는 말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자라던 시대는, 그리 먼 옛날도 아니지만, 집과 사회에서는 배운 가부장적이고 남성중심의 교육을 알게 모르게 받게 되는데, 교과서에는 성평등, 인종평등, 소수자 평등을 가르쳤어요. 이렇게 사회와 교과서가 다르다면, 보통은 교과서쪽이 '이상적인' 쪽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즘 학생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요.


IMF 시대를 겪고, 힘들게 학교를 졸업해서 취업을 하고 연애도 하고 결혼도 했어요.

연애 하던 시절에는 남자가 을이라고 징징대던 시기도 있었고, 회사에서 여자 동기들만 빼주는 '힘든 일'에 대해서는 불만을 가지던 시절도 있었죠. '교과서에는 남녀평등이라며!' 라면서요. 그러다가 결혼도 하고 나이도 먹으면서 경험치가 쌓이니 그때 그랬던 것이 창피한겁니다. 


예전에 보수-진보 얘기하면서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는 비유가 많이 나왔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는 남녀차이도 그런 것 같습니다. 물론, 제 주변에서만 그런 것이고 세상 남자들이 역차별 받고 희생하고 억울한데 저만 운 좋게 아직도 남자 중심인 사회에서 살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만...

그떄도 지금도, 기울어진 운동장을 조금이라도 덜 기울어지게하려고 하면 난리가 났었죠. 기울어진 것을 평형을 맞추려고 하다 보면 한번에 딱 되는게 아니라 왔다 갔다 하면서 조정을 거쳐야 하고 그러면서 평형이 맞춰지는 것일거에요. 지금 이 문제도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기울어져 있어서 이득을 보는 쪽은 그게 너무 당연한거라 '희생', '뺏긴다' 라고 생각하고, 피해보는 쪽을 적대시하죠. 빨갱이! 하고 메갈! 하고 뭐가 다른건지 모르겠습니다. 그저 피해보다가 덜 피해 보게 되는 것 정도도 이런 저항이 생기는구나 싶습니다. 


페미니스트도 못되는 제가 왜 이런 걸 보면 스트레스를 받냐면요..

내가 저지른 일이 아님에도 동족으로서 창피해요. 내가 개인적으로 저지른 일은 아니지만 그 시스템하에서 시스템을 유지하는데 조력하고 이득을 얻고 있기 때문에 미안해요. 이건 우리가 일본에게 '너네 반성 제대로 안해?!' 라고 소리 칠때 일본인들이 겪은 감정과 비슷할지도 몰라요. 일부는 '사실파악을 해보니 내 개인이 저지른건 아니지만 일본인으로서 반성한다'라고 할 수도 있고, 일부는 '내가 했어? 왜 일본인을 다 도맷금으로 몰아가?' 라고 반응할수도 있지요. 아마 저는 전자의 경우가 아닐까 싶습니다. 옛날에는 후자였고.. 한국남자, 한남이라는게 멸칭이 되었다는데 왜 우리 아버지, 할아버지들은 이런 세상을 만들어서 한국남자가 멸칭이 되게 만드셨습니까.. 하고 원망도 해봅니다.


가부장적인 교육을 받아온 제 사고로는 일단, 역차별이니 뭐니 하면 '남자가 여자한테 졌다고 승복도 못하고..' 라는 생각이 먼저 듭니다. 이게 옳지 않은 사고 전개라는 것은 알기 때문에 저는 페미니스트는 못됩니다. 

말로라도 선언하고 행동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겠지만, 제 사고가 '남자로서의 가부장적인 정체성' + '교과서적인 성평등'의 결합이라서요. 남자니까 뭐 해야지, 남자니까 뭐 하면 안되잖아라고 사고하고 행동하면서 그래도 성평등은 이루어져야 하니까 하는 사람이 페미니스트일수는 없으니까요.


그래서, 교과서에서 배운대로의 세상이 되는 것에 대해 거부하고 저항하는 동족들을 볼때마다 가부장적인 남성으로서 갑갑해요.  여성과 성평등 공약이 기울어진 운동장을 덜 기울어지게 하려다가 반대로 확 기울어지게 하는 공약을 내놓는 후보가 있어도 그 이유로 욕하거나 지지철회를 하거나 하지는 않을 겁니다. 실제 그 공약이 이루어져 제 개인이 피해를 본다면... 어쩝니까, 조상들이 이런 세상 만든 결과의 댓가를 내 세대에 받는구나 하는 수 밖에. 


며칠전에 쓴 글인데, 망설이다 등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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