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어체로 씁니다. 양해 바랍니다.

어렸을 때 노을을 보며 생각했다. 이 울렁이는 감정은 어른이 되면 나을 것이라고. 어리니까, 철이 없으니까 괜히 울적해지는 거라 생각했다. 민증을 받고 대학생이 되어서 깨달았다. 이 주홍빛 슬픔은 이 시각 이 풍경에 영원히 끌려다닐 거라는 것을. 나이가 들 수록 사연은 많아지고 그리운 시간이 길어졌지만 그와 무관하게 노을들은 늘 슬펐다. 오히려 나 개인의 슬픈 사건들이 노을 안에서 부질없이 녹아버리는 듯 했다. 밤과 낮의 사이에서, 이글거리다 산 뒤로 강 아래로 녹아버리는 그 거대한 해. 어제와 그제처럼 아무 일도 없이 하루가 또 끝나버렸다는 허무함이 나를 압도했다. 하루는 매일 멸망하고 나는 그 빛 속에서 조용히 타올랐다. 작은 미소하나 띄울 수 없는 채로 늘 노려보았다. 그런 우울은 나만 겪은 게 아니었고 밤이 되면 이내 낫곤 했다. 그리고 평생동안 만성으로 갖고 갈 그런 병이었다.

지는 해는 가슴에 사무친다. 언제부터냐면 아직 어리다며 비웃음을 살 때부터. 교복을 입고, 반항과 좌절을 겪으며 은희는 슬퍼했다. 깔깔거리고 꺄르륵거릴 거라는 소녀들의 세계는 거짓말이다. 아침햇살만이 하루 내내 내리쬔다는 듯한 그 빈약한 상상 속에서 은희는 모두가 일찍 배울 수 밖에 없었던 대답을 해야 했다. 세상 곳곳에 휘갈겨져있던 그 질문들. 어린 게 뭘 알아. 은희는 부르르 떨면서 소리쳤다. 내가 왜 몰라. 내가 뭘 몰라. 그 좋았던 햇볕은 뉘엿뉘엿 쓰러지다가 이내 밤에 덮인다. 결국은 다 끝에 다다르고 만다는 걸, 그 끝이 다른 곳 다른 이에게서 같은 형태로 반복된다는 걸 은희는 계속 배운다. 그 때마다 은희는 울었다. 노을빛의 구겨진 얼굴은 눈썹으로 서러움을 그렸다.

툭하면 머리를 때리며 장남 대접에 환장한 오빠 새끼. 툭하면 공부타령에 몰래 춤타령을 하면서도 엄마한테 손찌검을 하는 아빠. 자기한테 취해있는 남자들과 한 집에서 부대끼며 은희는 강요되는 인내를 배운다. 그래서 발랑 까졌다는 소리를 들을 지언정 순한 남자친구와 연애를 했을지도 모른다. 좋았지만 갑자기 끝이 났다. 귀한 도련님을 누가 넘보냐며 사모님께서 팔을 낚아챘다. 떡집 딸이 주제를 모르고. 뜨거운 여름도 갑자기 질 수 있다. 여전히 뜨거운데 혼자 더위를 견뎌야 할 때도 있다.

갑자기 다른 사랑도 찾아온다. 눈동자를 빛내며 선배 선배 하고 쫓아다니던 애도 있었다. 손을 잡고 걷기로 했고, 담배도 같이 피웠다. 콜라텍도 갔다. 갑자기 멀어졌다. 방학이 끝나고 다시 봤을 때, 그 애는 은희에게 이별을 납득시켰다. 그건 지난 학기 일이잖아요. 영영 봄일줄 알았던 설렘과 일탈은 한 학기를 채 버티지 못했다. 또 해가 저물고, 노을은 고요하게 걸려있고.

가까워졌다 싶으면 떠나간다. 싸워서 쎄하게 있다가 헤어지기 직전에야 울며 사과한 친구가 그랬다. 학원에서 그렇게 헤어진 사람은 또 있었다. 은희를 꼬마라고 얕보지 않던, 같이 분노해주던 한문 선생님. 굳은 얼굴 위에 떠올라서 미소는 더 무게있었고 흐릿한 목소리는 귓가에 안개처럼 깔리곤 했던 사람이었다. 그는 은희에게 처음으로 참지 않아도 될 때 서러움이 분노가 될 수 있다 가르쳤고 빨간 페인트로 온 벽위에 휘갈겨진 아우성의 스산한 온도를 알려주었다. 은희는 그와 세번 이별했다. 한번은 이제 떠나야 한다고 고했을 때. 또 한번은 간절하게 마지막 인사를 나누려 했지만 결국 만날 수 없었을 때. 은희는 또 소리지르며 운다. 한 여자아이의 지긋한 소망은 기억하지도 않으려는 다른 어른의 말 한마디에 다 어그러진다. 그렇게 또 헤어지고. 그리고 은희는 선생님을 다시는 보지 못한다. 어떤 사람들은 본인도 모르게, 세상이 느닷없이 작별인사를 시키기도 한다.

어떤 사람의 자리는 텅 비었고 어떤 사람은 간신히 제자리로 돌아온다. 세상이 뚝 부러진 틈 앞에서 다시 세상은 시작한다. 만약 그 때 그곳에 있었더라면. 자기 자리를 괜히 확인해보며 은희는 남은 자와 함께 되새긴다. 삶은 이어지고 있고, 자기 삶에서 희미해질지언정 영원히 멈춰있는 시간의 사람들이 자기 자리를 만들었다고. 끝인가 하면 시작이고, 영영 이어질 줄 알았던 것들이 끊어지기도 한다. 하루는 결국은 끝나지만 시간은 누가 태어나든 죽든 계속 흘러간다. 늘 해가 지는 시간마다 끝을 체감하던 은희가, 동이 트기 전 푸르스름한 새벽을 맞이하며 세계를 응시한다. 하마터면, 을 뛰어넘고 또 삶은 이어지고 흘러간다고. 다시 시작되고 있다고. 어디로 갈까. 누구를 만날까. 과거에 남겨진 사람들의 그림자를 마음에 품고서, 은희는 다시 그 거대한 시간 속을 날아간다.

당장 무엇을 바꾸지 못해도, 삶의 단짝들을 다 붙잡고 함께 하지 못해도, 은희는 살아남아 살아간다. 거대한 세계 속에서 슬픈 시간을 그저 애써 납득할 뿐이지만, 은희는 날개짓을 멈추지 않는다. 태양이 벌새의 날개를 비출 때, 그 빛은 벌새의 투명한 날개 안에서 반짝인다. 영롱하게, 찬연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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